[한국사의 안뜰] 조선시대 孝가 곧 국시.. 부모들 '마음의 저울'로 달아 재산 증여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
지극히 세속적인 이 금언은 자본주의 시대인 현재에 어울린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사실 조선시대 선비들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지금보다 더 정확히 계산하여 좀 심하다 싶을 만큼 확고했다. 특히 부모와 자식, 형제 사이에도 공짜는 없었다. 조선시대는 ‘효(孝)’가 곧 국시(國是)였다. 부모에게 효도해야 하는 것은 계산하지 않더라도 당연한 것이지만, 부모는 자식들의 효를 마음의 저울로 달아보고 그에 대한 대가로 사랑이 담긴 재산을 물려주었다. 재산에는 자식들에게 강한 동기부여를 통해 효도 경쟁을 유도하려는 뜻도 담겼다. 옛사람들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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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3년 박의장이 양부에게 재산을 물려받은 뒤 관청에서 발급받은 문서인 ‘영해부 입안’. |
박의장이 과거에 급제하자 그의 친아버지는 은근히 파양했으면 하는 마음을 비췄다. 당시 관료는 자식이 있을 경우 양자를 들이지 못하도록 국법이 정하고 있었다. 양아버지는 공직윤리도 그렇고 동생인 친부의 마음도 헤아려 아들 박의장을 생부에게 돌려보내기로 어렵게 결심했다. 양부는 파양을 결정하면서 20년이 넘는 세월을 되돌아보았다. 그동안 아들이 바르게 자라면서 주었던 소소한 기쁨과 과거 급제의 영광을 준 데 대해 보답하고자 마음을 정했다. 이 모든 것들에 대한 정산으로 양부는 노비 셋과 논밭 2000평을 박의장에게 주었다. 그리고 1584년, 이 내용을 문서에 적었다. “자식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조정의 관료인 내가 너를 양자로 들인 것은 조금 곤란한 면이 있었다. 따라서 은혜와 사랑의 관계를 끊어 파양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동생(친부)도 마음을 터놓고 나에게 이야기했다. 그러나 너는 20년이 넘도록 나를 아버지로 모시고 살았으니 그 정성과 의리가 부모 자식과 같고 은혜와 사랑이 너무도 크다.”(‘영해부 입안’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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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덕 무안박씨 400년 종가의 안뜰. |
1611년 가을 어느 양반집에서 성대한 경로잔치가 열렸고, 여기에는 인근의 어르신들이 초대되었다. 박의장이 장모 진성이씨를 위해 마련한 자리였다. 임진왜란 당시 전장에서 고군분투할 때 고향에서 부모의 곁을 지켜 주었던 부인에 대한 고마운 마음이 녹아 있었다. 사위의 마음씀씀이를 헤아린 진성이씨는 딸과 사위가 사랑스러워 그 어떤 ‘이유’를 만들고 싶었다. 기회를 살피다가 마침내 딸과 사위가 자신을 위해 경로잔치를 열자 결심했다. 출세한 사위가 마련해 준 경로잔치는 진성이씨에게 두고두고 자랑거리가 되었던 것이었다. 진성이씨는 자신의 마음을 담담히 서술했다. “딸 사위가 언제나 봉양을 영화롭고도 지극정성으로 했다. 그러다가 얼마 전에 특별하게도 나에게 경로잔치를 열어 주었다. 그 마음씀씀이와 의리가 아주 극진한 데까지 이르렀다. 쇠락해가는 가문의 영광스러움과 경사를 이루 말로 다 할 수가 없다. 그 고마움을 감당할 수가 없기에….”(‘1612년 별급문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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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2년 진성이씨가 사위 박의장에게 재산을 나누어 준 분재 문서. |
1727년 가을, 무안박씨 종가에서 혼례가 성대하게 있었다. 그리고 조금 뒤 종손 박정걸은 며느리 부부와 친척들을 불렀다. 종손은 며느리를 명가의 규수 중에 고르고 골라 맞이했었다. 그리고 혼례가 있은 후, 새아기에게 뭐든 해주고 싶어 ‘이유’를 찾고 찾았다.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라서일까? 시아버지는 며느리의 엄숙함과 절제된 모습을 굳이 발견해냈다. 그리고 ‘기쁘고 즐거움을 견딜 수 없어’ 며느리에게 노비 셋과 땅 1000평을 특별히 선물하며 이런 기록을 남겼다. “이처럼 별도로 재산을 주는 일은 네가 우리 집의 큰 며느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네가 우리 조상들의 제사를 받들게 되어 집안이 의지하는 것이 아주 중대하다. 뿐만 아니라 우리 가문에 시집와서 행동 가짐이 아주 엄숙하여 보기가 좋다. 부모 된 마음에 기쁘고 즐거움을 견딜 수 없다. 그래서….”(‘1727년 별급문서’ 중) 이 내용 또한 문서에 기록되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함께한 다른 자손들과 친척들이 증인이 되었다.
부모와 자식의 사랑을 매정하게 계산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옛사람들은 계기가 있을 때마다 자식들의 ‘효’를 마음으로 계산하고 선물로 정산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문서에 글로 써서 그 이유를 분명히 했다는 점이다. 부모 입장에서는 사랑과 선물에 대한 의미 부여였고, 자식에게는 면려의 뜻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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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환 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 |
최근에는 자식의 도리보다 부모의 의무가 부쩍 강조되는 분위기다. 옛사람들이 그러했듯이 세상에 공짜가 없음을 부모와 자식은 알아야 한다. 자제들에게 선물을 할 때에는 부모의 뜻과 의미를 담아야 하며 자식들은 새겨들어야 한다. 또한 부모들도 명심해야 한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 이제 곧 설날이다. 통상 자식들은 두둑한 세뱃돈을 기대하고 때론 경쟁을 벌이기도 한다. 하지만 부모들은 그 돈의 의미를 말해주지 않는다. 이번 설에는 세뱃돈의 의미나 뜻을 칭찬으로 설명해 주어 면려하는 것이 어떨까? 설날 용돈이 조부모와 부모를 기쁘게 한 데 대한 하나의 대가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칭찬하는 것이다. 선조들처럼 글로 써서 주지는 못하더라도 마음에 남을 수 있는 메시지가 될 것이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는 것도 말이다.
정수환 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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