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는 가족에, 가족은 비혼자에 떠넘겨.. '돌봄의 민주화' 고민할 때
[경향신문] ㆍ지은숙 연구원의 비혼 연구
지난해 한국은 65세 이상 노인 인구가 14%를 넘어서며 고령사회로 진입했다. 2000년 고령화사회(65세 인구가 7% 이상)로 진입한 지 17년 만이었다. 이미 초고령사회로 접어든 일본이 고령화사회에서 고령사회로 진입하는 데 24년이 걸렸다. 미국은 72년, 영국은 47년이 걸렸다. 다른 나라와 비교해도 한국의 고령화 속도는 이례적으로 빠르다. 한국이 초고령사회(65세 인구가 20%)로 진입하는 데는 9년밖에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예견한다.
이미 초고령사회 진입한 일본 고령자 4분의1 비혼 자녀와 동거 ‘개호살인’ 사회적 문제로 떠올라 한국도 부모 돌봄 분배 비민주적 일과 돌봄 양자택일 강요 받아 비혼자녀들 경력단절 부르기도 가족 중심의 배타적 공동체 아닌 다양한 사회적 연결 인정해야 ‘타인을 돌볼 시간’ 유연하게 사용
“고령화와 비혼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상황에서 노인 돌봄이 이슈가 돼야 한다. 누군가에게 돌봄을 ‘독박’시키는 방식은 안된다. 국가는 가족에게 떠넘기고, 남자는 여자에게 떠넘기고, 기혼자는 비혼자에게 떠넘긴다. 돌봄을 민주화해야 한다. 사람들에게 돌봄을 할 시간을 줘야 한다. 일하는 방식의 개혁 없이는 고령화에 대한 대응이 안될 것이다.” 지은숙 한림대 일본학연구소 연구원(48)이 말했다.
비혼인 지 연구원은 스스로의 삶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비혼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비혼자 집단이 많은 일본으로 떠나 연구에 착수했을 때, 비혼들이 당면한 가장 시급한 문제가 ‘부모 돌봄’이라는 걸 알게 됐다. “알고 지냈던 비혼들이 부모를 돌보느라 돌아다니지 못하고, 많은 비혼들이 부모 돌봄에 대해 걱정하고 있었어요.” 지 연구원은 “고령화로 노인 돌봄이 사회적 과제로 부상하면서 비혼 자녀가 부모 돌봄자로 호명되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은 일생에 한 번도 결혼하지 않은 사람이 남성은 5명 가운데 1명, 여성은 10명 가운데 1명(2010)에 달한다. 65세 고령자가 비혼 자녀와 동거하는 비율도 26.4%(2012)에 이른다. 일본에선 부모를 돌보는 비혼인 ‘개호독신’이 늘고 있지만 이들을 지원하는 사회적 시스템이 부재한 가운데 고통 속에 부모를 살해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개호살인’ ‘개호자살’이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초고령사회를 향해 가속페달을 밟고 있는 한국에 닥쳐올 미래다.
지난 15일 <비혼을 통해 본 현대 일본의 가족 관계와 젠더 질서> 박사 논문을 펴낸 지 연구원을 만나 비혼과 돌봄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지 연구원은 30대 중반에 비혼으로 살 결심을 하게 됐다. 그는 “두 번 정도 결혼 직전까지 갔다. 가정 분위기도 비교적 평등했고, 위계질서가 강한 직장생활을 하지 않았다. ‘여성’으로 살아보지 않았는데, 결혼이 젠더 질서로 들어가는 일종의 협상과정이었다. 내 위치가 낮아지는 것 같고 굴욕적이었다. 결혼하지 않기로 하면서 인생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뒤늦게 공부를 결심했다. 공부를 통해 가장 남는 게 뭘까 생각해보니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를 연구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비혼을 연구하게 됐다.
‘비혼 선언’을 했을 때 돌아온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 부모님은 오히려 “너는 영원히 우리 딸”이라고 말했다. 지 연구원은 “비혼은 개인화된 삶이라고 생각했는데, 장기적으로 가족에게 결속되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그때부터 비혼자의 가족관계에 관심을 갖게 됐다. “비혼문제는 골드미스, 라이프스타일을 중심으로 연구됐다. 그런데 실제 내가 느끼는 불안이나 문제의식과는 괴리감이 있었다”고 말했다.
지 연구원은 일본 비혼 여성을 역사적으로 추적했다. 비혼자 삶의 양식을 기준으로 ‘가족의 시대-싱글의 시대-돌봄의 시대’로 구분했다. 전쟁으로 남자들이 죽었던 전후, 혼기를 놓친 비혼 1세대인 ‘전쟁독신’ 여성들이 출현했다. 이들은 경제적 자립을 추구하며 ‘독신부인연맹’을 만들었다. 1980년대엔 싱글 여성들이 늘어나면서 비혼이 하나의 삶의 방식으로 자리잡았다. ‘싱글의 시대’에 비혼 여성들은 소비사회의 주역으로 부상했다. 2000년대 고령화와 함께 비혼 인구가 늘어나면서 ‘돌봄의 시대’에 진입한다. 비혼 여성뿐 아니라 비혼 남성들이 부모 돌봄을 책임지게 됐다. 1990년대 시부모의 돌봄을 전담하던 며느리들이 돌봄의 사회화를 요구하는 ‘며느리의 반란’으로 2000년 개호보험제도가 도입되면서, “내 부모는 내가 돌본다”는 인식이 확산됐으며 결과적으로 친자녀 가운데 비혼 자녀에게 돌아가게 됐다. ‘비혼 돌봄자’라는 새로운 사회 집단이 출현한 것이다.
“한국이나 일본 사회는 비혼이 공동체의 재생산에 기여하지 않는 비생산적 존재로 여겨지죠. 저출산 담론이 표적으로 삼는 게 비혼자 집단입니다. 가족 안에서 돌봄을 분배할 때 생산적 가정을 만드는 건 기혼 자녀, 부모 돌봄은 비혼 자녀가 떠안는 이중구조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지 연구원은 “부모 돌봄 분배가 민주적이지 않다”고 말했다. 부모 돌봄의 1순위는 비혼 딸, 2순위는 기혼 딸 또는 비혼 아들, 다른 대안이 없을 때 기혼 아들이 책임을 떠안는다. 전통적인 가족의 해체와 고령화의 진전으로 빚어지는 돌봄의 공백을 비혼 자녀들이 메우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비혼의 돌봄자들을 지원하는 시스템은 부족한 데 있다. 일본에서는 개호 때문에 일을 그만두거나 파트타임으로 이직하는 비혼들이 늘고 있다. 2006년 일본에서 동거가족이 있는 경우 생활원조서비스를 제한하면서 일하며 부모를 돌보는 비혼들이 큰 타격을 입었다. ‘일과 부모 돌봄의 양자택일’을 요구받으면서 노인 돌봄을 이유로 한 전직과 이직이 14만4800명으로 증가했다. 증가분은 대다수 비혼자인 것으로 알려졌다.
‘일과 돌봄의 양립’이 불가능한 상황은 비혼 자녀들의 ‘경력단절’을 부른다. 일과 육아의 양립이 어려운 여성들이 경력단절에 처하는 것과 유사하다. 비혼자들은 돌봄이 끝난 후 일도 사회관계도 단절된 상황에서 사회적으로 고립된다. 지 연구원은 “일과 돌봄의 양립이 가능하도록 접근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일본 상황과 한국 상황을 바로 연결시킬 수 있을까. 한국의 비혼 인구 증가속도도 빠르다. 2015년 기준 30대 미혼율은 36.3%에 이르고, 40대 미혼율도 13.6%다. 지 연구원은 “한국은 가족의 시대, 싱글의 시대, 돌봄의 시대가 동시에 압축적으로 발생하고 있다”고 말했다. 비혼 여성 협동조합 등 비혼 여성들의 공동체가 있고, ‘골드미스’로의 화려한 싱글의 삶도 존재한다. 그 이면에는 부모를 돌보는 비혼들의 삶도 있다. 지 연구원은 “비혼 증가와 고령화 속도를 봤을 때 비혼 돌봄은 한국이 곧 마주할 과제”라고 말했다. 자녀가 없거나 1명뿐인 가족이 늘면서 모두가 각자의 부모를 돌보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지 연구원은 “일본에서는 외둥이끼리 결혼한 부부가 각자 부모를 돌보는 사례도 많다”고 말했다.
누구도 돌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시대가 도래할 것이다. 그렇다면 돌봄을 민주적으로 분배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누가 누구를 돌볼지 국가가 정해주지 말라”고 지 연구원은 말했다. 그는 “육아휴직, 가족돌봄휴직 등 기존 제도가 누가 누구를 돌볼지를 국가가 정해주는 것이다. 그러면 실제로 남을 돌볼 의사가 있는 사람들이 돌봄을 못하게 된다. 내 동거인이나 파트너가 아파도 휴가를 낼 수 없고, 이웃이 아파도 휴가를 낼 수 없다”고 말했다. 지 연구원은 “사람들이 누구나 안심하고 좋은 관계를 맺고 타인과 연결될 수 있도록 ‘타인을 돌볼 시간’을 유연하게 쓸 수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가족 중심의 배타적 공동체가 아닌 다양한 사회적 연결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제도가 갖춰져야 한다는 것이다.
“성소수자 가족구성권을 인정하고, 비혼 상태에서도 안심하고 아이를 기를 수 있도록 사회제도가 갖춰져야 한다. 어떠한 형태의 연결도 환영한다는 메시지를 준다면, 저절로 결혼도 많이 하고 출산율도 올라가지 않을까. 결혼하지 않은 여자가 아이 키우기 좋은 사회는 결혼한 사람이 아이 키우기는 훨씬 더 편한 사회다.”
지 연구원은 현재 일본의 기혼 남성이 부모를 돌보는 사례를 연구하고 있다. 부모를 돌보는 남성들이 기존의 남성성을 해체하고 재구성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외둥이가 늘면서 부모를 돌보는 기혼 남성도 늘고 있어요. 사회 주류인 기혼 남성이 돌봄을 시작하니, 비로소 사회적 해결책의 논의가 시작되고 있어요.”
<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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