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나의 노후도 부모의 노후도 내몫.. '화려한 싱글'의 삶은 멈췄다

이영경 기자 2018. 1. 27. 0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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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독박돌봄’에 갇힌 비혼 자녀들

병실은 고요했다. 창으로는 인근 주택과 북한산 자락이 내다보였다. 바깥 날씨는 추웠지만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은 따스했다. 두 달 전 홀로 돌보던 어머니를 떠나보낸 김선숙씨(66)는 서울 은평구의 한 정형외과에 머물고 있다. 치매에 거동이 불편했던 어머니를 눕히고 일으키느라 오른쪽 어깨의 인대가 파열됐기 때문이다. 다음달 초 큰 병원에서 정밀검사를 받기 전까지 입원해 치료를 받고 있었다. 작은 정형외과 입원실이라 사람은 많지 않았다. 간이침대 세 개가 나란히 햇살을 받고 있는 병실을 김씨 혼자 사용하고 있었다. “이전에도 이 병원에 두 번 입원했어요. 팔이 부러지고 다리가 부러졌을 때. 그때 어머니를 혼자 둘 수 없으니까 같이 입원했죠. 제가 없으면 밥도 잘 안 드시고 그랬으니까. 저는 아플 자유도 없었다니까요.” 아마도 김씨가 앉아 있는 침대 맞은편에서 몸이 불편한 노모가 누워 딸의 간병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지난 19일 입원 중인 김씨를 만났다. 김씨는 지난 6년 동안 치매에 거동이 불편했던 노모를 돌봤다. 몇 차례 어려운 고비를 넘기던 어머니는 지난해 11월 영원히 눈을 감았다.   비혼인 김씨는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젊은 시절 몇 번의 결혼 기회는 있었지만, 어쩐지 인연이 닿지 않았다. 그 후로는 쏙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음대를 졸업하고 피아노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김씨는 여행도 다니고 하고 싶은 공부도 마음껏 했다. “친구들이 저를 ‘자유로운 영혼’이라고 했어요. 결혼을 했다면 남편도 있고 자식도 있으니까 그러긴 힘들었을 거예요. 주변에 저 부럽다는 사람이 많았어요.”   비혼의 ‘자유로운’ 삶은 여동생의 죽음과 함께 끝이 났다. 김씨가 51세 때 여동생이 간암으로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언니와 남동생 셋이 있었지만 모두 결혼했다. 남겨진 두 조카 가운데 중학생이던 조카딸은 비혼인 김씨가 돌보게 됐다. “여동생 남편이 경제적 능력이 없었어요. 여동생이 죽기 전 조카딸에게 ‘넌 피아노 이모한테 가’라고 했죠. 그때부터 내 인생이 생각지 않은 쪽으로 흘러갔어요.”   2012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홀로 지내던 어머니가 고관절이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다. 나쁜 일은 겹쳐서 왔다. 고관절 수술 때문에 전신마취를 한 이후 망상 증세를 보이시던 어머니는 치매 판정을 받았다. 누군가 ‘붙박이’로 어머니를 맡아야 했다. 이때도 돌봄은 비혼인 김씨의 몫이 됐다. 김씨는 환갑의 나이에 85세의 어머니를 돌보기 시작했다. “한 사람이 희생하면 집안이 편하다.” 김씨가 말했다. 그 ‘한 사람’은 비혼인 딸 김씨였다. 고령화와 비혼화가 동시에 진행되면서 비혼 자녀, 특히 딸이 노부모의 돌봄 책임을 떠맡는 경우가 늘고 있다. 고령화 속도가 빠른 일본에선 부모를 돌보는 비혼 자녀들인 ‘개호(介護) 독신’이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한국은 지난해 65세 이상 인구가 14%를 넘어서며 고령사회로 진입했다. 미혼인구 비율도 증가해 2015년 30대 미혼율은 36.3%에 달했다. 빠르게 진행되는 고령화와 비혼화의 교착점에 부모 돌봄의 책임을 떠안은 비혼 자녀가 있다. 이들은 일과 돌봄의 양립이 어려워 경력단절 등의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화려한 싱글’이라는 이미지에 가려 가시화되지 않았던 비혼의 숨겨진 얼굴을 들여다봤다.

ㆍ비혼 딸들의 이야기
“효도한다 생각하고 당연히 모시긴 했지만 내 삶은 어디로 사라졌나”

치매에 거동이 불편했던 노모를 6년간 돌본 김선숙씨가 서울 은평구 불광동의 한 정형외과에서 어머니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 김씨는 비혼으로 치매 노모와 조카딸을 돌봤다. 지난해 11월 어머니를 떠나보낸 후 오른쪽 어깨 인대가 파열된 김씨는 병원에 입원 중이다. 강윤중 기자 yaja@kyunghyang.com

“올케는 좋은 사람이에요. 하지만 어머니를 며느리에게 맡길 수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당연히 모셔야 한다고 생각했죠.” 김씨가 말하는 ‘당연히’는 어디서 왔을까.

기혼 자녀들은 배우자와 자식들을 돌보느라 바쁘다. 결혼하지 않고 부모와 정서적·물리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비혼 딸들은 부모 돌봄을 책임지는 1순위로 자연스럽게 여겨지게 된다.

“어머니가 그렇게 오래 사실지 몰랐어요. 처음 고관절이 부러졌을 땐 연하곤란(삼킴곤란)으로 식사도 제대로 못하셨어요. 그런데 기적같이 한 해, 한 해 사셨어요.” 김씨는 조카딸과 함께 어머니를 모실 집으로 이사했다. 거동이 불편한 치매 어머니를 노년에 접어들기 시작한 김씨가 홀로 돌보는 일은 쉽지 않았다. 매일 요양보호사가 네 시간씩 찾아오긴 했지만, 나머지 하루 20시간은 김씨의 몫이었다.

가장 힘들 때는 김씨의 몸이 성치 않을 때였다. 한 번은 고관절에 극심한 고통이 찾아왔다. 응급실을 찾아가 여러 검사를 받았지만 원인을 찾지 못하고 퇴원했다. “당시 고관절이 빠졌다가 사진을 찍고 검사받는 과정에서 저절로 맞춰진 것 같아요. 아파서 움직이기 힘든데 목발을 짚고 집으로 왔죠. 어머니 대소변도 받아야 하니… 죽을 노릇이었어요.” 거동이 불편한 상황에서 어머니의 용변을 처리하고 씻기다가 두 사람이 함께 욕실에 쓰러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나도 어머니도 옷 벗고 있었는데… 어떡해요. 남동생에게 급하게 연락을 했죠. 눈 딱 감고 도와달라고….”

비혼 딸의 ‘독박돌봄’

치매는 노인을 어린아이로 되돌려 놓는다. 어린아이가 주 양육자에게 의존하고 매달리듯이, 치매 노인도 주 돌봄자에게 의존한다. 어머니는 김씨와 함께여야만 식사를 했다. 이런 상황에서 다른 형제들은 큰 도움이 되질 못했다. “어머니가 ‘안 먹는 치매’였어요. 제가 드려야 겨우 먹는데, 식사하는 데 서너 시간이 걸리기도 했죠. 그러니 꼼짝할 수가 없었어요.”

김씨는 활동적인 사람이었다. 여동생의 죽음을 계기로 죽음에 관심을 갖고 노년과 죽음을 연구해 박사 학위를 받았다. ‘행복한노년문화연구소’를 세우고 강연 등의 활동을 했다. 하지만 어머니를 돌보기 시작하면서 김씨의 삶의 범위는 급격히 축소됐다. 강의도 가까운 곳으로만 다녔고, 중요한 행사가 있어도 갈 수가 없었다. “치매 노인은 누군가 전적으로 매달리지 않으면 힘들다. 개인적 삶이 사라지는 건 심각한 문제”라고 말했다.

어머니를 돌본 것에 대한 후회는 없다. “결혼을 안 했기 때문에 부모님께 불효랄까, 죄송스러운 마음이 있었어요. 육체적으로 힘든 건 말할 수도 없지만, 그래도 지나고 보니 어머니를 모신 건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잃은 것도 많다. 김씨는 6년 전 멈춘 ‘김선숙의 삶’을 되돌리는 중이다. 병실의 간이 책상에는 2012년 출간을 준비하던 책 <사진으로 쓰는 자서전>의 초고가 놓여 있었다. 김씨는 책 출간을 목전에 두고 포기한 게 가장 뼈아프다고 했다.

“60세부터 어머니를 모셨는데 벌써 66세네요. 어느새 할머니가 내 앞에 와 있어요.” 김씨는 자신이 “빈털터리가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형제들의 왕래도 소원해지자, 남은 것은 공허함과 아픈 몸이었다. “어머니 돌아가시니까 세상에 나 혼자라는 걸 몸으로 느끼겠더라고요. 비혼인 사람들에게 저는 웬만하면 결혼하라고 해요.” 홀가분해 보이기도, 쓸쓸해 보이기도 하는 김씨가 말했다.

일-돌봄의 위태로운 줄타기

치매 노모를 돌보느라 소진된 김씨가 아프고 외로운 건 ‘비혼’이기 때문일까. 노인 돌봄의 책임을 ‘가족 바깥’에 있는 비혼 자녀에게 손쉽게 떠맡겨 버리는 것이 문제는 아닐까.

치매 어머니와 6년째 함께 살고 있는 박현숙씨(56·가명)는 직장에 다니면서 요양보호사의 도움을 받아 어머니를 돌보고 있다. 직장에 다니면서도 머릿속은 늘 긴장상태다. 하루 세 시간씩 도와주는 요양보호사가 오후 2시에 돌아가면, 퇴근시간까지 어머니는 홀로 있어야 한다. 매일 저녁 집에 들어갈 때면 “엄마가 잘 있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린다.

어머니가 뇌출혈로 쓰러진 후, 수술 후유증으로 치매가 찾아왔다. 처음엔 장남인 오빠가 어머니를 집으로 데려갔다. 하지만 집을 떠나 며느리의 돌봄을 받는 걸 어머니가 좋아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쓰러지기 전까지 함께 살던 딸 박씨에게 많이 의지했다. 어머니를 돌보는 문제로 오빠와 갈등이 생겼을 때, 비혼이던 박씨가 어머니를 집으로 모시고 왔다. 남동생도 비혼이었지만 자연스럽게 어머니 돌봄은 딸인 박씨의 몫이 됐다.

“처음엔 걱정도 하고 많이 울었어요. 몸도 아프고 정신적으로도 지치고. 그러다 시간이 지나니까 나아지더라고요. 다행히 어머니가 ‘예쁜 치매’예요. 잘 드시고, 박수 치고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하시고. 밤에 안 자고 노래를 부르세요.”

약을 꾸준히 복용해 치매 진행이 더딘 어머니에게 박씨는 뜨개질, 멸치 다듬기 등 손을 쓰는 일을 많이 하게 한다. 요양보호사의 도움을 받아 가까운 복지관으로 나들이도 다닌다. 하지만 다른 길로 새버린 어머니를 잃어버려 근처 파출소에서 찾은 일도 두 번이나 있었다. 여름엔 더워서 기저귀를 하지 않고 외출했다가 대변을 보는 바람에 이웃들에게 민폐를 끼치기도 했다.

박씨는 계속 어머니를 홀로 돌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일을 놓고 어머니 돌봄을 전담한다면 못할 것 같다. 한 사람이 케어를 전담하면 삶이 망가진다고 생각한다”며 “어머니 병이 악화되면 시설에 보내는 것도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씨에게 비혼의 삶에 대해 물었다. “후회하지 않아요. 나는 엄마 한 명 돌보면 되지만, 결혼한 친구들은 남편에 아이에 부모까지 돌봐야 하잖아요. 노후에 대한 불안감이 있지만, 지금이 더 좋다고 생각해요.” 박씨가 말했다.

부모 돌봄은 비혼의 예견된 미래?

현재 부모가 건강한 비혼 여성들은 ‘다가올지도 모르는 미래’를 예감하고 있다. 비혼인 김수진씨(35·가명)는 부모 돌봄이 “100% 자신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구체적 계획을 세워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단계”라고 말했다. 김씨의 아버지는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때 실직했다. 그 후 비정규직이나 일용직 노동을 하며 생계를 이었다. 남동생이 하나 있지만 외국에서 살고 있다. 김씨는 “부모님 스스로 노후를 책임지기 어려운 상황에서 앞으로 경제적인 능력을 얼마나 갖출 수 있을지가 제일 걱정”이라고 말했다.

김씨는 “엄마 세대와 내 세대는 다를 거라고 생각했지만 주변에서 출산 후 경력단절, 독박육아를 하면서 심신이 망가진 친구들을 많이 봤다”며 “정부의 해결 방식이 여성이 모든 걸 감당하면서도 사회생활을 할 수 있게 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는 걸 보고 내 세대에서는 해결되지 않겠구나라는 생각에 비혼으로 살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김씨는 14세 때 다친 어머니를 돌본 경험이 있다. 김씨는 “아버지가 명예퇴직 후 어머니가 장사를 하다가 다쳐서 오래 누워 계셨다. 당시 나는 미성년자였지만 아버지는 돌봄을 하지 않았고, 내가 남동생과 어머니를 돌봐야 했다”고 말했다. “아무래도 딸이니까 엄마가 정서적으로 저에게 의존하는 것도 있고… 저도 엄마의 삶을 이해하고 공감하면서 돌봐야 한다는 의무감도 생겨요. 애증관계랄까요.”

김씨는 “노후 돌봄 문제를 비혼이든 기혼이든 여성 문제로 미뤄두지 말고 사회적 문제로 인식했으면 좋겠다”며 “돌봄을 필요로 하는 사람과 보호자를 사회적으로 어떻게 지원해야 하는지의 문제로 접근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ㆍ비혼 아들의 이야기
“어머니 중증 되면 내가 일과 돌봄 중 하나는 포기해야 될까봐 두렵다”

“어머니를 보면 어린애 같단 생각을 해요. 자식이 없다보니…. 쪼글쪼글한 자식을 키운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죠.”

박성식 공공운수노조 정책국장(48)은 치매 어머니와 둘이 산다. 3년여의 결혼생활이 끝난 후 ‘돌싱’이 됐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홀로 지내는 어머니와 함께 살게 됐다. 박 국장은 “혼자 지내실 때 어머니 표정이 어두웠다”며 “이혼한 건 죄송스럽지만 한편으로는 어머니를 모시고 사니까 좋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비혼화와 고령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부모를 돌보는 비혼 남성도 증가하고 있다. 박 국장도 그중 하나다.

지난해 여름, 어머니가 날짜를 헷갈려하고, 조금 전 벌어졌던 일을 다시 물어보는 일이 잦았다. 결정적으로 식사 도중 “늬 아버지 이름이 뭐더라”고 묻는 어머니를 보고 이상하다는 걸 확신했다. 아버지와 본인의 남편이 같은 사람이란 걸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치매 초기 진단을 받은 지난해 9월 박 국장은 일을 그만뒀다. 어머니 상태가 악화되던 시기라 옆에서 돌보기 위해서였다. “혼자 있고 정서적으로 불안하면 치매가 급속히 진행될 가능성이 높아서 옆에서 모시고 싶었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올해로 88세다. 늦둥이 외아들로 박 국장을 낳았다. 어머니 치매는 아직 초기지만, 치매 진행을 늦추기 위한 약을 먹게 하는 게 큰 일이었다. “치매 증상 가운데 하나가 불신이 심해지는 거예요. 이상한 약을 준다며 드시질 않으려 하더라고요. 다행히 붙이는 패치 약은 거부하지 않아 붙이고 있어요.”

자식이 없는 박 국장에게 누군가를 돌본 경험은 이번이 처음이다. “부모들은 다른 존재를 위해서 에너지를 쏟는 경험을 하는데, 그런 경험이 없으니 미성숙된 부분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어머니를 돌보면서 다른 존재를 보살피는 소중한 경험을 하는 것 같아요.” 그는 씻는 걸 잊는 어머니에게 “세수하라”는 잔소리도 한다. “내가 어머니에게 그런 말을 구사할 줄 누가 알았겠냐”며 웃음을 지었다.

3개월 동안 어머니 곁을 지킨 박 국장은 1월부터 새 직장에 출근하기 시작했다. 노동조합 일이라 ‘경력단절’로 인한 구직이 크게 어렵지는 않았다. 요양보호사는 주 2회 3시간씩 방문한다. 하루 두 번 안부 전화를 빼먹지 않고 한다. 아직은 일과 돌봄의 양립이 가능하지만, 요양보호사의 방문횟수와 시간이 늘어나길 희망한다.

어머니를 돌보는 동안은 비혼인 상태를 바꿀 생각이 없다. 그는 “파트너가 생기더라도 부담을 주고 싶지 않다. 내가 감당할 수 있을 때까지 감당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어머니의 상태가 악화된다면? 박 국장은 확신이 없다. 그는 “중증으로 가는 게 제일 두렵다. 모든 게 스톱될 거라고 생각한다. 일을 그만두고 돌봄에 집중하거나, 포기하고 요양원에 보내거나 둘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어머니 돌봄을 끝내고 나면 나도 50대가 될 텐데, 그때의 삶은 이전과 같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돌봄을 위해 일을 중단하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나이는 아니겠구나, 고령 노동자들이 하는 단순 직무를 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그는 어머니의 정신과 신체가 함께 서서히 소진돼 편히 세상을 떠나길 희망한다.

<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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