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 기업이 만든 바둑 AI '돌바람', 어떻게 일본 딥젠고 꺾고 우승했나

손해용 2018. 1. 25.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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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바람 개발자 임재범 대표 인터뷰
1998년 '바둑이'로 출발..정부·기업 후원 없이 혼자서 개발
돌바람이 한때 정상 근접, 그러나 알파고 등장 후 약체 전락
지난해 딥러닝 탑재후 예전 알파고 수준으로 기력 급상승

지난 18일 인터넷 바둑사이트 타이젬을 통해 열린 한국의 ‘돌바람’과 일본의 ‘딥젠고’ 간의 인공지능(AI) 특별대국 제4국. 딥젠고가 불리한 형세를 인정하고 돌을 던지자 돌바람을 개발한 임재범(48) 돌바람네트워크 대표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돌바람이 최종 전적 3승 1패로 우승을 확정 짓는 순간이었다.

돌바람과 딥젠고의 대결은 바둑계에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으로 여겨졌다. 딥젠고는 알파고의 은퇴 이후 중국의 바둑 인공지능 ‘줴이’(絶藝)와 세계 1위ㆍ2위를 다투는 강호. 반면 돌바람은 지난해 세계대회 최고 성적이 8강에 불과한 약체였다. 특히 딥젠고는 일본 소프트웨어업체 드왕고와 도쿄대ㆍ일본기원으로부터 대대적인 지원을 받고 있다. 반면 돌바람의 개발사는 임씨가 대표인 영세한 1인 중소업체에 불과했다.

임 대표는 24일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지난해 딥젠고와 두 차례 대국을 펼쳐 모두 패했는데, 설욕을 하고 나니 정말 기쁘더라”며 “아직 딥젠고를 앞섰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지만 적어도 동등한 실력이 됐다는 것은 확실하다”고 말했다.
일본 딥젠고에 승리한 바둑 인공지능 '돌바람'을 만든 임재범 대표. 김상선 기자
임 대표가 바둑 프로그램을 처음 개발한 때는 1998년. 군대에서 배운 바둑에 빠져 ‘바둑이’라는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그러나 당시 프로그래밍 수준으로는 기력을 더 높이는 게 어렵다고 판단해 개발을 포기했다.

그러다 2012년 일본의 바둑 프로그램 ‘젠’을 알게 됐다. 지금의 딥젠고가 업그레이드되기 전의 이름이다. 10여 년 전 중급자 수준에도 지던 바둑 프로그램이 이제 아마 4~5단의 수준까지 실력이 향상된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는 “젠이 다케미야 마사키 9단과의 4점 접바둑에서 이기는 것을 보고 예전의 호기심이 다시 발동했다”며 “각종 자료를 모으고 어떻게 프로그래밍했는지 살펴보니 이 정도면 나도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회고했다.

남들의 도움 없이 오롯이 혼자의 힘으로 제작했지만 돌바람의 기세는 무서웠다. 2013년 KGS 인공지능 바둑대회, 2015년 미림합배 세계컴퓨터바둑대회에서 우승하면서 실력을 입증했다. 일본의 조치훈 9단과 4점 접바둑을 둬 조9단의 대마를 잡으며 승리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당시 인공지능 바둑으로는 최정상의 위치에 올라 있던 셈이다.
일본 딥젠고에 승리한 바둑 인공지능 '돌바람'을 만든 임재범 대표. 김상선 기자
하지만 2016년 알파고가 등장하자 기도 못 피는 신세로 전락했다. 여러 데이터를 이용해 사람처럼 스스로 학습하는 ‘딥러닝’ 기능을 탑재하는 식으로 바둑 프로그램 개발의 패러다임이 바뀌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는 “승률이 높은 착수 지점을 탐색하는 데 있어 돌바람은 자체 개발한 알고리즘을 이용한 반면, 알파고는 딥러닝을 사용했다”며 “이 부분에서 넘어설 수 없는 기술 격차가 있었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프로기사에게 접바둑이 아닌 호선(互先)으로 승리하는 바둑 프로그램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알파고가 그것을 해내더라”며 “깊은 패배감과 좌절감에 한동안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라고 덧붙였다.

돌바람의 기력 향상을 위해서는 딥러닝을 적용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꼈지만 당시 생계를 위해 다른 소프트웨어 개발을 병행하다 보니 업그레이드는 늦어졌다. 이는 돌바람의 슬럼프로 이어졌다. 2017년 3월에 열린 ‘UEC배 컴퓨터 바둑대회’에서는 신예 인공지능인 일본의 ‘아야’, 대만의 ‘시지아이고’에 잇달아 패하며 9위라는 비참한 성적표를 받았다.

하지만 이후 딥러닝을 본격적으로 적용하면서 임 대표는 다시 돌바람의 실력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타이젬 같은 인터넷 바둑 사이트의 도움을 받아 재야 고수들과 대국을 치르며 실전 감각을 끌어올렸고, 각종 테스트를 통해 프로그램을 안정화하는 데 주력했다. 여기에 임 대표가 자체 개발한 알고리즘을 추가하면서 약점을 보완다. 지난해 11월 중국의 마샤오춘 9단에게 2승을 거두며 부활을 알리더니, 결국 딥젠고를 물리치는 파란을 일으킨 것이다.

돌바람의 현재 기력에 대해 임 대표는 “이세돌 9단과 대국했을 당시의 알파고 수준”이라며 “프로기사와 기력이 같거나 조금 더 높은 수준이라고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구글 딥마인드가 가장 최근 발표한 ‘알파고 제로’와의 승부 예상을 묻자 “현재로선 승산이 없다”라고 잘라 말했다.

바둑 인공지능의 실력 차는 알고리즘의 문제도 있지만 서버의 용량과 데이터 품질의 차이도 크다. 수백개의 고사양 서버를 사용해 프로 기사의 기보를 분석하고, 스스로 학습하는 알파고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리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돌바람 기력 향상에 이용되는 인프라는 그의 사무실에 있는 컴퓨터 한 대가 전부다.

임 대표는 “구글의 인프라가 받쳐주는 알파고는 3일 만에 프로기사 수준의 기력을 확보할 수 있지만, 내가 가진 인프라로 같은 방식을 썼다간 시간이 3년도 더 걸릴 것”이라며 “그래서 자체 개발한 알고리즘을 다양한 방식으로 적용하고 있는데, 예상외로 좋은 성과를 거두고 있다”라고 전했다.

사실 그는 수준급 실력의 프로그래머다. 국민대 전자공학과 재학시절 온라인 게임 사업을 시작했다. 90년대 중반 하이텔ㆍ나우누리 등 PC통신에서 인기를 끌었던 텍스트 머드(MUD)게임 ‘환상지대’를 개발한 이가 바로 임 대표다. 수많은 밤샘족을 양산한 이른바 ‘폐인 온라인 게임’의 원조격이다. 이후 그는 한메소프트ㆍ위고바둑 등에서 일하며 내공을 키웠다.

다른 ‘돈 되는’ 프로그램 개발에 매진할 수도 있었지만, 바둑에 대한 애정이 그를 바둑 인공지능 개발로 인도했다. 그의 기력은 아마추어 1단. 하지만 바둑 프로그램의 수준은 개발자의 기력과는 상관없다. 비록 알파고에 의해 꿈은 깨졌지만 그는 프로기사와 호선으로 대결해 이기는 바둑 프로그램을 만드는 최초의 개발자가 되고 싶었다.

그는 이세돌 9단과 알파고와의 대국 이후 국내에 인공지능 열풍이 불었지만 정부나 기업으로부터 후원을 받아본 적이 없다고 했다. 돌바람으로부터 나오는 수익은 타이젬ㆍ오로바둑 등 인터넷 바둑사이트에 서비스를 제공해 얻는 돈이 전부다. 열악한 여건이지만 그는 알파고를 능가하는 최고의 바둑 인공지능 개발이라는 새로운 목표 달성을 위해 전진을 계속할 계획이다.

임 대표는 “컴퓨터와 바둑에 대한 감각만 있으면 큰 비용을 들이지 않고 만들 수 있다는 게 바둑 인공지능 프로그램의 장점”이라며 “바둑에서 최고의 성과를 낸 이후 다른 분야로의 인공지능 활용을 연구해볼 생각”이라고 웃었다.

손해용 기자 sohn.y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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