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보아라 이게 스포츠다

안혜리 2018. 1. 24. 0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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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리 논설위원
‘보고 있나?’

세계 58위 정현(22)이 지난 22일 호주오픈 남자 단식 16강전에서 메이저 대회를 12회나 우승했던 노박 조코비치(31)를 꺾어 한국 테니스 역사상 처음으로 메이저 대회 8강에 오른 직후 중계 카메라 렌즈 위에 한글로 쓴 말이다. 그는 “함께 고생했던 옛 감독을 위한 이벤트”라고 밝혔다. 하지만 나는 어쩐지 스포츠가 무엇인지 전혀 모른 채 오로지 정치적 논리로만 평창올림픽 여자 아이스하키 국가대표팀에 일방적 희생을 강요한 문재인 정권과 그 지지자를 향한 경고의 메시지로 읽혔다.

정현은 2년 전 이 대회 1회전에서 조코비치에게 0-3 완패를 했다. 그간 정현의 기량이 늘고 조코비치는 팔꿈치 부상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고는 하나 랭킹만 보자면 이번 승리는 불가능에 가까운 기적이나 마찬가지다. 이낙연 국무총리의 표현을 빌리자면 “메달권에 있지 않은” 선수가 큰일을 낸 셈이다.

정현은 승리 후 “어릴 적 우상 조코비치를 따라 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며 겸손해했고, 조코비치는 패배 후 “정현의 승리에 누가 될 수 있으니 (나의) 부상 얘기는 그만하자”며 상대의 실력을 인정하고 축하했다. 랭킹에 주눅 들지 않고 결국 자신의 우상을 넘어선 과감한 도전, 그리고 진정한 챔피언만이 보여 줄 수 있는 위대한 스포츠맨십에 전 세계 스포츠 팬은 감동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도 위로받았다는 글이 쏟아졌다. 특히 한국에선 ‘단일팀 스트레스를 한 방에 날렸다’며 정부의 평창올림픽 단일팀 강행에 빗댄 글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비인기 종목 테니스에서 나온 경사를 보고 있자니 똑같은 비인기 종목의 설움을 겪다 못해 올림픽을 코앞에 두고 불공정한 룰의 희생양이 된 여자 아이스하키 선수들의 모습이 겹쳐졌기 때문일 것이다.

정부는 ‘평화’를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정치적으로 유리한 ‘좋은 그림’을 만들기 위해 비인기 종목, 그것도 상대적으로 약자인 여자 선수의 희생을 당연시한 걸 국민은 안다. 그래서 문재인 대통령이 아무리 “감동의 명장면” 운운해도 감동하기는커녕 우리 선수가 추가 엔트리라는 원치 않는 ‘혜택’을 받아 경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벌써 ‘지면 화나고 이겨도 개운치 않은’ 상황에 놓인 게 마음이 불편한 것이다.

메달권도 아니라느니, 단일팀 이벤트 덕분에 비인기 종목의 설움을 씻어 낼 것이라느니, 개최국이 아니었으면 출전도 못했을 것이라고 함부로 말하는 정부와 여당 인사들에게 정현의 ‘호주대첩’은 말한다. 보아라, 이게 스포츠다.

안혜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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