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창촌 한가운데 핀 예술, 변화가 시작됐다

2018. 1. 23.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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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중구 수창동에 옛 성매매업소를 개조해 만든 비영리 전시 공간 ‘닷 자갈마당 아트스페이스’가 들어섰다. 위 사진은 김영진 작가의 설치 작품 ‘무제’. 바람이 꽉 차면 버섯(왼쪽), 바람이 빠지면 사용하고 버린 콘돔(오른쪽)이 연상된다. 아래는 이명미 작가의 회화 ‘걸’(왼쪽)과 과거 성매매 행위가 이뤄지던 방을 그대로 보존한 3층의 모습.

대구 중구청 ‘자갈마당’ 속 문화공간 조성해 과감한 미술실험

성매매업소 밀집 지역 한 가운데
매춘 건물 개조한 전시공간
중견 작가들의 작품전이 한창
인근 옛 전매청 진작 변신 시너지
공연장·전시장… “예술발전소”
문화예술 통한 신선한 시도 주목

대구 중구 수창동 일대에 흥미로운 미술실험이 벌어지고 있다. 도심 속 쇠락해가는 집창촌 한가운데 전시공간이 섬처럼 들어섰다. 그 얄궂은 동거의 이유가 궁금해 최근 현장을 다녀왔다.

전시장을 찾아 지하철 3호선 달성공원역에서 내려 ‘대구예술발전소’라 적힌 이정표를 따라 갔다. 몇 분도 안 돼 소방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좌우에 이질적인 세계가 펼쳐진다. 오른편엔 옛 전매청 대구공장을 재생시킨 문화복합공간이 있다. 담배를 생산하던 연초 제조창 별관은 레지던시와 전시·공연장을 갖춘 ‘대구예술발전소’로 2013년 거듭났다. 직원 사옥아파트도 전시장으로 쓰인다.

소방도로 왼편은 딴판이다. 성매매업소 40∼50곳이 밀집해있다. 2004년 성매매특별법이 발효된 지 십 수 년이 지났지만 악착같이 남아 있는 집들이다. 일제강점기 공창으로 출발한 이곳은 속칭 ‘자갈마당’으로 불리며 한때 수 백 개 업소가 성업했다.

저녁이 돼야 야릇한 분홍색 불이 켜지며 영업을 시작하는 곳이어서일까. 낮은 썰렁했다. 을씨년스러운 골목을 돌다보니 아연 깔끔한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외벽엔 리본 모양 장식이 붙었다. 지난해 9월 문을 연 ‘닷 자갈마당 아트스페이스’다.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다. 이곳은 중구청이 과거 실제 성매매업을 했던 3층짜리 건물을 임대해 개조한 비영리 전시공간이다. 개관전시인 ‘기억정원 .자갈마당’(3월 18일까지)이 한창인데, 전시 제목이 그 불편한 기억을 잊지 않겠다는 다짐 같다.

김구림 김승영 김영진 배종헌 이기칠 이명미 임창민 정혜련 등 중량감 있는 작가들이 참여했다. 작품마다 건물에 스민, 외면하고 싶은 기억을 소환한다. 이를테면 1층 ‘유리방’에 설치한 김영진 작가의 설치 작품은 바람이 꽉 찼을 때는 버섯을 거꾸로 매단 모양이고, 바람이 빠졌을 때는 사용한 콘돔을 연상시킨다. 김 작가는 2층에 ‘자갈마당에 자갈이 없다’는 역설적 작품을 벽화처럼 꾸미기도 했다. 2층은 복도를 사이에 두고 한쪽 공간은 완전히 텄다. 다른 쪽은 성매매 행위가 이뤄지던 작은 방들을 거의 그대로 살려 전시공간으로 쓴다. 이명미 작가는 이곳에 분홍과 초록을 써서 한껏 불안한 모습의 여인 초상을 표현주의적 기법으로 그려 걸었다. 여기서 일했던 여성들의 불안하고 슬픈 내면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들이다. 최고의 작품은 어쩌면 3층 그 자체다. 아래 2개 층은 전시장으로 변형을 가했지만, 3층은 과거의 방을 손 하나 대지 않고 날것 그대로 보여준다. 작은 침대와 협탁, 1단 옷장이 전부인 방에 걸린 레이스 커튼…. 오래 들여다보는 것도 미안해지는 공간이다.

전시를 기획한 정종구 큐레이터는 “이곳은 100년 이상 존재해왔다. 자갈마당을 어떻게 기억하고 또 어떻게 변화시켜야 할지를 작품으로 고민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닷 자갈마당 아트스페이스’는 대구 중구청이 감행한 모험이다. 지난해 이 공간이 생길 즈음, 인근에 1200가구의 주상복합아파트 입주가 시작됐다. 자갈마당과 200여m 거리다. 근처에 초등학교까지 있다. 입주민들은 ‘자갈마당’의 폐쇄를 요구했다. 중구청으로서는 끈질기게 남아 있는 ‘집창촌 자갈마당’이 딜레마였다.

윤영순 중구청장은 빈 건물이 하나 나오자 이를 임대해 전시공간으로 과감하게 밀어붙였다. 문화를 통해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던 것이다. 윤 청장은 22일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이곳은 낮에는 사람이 없는 유령 골목이다. 낮에 사람을 다니게 해보자. 그러면 뭔가 달라질 것이고 업종 변경을 할 수 있는 단초가 마련될 것이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전시 보러 낮에 사람들이 다니는 골목이 되면서 주변 성매매업소 주인들 사이에 ‘낮 장사’로 업종 변경을 고민하는 모습이 눈에 띈다고 한다. 중구청 관계자는 “우리 업소도 미술관으로 바꿀 수 없냐는 문의가 오기도 한다”고 전했다. 문화의 힘은 어디까지일까. 그 끝이 궁금하다.

대구=글·사진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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