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탈출구 없는 쪽방여관.. 비상문은 또 잠겨있었다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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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김보근 기자 |
마침 경찰은 1층 105호를 조사 중이었다. 가로세로 각각 3m 남짓한 작은 방이다. A 씨(35·여)와 두 딸 등 세 모녀가 숨진 채 발견된 곳이다. 서울로 여행 온 세 모녀는 숙박비를 아끼기 위해 이 여관에 투숙했다가 변을 당했다. 이날 세 모녀가 낸 숙박비는 2만5000원이다.
세 모녀가 투숙한 105호 창문에는 쇠창살 4개가 있었다. 도둑 침입을 막는 용도이지만 불이 났을 때 창문으로 탈출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맞은편 101호는 창문을 열면 바로 벽이었다. 옆 건물과 불과 10cm 간격으로 붙어있었다. 여관 뒤편으로 10m쯤 가면 비상구로 쓰이는 문이 있었지만 무용지물이었다. 문 밖에 자물쇠가 채워져 있어 열쇠 없이는 안에서도 밖에서도 열 수 없었다. 화재 당시에는 여관 전체가 퇴로 없는 ‘지옥’이었던 셈이다. 소방 관계자는 “우리가 강제로 열었던 문은 도저히 탈출 용도로 쓸 수 없는 문이었다”고 설명했다.
당시 여관 1, 2층에 각각 4개씩, 방 8곳 중 7곳에 투숙객 10명이 머물고 있었다. 이 중 A 씨 모녀 등 6명이 숨졌다. 3명은 중태에 빠졌다. 2층에 있던 최모 씨(53)만 가벼운 부상을 입어 화를 면했다. 대부분 일용직이나 퀵서비스 배달, 의류업체 비정규직 직원 등으로 어렵게 생활하던 서민이었다. 지어진 지 50년이 넘은 건물인 데다 3층 지붕은 불이 잘 붙는 샌드위치패널로 돼있어 건물은 순식간에 불가마가 됐다.
불을 지른 건 중국음식점 배달원 유모 씨(53)였다. 유 씨는 19일 오후 9시부터 20일 오전 1시까지 동료들과 술을 마셨다. 동료 배달원 B 씨는 “유 씨가 소주 1병 정도 마신 것 같다”고 말했다. 경찰에 따르면 술에 취한 유 씨는 20일 오전 2시경 서울장여관을 찾았다. 그는 여관 주인 김모 씨(71·여)에게 “여자를 불러 달라”고 말했다. 성매매를 요구한 것이다. 김 씨가 거부하자 유 씨는 오전 2시 6분 “여관이 투숙을 거부한다”며 112에 신고했다. 김 씨 역시 “취객이 성매매를 요구하며 난동을 부린다”고 신고했다. 유 씨가 계속 생떼를 쓰자 김 씨는 오전 2시 8분경 2차 신고를 했다.
경찰은 오전 2시 9분 여관에 도착했다. 경찰이 “성매매로 처벌되면 벌금 300만 원을 내야 한다”고 경고하자 유 씨는 욕설을 퍼부었다. 경찰은 오전 2시 26분 현장에서 유 씨를 훈방 조치했다. 김 씨가 “이대로 돌려보내면 어떻게 하느냐”며 항의하자 경찰은 “유 씨가 (집에 가기 위해) 15m쯤 걸어가는 모습을 봤다”고 설명한 뒤 돌아갔다.
하지만 유 씨는 귀가하지 않았다. 대신 택시를 잡아타고 여관에서 1.9km 떨어진 ‘24시간 주유소’를 찾아갔다. 이곳에서 유 씨는 휘발유 10L를 구입했다. 누가 봐도 취한 상태로 보였지만 휘발유 구입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유 씨는 다시 여관으로 갔다. 1층 복도에 휘발유를 뿌렸다. 그리고 가져온 비닐에 불을 붙여 던졌다. 김 씨는 “물을 뿌리는 줄 알았는데 ‘펑’ 소리와 함께 불길이 치솟았다”고 말했다. 유 씨의 동료는 “유 씨가 평소 욱하면 잘 가라앉히지 못하는 성격”이라고 말했다.
김 씨는 곧바로 119에 신고했다. 같은 시각 유 씨도 112에 “내가 불을 질렀다”고 자수했다. 경찰은 오전 3시 12분 여관 주변을 서성이던 유 씨를 체포했다.
소방관들은 화재 신고 4분 만인 오전 3시 11분 현장에 도착했다. 불길은 이미 여관 전체를 집어삼키는 중이었다. 오전 3시 25분 큰 불이 잡히자 소방관들은 정문으로 진입했다. 1, 2층에 있는 방 8개를 일일이 확인한 뒤 쓰러진 투숙객을 한 명씩 옮겼다. 불은 1시간 만인 오전 4시 4분경 완전히 진압됐다. 경찰은 21일 유 씨를 현존건조물 방화치사 혐의로 구속했다.
배준우 jjoonn@donga.com·권기범·김자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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