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Why] 시골만큼 심각한 '도심 소멸'.. 20년 뒤에 부산 영도는 없다?

부산/권승준 기자 2018. 1. 20.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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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번성했던 지방 도심 슬럼화 가속.. 되살릴 방법은 없나
250가구 아파트에 13가구
잡초·쓰레기로 가득 겉 보기엔 유령 아파트
가출 청소년·노숙자들 밤 되면 빈집에서 술판
노른자위 땅들의 몰락
가임기 여성이 노인보다 반 이하면 소멸 위기 단계
광주광역시 남·동구와 대구 서·남구도 위험 수위
떠난 이들도 문제 키워
재개발 기대감에 안 팔아 되레 재개발에 걸림돌
도심이라 입지 조건 좋아 부산 '원도심 재생' 사업
관광 명소로 재활용 나서
일러스트 이철원 기자

"여기 사람 별로 안 살아요. 유령아파트라니까요."

지난 13일 부산 영도구 A아파트. 10대 청소년 4명이 이런 말을 하며 아파트 계단에 들어섰다. 이들은 건물 2층과 3층 사이에 자리 잡은 뒤 담배를 꺼내 물고 큰 소리로 잡담을 나눴다. 아파트 복도에다 노상 방뇨도 했다. 한 70대 주민이 아파트 공동화장실에 물을 길으러 나왔다. 청소년들을 보고도 별말 없이 돌아섰다. 이들이 2시간 넘게 시끄럽게 떠들어도 제지하는 이가 없었다. 이곳에 사는 한 주민은 "어차피 사는 사람도 없는 곳인데 맘대로 놀게 놔두라"고 말했다. 그 말대로다. 총 4개 동에 250가구가 살 수 있는 이 아파트 단지엔 지금 13가구만 살고 있다. 대부분 고령인 주민들이라 공동화장실을 갈 때 외엔 밖으로 나오는 일이 드물다. 그 때문에 아파트는 사람이 전혀 살지 않는 건물 같았다. 단지 앞마당엔 잡초와 쓰레기가 가득했다. 아파트 내부도 오랫동안 청소를 하지 않아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먼지가 날리는 게 눈에 보였다. 밤이면 가출 청소년이나 노숙자들이 빈집에 숨어들어 술을 마시거나 잠을 잔다.

같은 날 밤 동구 초량동의 한 골목에서도 비슷한 풍경이 펼쳐졌다. 문이 열려 있는 빈집에 노숙자 2명이 들어앉아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100m 넘게 이어진 골목 양쪽에 있는 11채의 집 중에 사람이 사는 곳은 두 채뿐. 인근에 사는 주민 김영훈(55)씨는 "밤이면 밤마다 이 골목 빈집에 노숙자들이 와서 잠도 자고 떠들어 대는 통에 화가 나지만 뾰족한 수가 없다"고 말했다.

두 동네는 한때 번성했던 부산의 구(舊) 도심이 처한 현실을 압축해 보여준다. 인구가 줄고 빈집이 늘면서 슬럼이 된다. 거기에 질린 주민들도 차츰 동네를 떠나게 된다. 부산 영도구와 동구는 이 과정이 전국 대도시 중에 가장 빠른 곳이다. 시에선 "이대로 놔두면 2040년쯤엔 지역 자체가 소멸할 것"이란 분석까지 나온다. 시골 지역의 붕괴 위기를 가리키는 '지방 소멸' 문제가 이젠 '도심 소멸'로 번지는 중이다.

시골처럼 소멸 위기 처한 구도심

"다들 '지방 소멸'이라고 하면 시골부터 떠올립니다. 하지만 대도시의 구도심이나 지방도시 소멸 문제도 못지않게 심각한데 관심을 덜 받고 있어요."

한국고용정보원 이상호 부연구위원은 "지방 소멸은 결국 도심 소멸로 이어진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의 지방 소멸 문제에 관한 보고서를 국내 처음으로 썼다. 일본 정치인 마스다 히로야가 쓴 책 '지방 소멸'의 방법론을 차용해 한국의 지방 소멸 문제를 분석했다. 여기서 핵심은 '소멸위험지수'라는 지표. 출산율을 좌우하는 20∼39세 여성 인구와 65세 이상 고령인구 간의 비율을 비교한 것이다. 이 위원은 두 연령군의 비율이 1대1이 되어야 소멸 위험이 없다고 진단한다. 사람이 죽는 만큼 새로 태어날 여력이 있단 뜻이다. 20∼39세 여성인구가 고령 인구의 절반 이하면 '소멸 위기' 단계다. 특별한 반전이 없는 한 20~30년 내 자연 소멸할 위험이 아주 크단 뜻이다. 이 위원의 분석에 따르면 영도구와 동구는 2016년 광역시 소속 기초자치단체 최초로 소멸 위기 단계에 진입했다. 인구 통계가 위기를 증명한다. 2008년 영도구 15만2118명, 동구 10만2764명이던 인구는 작년 각각 12만3521명, 8만8868명으로 줄었다. 10년 만에 인구가 20% 넘게 감소했다. 도심 소멸은 부산만의 문제가 아니다. 광주광역시 남구·동구와 대구 서구·남구 등도 소멸 위기 단계 진입 문턱에 있다. 모두 한때 번성했던 구도심이다.

다만 서울은 아직 소멸 위기에서 안전지대다. 소멸위험지수로 볼 때 서울서 가장 낮은 지역인 종로·성북구 등도 영도나 동구에 비하면 2배 가까이 높다. 이 위원은 "서울 같은 메가시티는 지표로 볼 땐 안전할지 몰라도 안심해선 안 된다"며 "서울은 집값과 물가 등 생활비 압력이 다른 대도시보다 훨씬 커서 저출산 문제로 이어질 위험이 높은 곳"이라고 말했다.

떠난 사람이 재개발까지 어렵게 만들어

"영도 신선동이나 영도 청학동에는 빈집이 200~300채씩 있어요. 그 빈집이 사람을 몰아내는 겁니다."

영도구청에서 20여 년간 재직한 남순백(60)씨는 "밤이면 빈집을 점령한 노숙자들이 술 먹고 깽판 치고 불까지 지르는 동네에서 누가 살고 싶겠느냐"며 "특히 아이 가진 부모들이 제일 먼저 빠져나간다"고 말했다. 단순히 빈집이 늘어나기 때문이 아니다. 사람이 줄면서 학교가 사라지고, 병원이 사라진다. 초등생 아이 둘을 둔 동구 주민 김주영(40)씨는 "통학에만 30분 넘게 걸리는 게 부담이라서 학교 많은 동래구로 이사 가려고 한다"며 "또래 친구들이 하나둘 떠나니까 아이들도 전학 가자고 조르더라"고 말했다. 실제로 영도구와 동구의 만 3~17세 학령인구 감소는 전체 인구 감소보다 훨씬 속도가 빠르다. 2008년 영도구의 학령인구는 2만1606명, 동구 1만3489명이었는데 2017년 각각 1만1847명, 7468명으로 거의 반 토막이 났다. 빈집이 늘어나고 슬럼화가 진행되면서 원래 살던 사람도 견디지 못하고 떠나는 악순환이 가속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도심이 시골보다 붕괴 속도가 더 빠르다.

문제를 악화시키는 건 떠난 사람들. 이사 가면서도 집은 그대로 소유하는 사람이 많다. 기자가 초량동의 빈집 중 무작위로 10채를 골라 등기부등본을 열람해보니 모두 주인이 있었다. 재산 가치는 거의 없지만, 혹시 모를 미래의 재개발 기대 심리로 집 소유권은 유지하는 것이다. 동구청 관계자는 "그냥 빈집만 있으면 도로를 내고 재개발하는 데 한결 수월할 텐데, 집주인들이 소유권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서 사업 비용도 높아지고 추진 과정도 복잡해지는 게 문제"라고 말했다. 떠나는 사람이 재개발까지 어렵게 만들어 '도심 소멸'을 가속한다.

바보야, 문제는 일자리야

"어릴 적 살던 동네라 애착이 많아요. 근데 살 수가 없어요. 동네서 할 일거리가 없어요."

A아파트에서 나고 자랐다는 최영주(33)씨는 "어릴 적 동네 친구 중 여전히 거기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했다. 취직이나 결혼을 하면서 모두 동네를 떠나 정착했다. 이 위원은 "소멸 위기에 처한 지역의 핵심 문제는 고령화나 저출산이 아니라 일자리가 없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과거 영도구와 동구는 어업과 조선업의 중심지였다. 세월이 지나면서 어장이 쇠퇴하고 조선업마저 중심이 거제로 옮겨가면서 서서히 지역도 쇠퇴 일로를 걸었다. 최씨는 "아버지는 어부이거나 조선소 직원이고, 어머니는 조선소나 조선소 인근 가게에서 일하는 아이들이 많았는데 이제는 그런 집을 찾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영도구청 관계자는 "중앙 정부에서 지방 소멸 문제를 바라볼 때 저출산에만 초점을 맞춰서 아이 낳는 부부 위주의 지원책을 많이 마련하는데 초점이 빗나간 것"이라며 "사람이 아이를 낳고 살 수 있는 환경을 다시 재건하는 게 문제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소멸 위기 지역과 달리 최근 5년간 20~39세 여성 인구 비중이 증가한 세종시나 전남 무안군의 경우 공공기관 이전 등으로 인해 새로운 일자리가 창출된 지역이었다.

부산시에서도 이런 위기를 의식하고 동구와 영도구는 물론 인근의 중구 등을 아우르는 '부산 원(原)도심 재생 사업'을 추진 중이다. 도심이라 교통 접근성이 좋고 바다를 낀 자연조건에 낡은 항만 시설 등을 관광자원으로 재활용한다는 것이 사업의 골자다. 무허가 판자촌이었던 영도 흰여울마을이 이런 재생 사업의 한 사례다. 바다를 끼고 있는 명당에 자리 잡은 마을이지만, 주민이 빠져나가면서 슬럼화가 되자 2012년 아예 마을 전체를 관광지로 재개발했다. 부산 앞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풍광에 1960~70년대 정취를 간직한 빈집들 덕분에 영화 촬영지로도 각광받고 있어 주말이면 관광객이 수천명씩 몰리는 명소가 됐다. 기자와 함께 흰여울마을을 둘러보러 온 최씨는 "동네 떠난 지 10년인데 다시 와서 보니 이렇게 멋진 곳이었는지 새삼 깨닫게 됐다"며 "언젠가 여기로 돌아와서 카페라도 하나 차리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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