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막식 영어사회 맡아…평창 끝나면 내인생 한챕터 마무리
외교관 부친 따라 해외생활…어머니에게서 극진한 손님환대 배워
외교관 부친 따라 해외생활…어머니에게서 극진한 손님환대 배워

![나승연 오라티오 공동대표가 한남동 자신의 사무실에서 7년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 IOC 총회에서 열렸던 마지막 프레젠테이션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녀가 입은 재킷 안 하얀 블라우스가 바로 더반 프레젠테이션 때 입었던 것이다. [한주형 기자]](https://pimg.mk.co.kr/meet/neds/2018/01/image_readmed_2018_43912_15163490213178082.jpg)
김연아 선수와 문대성 IOC 선수위원, 조양호 평창동계올림픽유치위원장 등 한국을 대표해 각계 인사가 연사로 뛰었다. 그런데 정작 프레젠테이션을 주도한 이는 낯선 여성이었다.
차분한 호흡으로 쏟아내는 흠잡을 데 없는 영어 연설. 여기에 진정성을 더하는 눈빛과 표정, 제스처는 TV로 프레젠테이션 생중계를 지켜보던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프레젠테이션이 끝나고 IOC 위원들의 표결이 이어졌고 자크 로게 IOC 위원장은 최종 결과를 적은 종이를 돌리며 외쳤다. "Pyeong Chang."
이쯤 되면 독자들 뇌리에 '더반의 여신'이라 불린 여성이 떠오를 것이다. 그렇다. 평창 유치의 주역으로 유명세를 탄 나승연 전 평창동계올림픽유치위 대변인(45)이다.
매일경제가 7년 만에 더반의 여신을 다시 만났다. 유치전 때 치열했던 경쟁과 승리의 환희는 그녀의 가슴에 온전히 담겨 있었다. 두 번의 유치 실패(2003년 프라하 총회·2007년 과테말라 총회)를 딛고 세 번째 도전에 성공하기까지 그녀는 한국팀의 숨은 에피소드도 전했다. 또 우리가 잊고 있었던 올림픽의 '희망' '꿈' '약속'과 같은 단어를 각별히 언급했다.
평창동계올림픽을 통해 자신의 길에서 새로운 꿈과 희망을 발견하는 '미래세대'야말로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라고 그녀는 말한다. 올림픽 폐막 후 기반시설을 정부와 지자체가 책임져야 할 '골칫거리'로 치부하는 잘못된 시선도 바뀌어야 한다고 아쉬워한다. 7년 전 세계 시민을 상대로 한국인의 뜻과 염원을 대신 전달했던 그녀는 이제 국민에게 호소한다. 평창을 세계 최고의 축제로 만들겠다는 약속이 실천되려면 정부와 강원도가 아닌, 우리 스스로가 평창의 '주인'이 돼야 한다고.
―지금도 7년 전 기억이 생생하다. 나승연 오라티오 대표와 김연아 선수, 문대성 선수위원, 박용성 대한체육회장 등이 멋진 프레젠테이션을 했다. 특히 나 대표는 뛰어난 영어 실력과 자신감 넘치는 표정이 인상적이었다. ▷어려서부터 외국에서 생활하면서 영어를 일찍 습득했다. 하지만 국민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요소들은 오로지 피나는 연습의 결과물이었다. 두 번의 실패 후 모두가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철저히 연습에 매달렸다. 그 노력의 크기를 알기에 당시 프레젠테이션 무대에서 서로의 발표 모습을 지켜보며 찌릿한 전율을 느꼈다. '아, 정말 저분이 가진 모든 역량을 지금 쏟아내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모든 걸 쏟아부었기에 IOC 위원들에게나 우리 국민에게 좋은 기억을 남긴 것 같다. IOC 95표 중 한국이 63표를 얻어 뮌헨(25표)과 안시(7표)를 압도적으로 이긴 것만 봐도 확실히 우리의 진정성이 통했다.
―많은 분이 김연아 선수의 프레젠테이션을 기억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끈기와 인내(Persistence & Patience)'라는 스포츠 정신을 '한국의 정신'으로 연결시키는 나 대표의 연설 내용이 인상적이었다. ▷협업의 성과물이다. 한국이 2003년 결선투표에서는 3표 차로 밴쿠버에, 2007년에는 러시아 소치에 4표 차로 패배했다. '실패에서 배운다'는 말처럼 과거 프레젠테이션 내용을 꼼꼼히 분석했다. "한국이 88올림픽을 최고로 만들었듯이 평창동계올림픽도 최고로 만들 것"이라는 식의 표현이 많았다. 그런데 '최고'라는 건 한국의 희망사항일 뿐, IOC 위원들에게는 설득력이 없는 메시지였다. 우리는 철저히 IOC 위원들이 추구하는 가치를 파악하고 한국의 정신을 이들 가치에 연결시키고자 했다. 끈기와 인내로 성장한 한국이야말로 스포츠 정신과 가장 닮은 나라여서 이 같은 메시지를 강조했다.
―프레젠테이션에 이어 질의응답 사회까지 사실상 '마에스트로' 역할을 한 셈이다. 그런데 영문 공식 직함을 보니 대변인이 아닌, '커뮤니케이션 총괄(Communication Director)'이더라. 언론에 공개되지 않은 다양한 역할이 있었던 것 같다. ▷국내 대변인과 외신 대변인 역할은 기본이었다. 여기에 유치위 인사들이 해외 언론 인터뷰를 할 때 함께 참여해 인터뷰를 진행했다. 개인적으로 가장 중요한 역할이라고 생각하는 건 IOC 위원들을 상대로 대한민국을 알리는 IR 활동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유치위 인사 모두가 100여 명의 IOC 위원 중 자신이 맡은 위원들을 상대로 열심히 뛰었다. 평창 유치가 성공하는 과정에서 이런 보이지 않는 노력이 많았다.

―김봉석 선수의 프레젠테이션은 많은 울림을 줬다. 지금 다시 영상을 봐도 뭉클한 감동이 있다. ▷(김봉석 선수는 1978년 부산에서 태어나 3년 뒤 미국으로 입양됐다. 스키강사인 양아버지에게 스키를 배워 19세에 미국 스키 대표팀에 발탁됐다. 2006년 토리노동계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딴 그의 인생 스토리는 영화 '국가대표'로 만들어졌다. 영화 속 하정우의 실존 인물이 김 선수다. 그는 결선 프레젠테이션에서 자신의 성장 스토리를 소개하며 동계스포츠 인프라가 열악한 지역에 올림픽 기회가 제공돼야 자신과 같은 성공 사례가 확산된다고 호소했다.) 나 역시 감동적인 그 연설을 잊을 수 없다. 그는 결선 프레젠테이션에서 한국팀이 준비한 '히든카드'였다. 실제 현장에서도 IOC 위원들에게 가장 큰 울림을 줬다. 한국계 입양아에서 동계스포츠 선수가 된 그의 인생 자체가 우리가 IOC 위원들에게 호소했던 '새 지평'이자 '희망'이었다. 생각해보면 평창이 번번이 유치전에서 고배를 마신 이유는 '왜 평창이어야 하는가'에 대해 IOC 위원들에게 강력한 답안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난제에 대한 답을 김봉석 선수가 자신의 인생 스토리로 완성해줬다(김봉석 선수는 현재 평창동계올림픽 프리스타일 스키 부문 한국대표팀 감독으로 뛰고 있다).
―평창 폐막식 영어사회도 맡았는데. ▷조직위원회에서 연락이 왔다. 영어 사회라고 알려졌는데 사실 장내 아나운싱이다. 2월 25일 폐막식에서 영어 아나운싱을 맡았다. 대단한 역할은 아니지만 내게는 너무 각별하다. 세계인들에게 평창의 정보를 전달하는 자리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유치 과정부터 참여했던 내가 평창동계올림픽의 끝을 현장에서 직접 볼 수 있게 됐다. 영광스러운 일이다.
―아버지께서는 직업 외교관이었는데 딸은 아버지 못지않은 민간 외교관으로 활약했다. 아버지로부터 전수받은 특별한 외교 기술이 있나. ▷어려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아버지께서 평소 강조하는 행동이나 말, 메시지 전달 방식 하나하나가 좋은 교본이 됐다. 문화에 대한 오픈 마인드와 언어의 중요성도 아버지를 통해 배웠다. 어머니의 영향은 더 큰 것 같다. 집에 외부 인사들을 초청해 파티를 하면서 어떻게 상대를 환대하고 좋은 인상을 남기는지를 알 수 있었다. 어머니께서는 상대를 환대하고 한국 문화를 알리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한국 요리를 정성껏 준비하시고 마음으로 상대를 대하셨다.
―직업 외교관인 아버지 때문에 해외에서도 이사가 잦았을 텐데. 새 환경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물론 잦은 이사가 쉬운 환경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경험조차 너무 큰 도움이 됐다. 영어라는 하나의 언어를 가지고도 세계 각국에서 쓰는 다양한 영어를 접했다. 문화적 다양성도 눈치껏 배웠다. 상대와 소통은 언어와 더불어 표정, 눈빛, 문화적 이해 등이 함께 이뤄져야 효과적이다. 이런 모든 것들을 어릴 적부터 자연스럽게 습득할 수 있었다.
―한국에 돌아와 고교 졸업 후 여대(이화여대 불어불문과)를 갔다. 해외 대학이 아닌 국내를 선택한 이유가 궁금하다. ▷부모님의 당부가 컸다. "한국에 뿌리가 없다"며 국내 대학 진학의 필요성을 얘기하셨다. 사실 나는 외국 대학에 진학하기를 원했다. 여대를 선택한 것 역시 한국 문화에 수월하게 적응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여대를 다니며 한국 여성들이 얼마나 강한지를 배웠다. 평창동계올림픽 프레젠테이션에서 말한 것처럼 정말 '끈기와 인내'로 다져진 게 한국 여성이더라.
―졸업 후 아리랑TV 공채1기로 방송인 커리어를 쌓았다. 방송인에 대한 꿈이 있었나. ▷영어 방송이다 보니 나와 맞을 것 같았다. 뉴스팀에서 일하면서 한국과 외국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을 느끼는 것도 좋은 경험이었다. 나와 '닮은꼴'인 사람들이 많다는 점도 흥미로웠다. 외국에서 생활한 경험이 많은 친구들이 모여 우리끼리는 편한데, 밖에서는 우리를 '별종'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승연 오라티오 대표가 애장품인 평창동계올림픽 마스코트 '수호랑'(오른쪽)과 동계패럴림픽 마스코트 '반다비'(왼쪽)를 소개하고 있다. [한주형 기자]](https://pimg.mk.co.kr/meet/neds/2018/01/image__2018_43912_15163490213178109.jpg)
―나 대표와 한국에 각별한 도움을 준 IOC 위원이 있었나. ▷개인적으로는 스웨덴의 구닐라 린드베리 IOC 조정위원장이 늘 격려해줘서 고마웠다. 같은 여성이라서 그런지 유치 활동을 할 때부터 힘을 많이 실어줬다. 나를 볼 때마다 "지금보다 더 열심히 뛰어야 해(You need to work harder)"라고 채찍질을 했다. 이분이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이유는 바로 강원도민들 때문이다. 2011년 2월 평창을 방문해 현장 실사를 하면서 동계올림픽 유치를 바라는 강원도민들의 열정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고 하더라. 그러니 이들의 염원이 실현될 수 있도록 한국팀이 더 열심히 뛰어야 한다고 격려한 것 같다.
―한국팀을 지휘한 총감독 테런스 번스 얘기를 빼놓을 수 없다. 공교롭게도 그는 2003년·2007년 유치전에서 우리팀에 패배를 안긴 경쟁국의 총감독이었다. 어떻게 이분을 영입하게 됐나. ▷그렇다. 2003년에는 밴쿠버를 위해, 2007년에는 소치 총감독으로 뛴 분이다. 당연히 세 번째 도전을 하는 유치위 내부에서 찬반 의견이 나뉘었다. "경쟁국을 위해 뛴 분을 어떻게 우리팀에 영입하느냐"는 반대 논리가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조양호 위원장이 "반드시 데려와야 한다"며 밀어붙였다. 우리에게 두 번의 실패를 안겼다면 역으로 IOC 위원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가장 정확하게 파악하는 인물이라는 게 조양호 위원장의 판단이었다. 유치 성공이라는 결과는 당시 판단이 정확했음을 보여준다.
―확실히 경영자의 추진력은 다른 것 같다. 번스 총감독과 팀워크에서 한국팀이 실무적으로 배운 것도 많을 것 같은데. ▷번스 총감독과 파트너십은 내게도 소중한 경험이 됐다. 평창동계올림픽 모토인 '새 지평(New Horizon)'에서부터 끈기와 인내, 잠재력 등 한국팀의 메시지는 번스 총감독과 협업한 결과물이다. 미국인 총감독이 만든 초본을 한국의 '목소리'로 바꾸는 작업에서 이런 결과물들이 완성됐다(유치 성공 후 번스 총감독은 국내 언론과 인터뷰하면서 나 대표에 대해 "지금까지 함께 일한 스태프 중 최고였다"고 평가했다).

―영어 의사표현을 효과적으로 하고 싶어하는 이들을 위한 '꿀팁'이 있을까. ▷영어를 잘 구사하는 것보다 어떻게 '진정성'을 담아 메시지를 전달하느냐가 중요하다. 그러려면 말에 대한 '열정'을 가져야 한다. 열정이 없는 프레젠테이션은 바로 티가 난다. 매끄럽지 않은 스피치라도 진정성이 담겨 있으면 설득력이 살아난다. 또 말에 표정과 목소리, 단어 하나하나가 패키지처럼 조화를 이뤄야 한다. 표정으로 함께 말해야 하는데 이게 가능하려면 결국 연습밖에 답이 없다. 내가 이 자리까지 온 것도 순전히 연습과 관심이었다. 이렇게 하다 보니 전에 꿈도 꾸지 못했던 기회를 만나게 되더라.
―연습을 강조하는 걸 보면 일이 완성될 때까지 혹독하게 집중하는 '일 중독자' 같은 느낌이 드는데. ▷전혀 아니다. 미리 계획하고 이행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지금까지 그래본 적도 없다. 다만 내가 가진 장점을 가지고 지금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해왔다. 현실에 충실하면 미래의 길이 생기는 것 같다. 사람들이 기억해주고 다시 찾아주면서 새로운 길이 보이고. 결국 이게 나의 새로운 꿈으로 이어지더라. 사실 평창 유치 활동을 하기 전에 내게는 큰 꿈이 없었다. 그냥 평범하게 내가 하는 일에 만족하고 사는 삶을 그렸다. 그런데 평창동계올림픽을 통해 워낙 많은 관심을 받게 되면서 많은 부담과 책임을 느낀다.
―2011년 유치위 대변인 시절이나 지금이나 워낙 바빠서 일과 가정의 양립이라는 목표가 불가능할 것 같다. 나 대표만의 방식이 있나. ▷수시로 포기하고 수시로 저울질한다. 모든 워킹맘들이 나와 같을 것이다. 모두 잘하려고 하다 보니 중간에서 나만 힘들고 지치게 되더라. 평창 유치전 때는 가족에게 양해를 구했다. 남편에게는 "굉장히 바쁠 테니 이해하고 지지해달라"고. 아이에게도 "엄마가 지금 일을 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스스로 애써 자위했다. '양보다 질이다. 일을 제대로 마치고 가족에 올인하자'라고.
―평창동계올림픽 개막을 앞둔 지금은 물론 미래에도 성공한 올림픽 사례로 지속되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 ▷올림픽은 국가 간 계약이 아닌 국민 간 약속이라는 생각이 든다. 정부가 아무리 좋은 계획을 수립해도 이를 실현하고 이용하는 우리에게 '주인의식'이 없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전 세계 국민을 우리가 초대했으니 '마음 좋은 주인'이 돼 환대해야 한다. 경기를 많이 보고 한국 선수든 외국 선수든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응원해줘야 한다. 일등과 꼴찌도 중요하지 않다. 이런 성숙한 모습을 전 세계에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한국이 확보하는 유·무형의 자산은 어마어마하다. 성숙하고 통합된 한국의 모습을 믿고 한국 경제에 문을 두드리는 다양한 비즈니스 기회가 추가로 생긴다. 벌써부터 "왜 유치를 했느냐"는 질문을 던지기보다는 내가 먼저 경기를 보고 응원하며 최고의 시설들을 활용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KTX 등으로 지척이 된 평창에서 주말 여가를 즐기고 스포츠 꿈나무들이 미래를 준비한다면 평창은 국민에게 최고의 즐거움을 선사하는 자산이 될 수 있다.
―평창동계올림픽·패럴림픽이 끝나면 나 대표의 인생에도 많은 소회가 남을 것 같다. ▷평창동계올림픽이 끝나면 내 인생의 한 챕터도 끝날 것 같다. 앞으로 커뮤니케이션 공부도 더 하고 더 선명한 방향을 찾아 열심히 뛰고 싶다. 그런데 사업가로서 이런 얘기를 하면 안 되지만 한국에 내가 하는 서비스가 필요 없는 날이 빨리 왔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영어에 대한 스트레스도 없고 사회적 소통이 더욱 잘되는 한국을 꿈꾸게 된다.
■ 나승연은… 1973년 서울에서 1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다섯 살이 되는 해인 1977년부터 외교관인 부친 나원찬 씨를 따라 외국 생활을 시작했다. 고교 2학년 때 한국으로 돌아와 동덕여고를 졸업하고 이화여대 불어불문과에 입학했다. 졸업 후 한국은행 비서실에서 1년 동안 근무하다 아리랑TV 공채 1기로 입사해 2001년까지 전문 방송인으로 뛰었다. 그의 실력을 알아본 체육계와 정부의 요청으로 2002년 한일월드컵, 2012년 여수엑스포 유치위원회, 2011년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위원회 등에서 대변인 등으로 활약했다. 2003년 영어 커뮤니케이션 컨설팅기업 오라티오를 공동 설립해 운영하고 있다. 슬하에 아들 하나를 두고 있다.
[이재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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