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해서, 숨어 있어서' 더 끌리네..도시 탐험가를 유혹하는 불편 마케팅

김은영 기자 2018. 1. 1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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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판 없는 매장, 오랜 시간 기다려 얻을 수 있는 한정판 상품에 열광 비밀스럽고 은밀하게 탐험 본능 자극해야

호기심이 많고 가치지향적인 소비를 하며 도심을 정글처럼 누비는 도시 탐험가들. 이들의 활약으로 불황에도 작은 골목길엔 사람이 모이고 새로운 시장이 만들어진다. 탐험가들의 타깃은 탐험 본능을 자극하는 모든 것이다. 도심 뒷골목의 숨은 매장이나, 정보를 감춰서 매력적인 브랜드, 시간을 투자해야만 얻을 수 있는 한정판 상품 등은 미지를 추구하는 도시 탐험가들의 정복 대상이다.

◆ 찾기 불편해 더 매력적인 공간…꼭꼭 숨은 밥집

스피키지 바(Speakeazy Bar)는 1920~1930년대 대공황 여파로 미국 정부가 금주령을 내렸을 때, 꽃집이나 인쇄소처럼 위장하고 몰래 술을 팔던 곳이다. 국내에도 이런 ‘레지스탕스' 스타일의 장소가 있다. 간판이나 입구를 안내하는 표식도 없이 책장의 책을 누르면 바가 나오고(르 챔버), 꽃집을 지나치면 입구가 나온다(앨리스).

’동아지류판매’라는 간판을 따라 쭈욱 들어가야 만날 수 있는 을지로 그랑블루/사진=을지로 그랑블루 인스타그램

청담동과 한남동 일대의 고급 술집에서 시작된 스피키지 바가 최근 밥집으로까지 확산되고 있다. 서울 중구 을지로 공구상가에 있는 이탈리안 레스토랑 그랑블루는 스마트폰 지도 애플리케이션을 들고 가도 찾아 가기 어렵다. 팻말이나 간판 하나 없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허름한 창고 스타일의 주차장을 지나 30여 미터를 들어가면, 그제야 작은 정원과 함께 레스토랑이 ‘발견’된다. 낡은 창고를 개조해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살렸다.

간판을 크게 달아도 모자랄 판에 의도적으로 정체를 숨긴 식당들이 퍼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숨은 매장은 탐험 욕구와 정복 욕구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또 특별한 손님이 된 듯한 착각이 들게 하기 때문에 값이 비싸도 거부감이 적다. 손님이 알아서 주변에 열심히 자랑하고 SNS에 광고를 하는 덕에 별다른 마케팅이 필요 없다는 것도 장점이다.

그랑블루를 찾은 방문객들은 이런 후기를 남겼다. “온전히 여행을 온 느낌을 받을 수 있어서 행복했다.”, “도시를 탐험하는 힙스터가 된 기분이 든다.”

◆ 시간을 투자해 득템…‘설렘 지수’를 높이는 느린 쇼핑

남들 다 쓰는 제품을 쉽게 사면 무슨 재미가 있나? 세상에 몇 개 없는 한정판 제품은 도시 탐험가들의 소유욕을 자극하는 매력적인 존재다. 가성비 높은 롱 패딩을 3만 벌 한정 수량으로 출시해 대란을 일으킨 롯데백화점의 ‘평창롱패딩’, 매해 연말 음료를 일정량 구매한 고객에게 선착순으로 증정하는 스타벅스의 한정판 다이어리 등이 대표적이다. 탐험가들은 한정판 협업 제품을 사기 위해 며칠 전부터 매장 앞에 줄을 서는 것도 마다치 않는다.

사진을 찍고 3일 후에야 볼 수 있는 필름 카메라 앱 구닥/사진=구닥 페이스북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도 매력적인 탐험 공간이다. 크라우드 펀딩이란 대중을 뜻하는 크라우드(Crowd)와 자금 조달을 의미하는 펀딩(Funding)을 조합한 용어로, 대중으로부터 콘텐츠 제작 비용을 모으는 것을 말한다. 대개 인지도가 낮거나 제작비를 충당하기 어려운 신진 창작자들의 아이디어나 제품에 투자한다.

크라우드 펀딩은 온라인 펀딩 플랫폼을 통해 선 주문을 받고, 펀딩이 끝나면 제품의 제작이 진행되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제품을 받기까지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오전에 주문하면 오후에 받는 당일 배송의 시대, 이처럼 느리고 낯선 쇼핑에 도시 탐험가들이 열광하는 이유는 “흔하지 않은 제품을 합리적인 가격에 살 수 있기 때문”이다.

필름 카메라 앱 구닥은 시간 마케팅으로 인기를 끌었다. 미국의 코닥과 구닥다리란 말을 섞은 구닥은 필름 카메라처럼 24장의 사진까지 찍을 수 있다. 사진이 어떻게 나왔는지 확인하려면 3일을 기다려야 한다. 이 앱의 인기 비결은 ‘불편함’과 ‘설렘’. 구닥은 유료 앱이지만 출시 3개월 만에 100만 건이 넘는 다운로드 성과를 냈다.

◆ 제목·저자·표지 모두 감췄다…호기심 자극하는 매력적인 상품들

인터넷 서점 커넥츠북(구 리브로)은 블라인드 큐레이션 서비스 ‘비밀신간’으로 입소문으로 타고 있다. 비밀신간은 제목과 저자, 표지 등 책에 대한 기본 정보를 배제하고, 오직 책의 줄거리만 소개하는 책 추천 서비스다. 독자들은 북 커넥터(책을 추천하는 전문가)가 만든 리뷰 영상만으로 책을 구매할지를 판단한다. 어떤 책인지는 책을 받아본 후에야 알 수 있다.

제목, 저자, 표지를 공개하지 않고 줄거리만으로 책을 추천하는 ‘비밀신간’/사진=커넥츠북 인스타그램

커넥츠북 관계자는 “책이 가진 본질에 집중해 좋은 책을 선정하고 독자들이 선입견 없이 책 자체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하려고 ‘비밀신간’ 서비스를 선보였다”며 “페이스북, 유튜브 등 SNS 채널에서 ‘비밀신간’ 영상이 누적 조회 수 300만을 돌파했다”고 밝혔다.

감각적인 비주얼로 인스타그램에서 입소문이나 해외에서도 러브콜을 받는 의류 브랜드 ‘아더에러’는 독특한 마케팅으로 마니아층을 형성했다. 바로 디자이너의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는 철저한 신비주의 전략이다. 패션 디자이너와 그래픽 디자이너, 일러스트레이터, 파티시에 등 다양한 분야의 친구들이 모여 만들었다는 것 외에는 구성원에 대한 정보를 공개하지 않는다. 오직 옷과 이미지만으로 소비자들과 소통하기 때문에 더 전문적으로 느껴진다는 반응도 있다.

모든 정보가 즉각적으로 공유되는 시대, 도시 탐험가들은 호기심을 자극하고 참신함을 제공하는 것들에 열광한다. 이들이 이토록 탐험을 갈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프랑스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명언이 답이 되지 않을까. “탐험의 목적은 새로운 풍경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각을 얻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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