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기획-지구의 미래] '30분' 살다 가는 일회용컵..'제2의 삶' 10%도 안 돼

윤지로 입력 2018. 1. 17. 19:12 수정 2018. 1. 29.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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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집계된 사용량만 7억6000만개 / 실제로는 한 해 200억개 이상 소비 추정 / '최고급 펄프' 종이 커피컵 재생지로 부활 / 플라스틱 컵·뚜껑은 극세사·키보드 원료로 / 쓰레기통 버려진 컵은 사실상 그대로 폐기 / 재활용률 제고 위해 '보증금 부활' 목소리
재활용의 세계는 ‘21세기 연금술’이 따로 없다. 페트병은 사후에 아웃도어·수영복으로 환생하고, 맥주 캔은 자동차 부품이나 철근으로, 과일을 담았던 스티로폼 박스는 창틀 심이나 방음재로 제2의 삶을 산다. 오늘 낮 점심식사를 마치고 나른한 당신을 깨워줄 따뜻한 커피, 그 커피가 담긴 일회용 종이컵도 마찬가지다. 커피컵으로서 소임을 마친 종이컵은 두루마리 화장지로, 플라스틱 아이스잔은 키보드나 극세사섬유로 다시 태어난다. 그러나 컵이 다시 태어나려면 영화 ‘신과 함께’에서 주인공이 통과해야 하는 재판만큼이나 결정적인 관문이 있다. ‘제대로 버려져야 한다’는 것. ‘길거리 쓰레기통에 예쁘게 버렸으니 괜찮겠지’라고 생각한다면, 안타깝지만 그 커피컵은 그저 땅에 묻히거나 태워질 가능성이 크다. 그 많은 일회용 커피컵들은 모두 어디로 가는 걸까.

◆50명의 손님 중 머그잔 사용은 1명

지난 10일 오후 4시 서울 마포구 공덕역의 한 커피전문점. 낮인데도 영하 5도를 밑도는 추위 때문인지 매장 안은 손님들로 빈 테이블이 거의 없었다.

자리를 찾는 척하며 사용 중인 컵을 살펴보니 손님 48명 가운데 머그잔에 음료를 받은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음료를 나눠 마시거나 물을 마시기 위해 추가로 종이컵을 받아온 경우가 있어 사용 중인 일회용컵은 손님 수보다 많았다.

기자가 카운터에서 바닐라라떼를 주문하자 점원은 ‘뜨거운 걸로 준비해드릴까요?’라고 하더니 대답을 듣기 무섭게 종이컵에 시럽을 펌핑해 옆으로 넘겼다.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2016년 한 해 동안 우리나라 성인 1명은 커피 377잔을 마셨다. 2012년 288잔에서 4년 새 31%나 늘었다. 커피전문점은 지난해 1월 현재 전국에 5만2392곳에 이른다.

환경부는 일회용품 자발적협약을 맺은 12개 브랜드의 커피전문점과 5개 브랜드의 패스트푸드점을 통해 일회용컵 사용량을 집계하는데, 2016년 17개 프랜차이즈에서 사용된 일회용컵만 7억6000만개다. 이 컵들을 세로로 죽 이어붙이면 가장 흔한 12온스(355mL) 커피컵의 높이를 10㎝로 잡고 계산했을 때 서울∼부산을 95번 왕복(총 7만6000㎞)할 수 있다.

그런데 테이크아웃 음료를 17개 브랜드에서만 파는 건 아니다. 커피전문점만 놓고 봐도 자발적협약 12개 업체의 점포는 국내 전체 커피전문점의 약 10%에 불과하다. 환경부는 한 해 사용되는 일회용 컵이 200억개도 넘을 것으로 본다.

기자가 주문한 바닐라라떼는 원색의 종이컵에 담겨 나왔다. 자리에 앉아 음료 픽업하는 곳을 30분 동안 지켜봤다. 손님들이 주문한 음료는 종이컵 21개, 플라스틱컵 8개에 담겨나왔다. 오후 7시까지 앉아있었지만 텀블러나 머그컵을 쓰는 사람은 없었다.

이튿날 오전 서울 중구 소공동 다른 브랜드의 매장도 비슷했다. ‘머그잔에 드릴까요?’ 같은 질문은 없었다. 손님 10여명은 전부 일회용컵을 사용 중이었다. 전날과 차이가 있다면 매장에 다회용 물컵이 따로 비치돼있어 추가 종이컵 사용은 없었다는 점 정도다. 출근시간대여서 테이크아웃 주문이 많았는데 29잔 모두 일회용컵에 담겨 매장을 떠났다. 컵 안의 음료가 바닥을 보이면 이제 컵의 운명이 결정될 차례다.

◆일회용 종이컵은 종이가 아니다?

일회용 커피컵에게 쓰레기통은 다 같은 쓰레기통이 아니다. 매장 안에 있는 쓰레기통에 버려질 때라야 비로소 재활용 기회를 얻는다.

한 해 쏟아져 나오는 200억개의 일회용컵 가운데 재활용되는 건 5∼10%로 추정된다. 17개 자발적협약 업체 매장 내에서 사용된 컵이 모두 재활용된다고 가정해도 겨우 이 정도다.

자발적협약 업체를 포함해 총 19개 업체 매장 내에서 버려진 커피컵은 권역별로 전국 3개 지점에 모인다. 서울과 경기·인천 2300개 점포에서 수거된 컵은 경기 하남시가 집결지다.

지난 15일 방문한 하남의 창고에는 각종 로고가 찍힌 상자들이 곳곳에 높다랗게 쌓여있었다. 집하장과 계약한 기사들이 1t트럭으로 하루 40∼50곳씩 돌며 이곳에 부리는 컵의 무게는 하루에 7∼8t에 달한다.

커피 전문점에서 플라스틱컵과 종이컵을 분류하긴 하지만 컵홀더나 빨대, 포크 등 다른 재질이 섞인 경우가 있어 작업자 4명이 상자를 뜯어 다시 한번 손으로 분류한다. 종이컵, 폴리스틸렌(PS), 폴리프로필렌(PP), 페트(PET) 등으로 나뉜 일회용컵과 빨대 같은 부속물들은 커다란 톤백에 담겨 뿔뿔이 흩어진다.
지난 15일 경기 하남시 창우동 대원리사이클링 집하장에서 직업자들이 일회용 플라스틱컵을 종류별로 분리하고 있다.
그런데 커피컵은 많고 많은 폐지 수집업체 중에 왜 이 한 곳에만 모이는 걸까.

그 이유는 커피컵은 종이로 만들어졌으되 종이가 아니어서다. ‘아직도 내가 니 엄마로 보이니’처럼 황당한 소리 같지만 종이컵 안을 감싼 폴리에틸렌(PE) 코팅 때문에 그렇다.

커피컵은 고위도 침엽수에서 뽑은 버진펄프로 만든다. 펄프 가운데 최고급 품질에 속해 활엽수로 만드는 일반 펄프보다 20% 이상 비싸다. 버진펄프는 섬유질이 길고 튼튼해 우유팩이나 종이컵을 만드는 데 제격이지만 액체를 담으려면 PE 코팅을 한번 더 해야 한다. 그래서 종이컵을 재활용하려면 이 코팅을 벗겨내야 하기 때문에 일반 폐지와는 별도로 취급해야 하는 것이다.

커피컵을 길거리 쓰레기통에 버렸다고 해서 ‘책임을 다했다’고 생각하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일반쓰레기로 취급돼 그냥 매립·소각되기 마련이고, 용케 종이로 분류됐다 하더라도 코팅제 때문에 일반 폐지 재활용 업체에서는 쓸모없는 쓰레기일 뿐이다.

코팅을 벗길 때는 차염소산나트륨(NaClO)이라는 화학물질이 들어간다. 종이컵 1t의 코팅을 벗기는데 차염소산나트륨 50㎏이 쓰인다. 비닐 코팅을 벗은 종이는 펄퍼(pulper)라고 하는 ‘믹서기’에서 갈리며 재생지로 거듭난다. 우유팩도 같은 과정을 거친다.

우리나라에서 종이컵은 휴지로만 재활용된다. 두루마리 화장지가 대표적이고 공중화장실에서 주로 쓰는 페이퍼타월로도 만들어진다. 그런데 기자가 마신 바닐라라떼의 컵처럼 강렬한 원색의 컵은 재생지의 품질을 떨어뜨리는 요인이다.

부산에서 종이컵·우유팩을 재활용하는 노응범 동신제지 대표는 “잉크를 빼려면(탈묵) 형광물질 표백제를 넣어야 하는데 인체에 유해하기 때문에 쓰지 않는다”며 “탈묵 없이 휴지를 만들면 군데군데 까만 먹점이 만들어져 품질이 떨어진다”고 전했다.

그는 “특히 크리스마스 전후로 빨간 종이컵이 급증하는데 아주 골칫덩이”라며 “환경과 건강을 생각해 인쇄 면적이 일정 비율을 넘지 않도록 하는 방안이 마련되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12온스짜리 컵 7개면 두 겹짜리 35m 두루마리 화장지 하나가 나온다. 그렇지만 최고급 펄프의 두 번째 인생이라기엔 어쩐지 좀 초라한 느낌이다.

하남 집하장을 운영하는 이만재 대원리사이클링 대표는 “중국이나 미국에서는 종이컵을 고압으로 압축해 바닥재로도 쓰는데, PE코팅이 접착제 역할을 해서 추가로 접착제를 쓰지 않고도 단단하게 만들 수 있다”면서 “하지만 우리나라는 수거되는 종이컵 양이 너무 적어 바닥재 재활용은 어렵다”고 전했다.

종이컵에 비하면 플라스틱컵은 활용 범위가 넓다. 플라스틱은 꼭 일회용컵이 아니더라도 재질만 같으면 다른 폐플라스틱과 함께 재활용될 수 있어서다.

대부분 페트인 플라스틱컵으로는 극세사를 만들고, 폴리스틸렌이 많은 컵뚜껑은 키보드나 모니터 프레임의 원료가 된다. 

◆길 잃은 종이컵 줄여야

앞서 말했듯, 일회용컵 중 재활용되는 것은 10%가 안 된다. 10개 중 9개는 말하자면 어디에 묻혔는지, 나뒹구는지 알 수 없는 ‘행불자’인 셈이다. 그래서 일회용컵 보증금 제도를 부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컵보증금제는 일회용컵에 50∼100원의 보증금을 붙여 음료를 판 뒤 다 쓴 컵을 매장에 가져오면 보증금을 돌려주는 제도를 말한다. 맥주·소주병에 대해 실시 중인 빈병 보증금 제도와 같은 개념이다.

컵보증금제는 2002년 실시돼 컵 회수율을 2007년 상반기에 36.7%까지 끌어올렸다. 그러나 이명박정부 때인 2008년 법적 근거가 미비하고 미환불 보증금의 사후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폐지됐다.

10년이 흘러 정부는 다시 보증금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매장을 떠난 컵을 매장 안으로 불러들이려면 보증금을 쓰는 게 가장 효과적이라는 판단에서다. 이번에는 법도 개정하고 미환불 보증금 관리책임 주체까지 분명히 정하겠단 계획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소비자에게만 책임을 지우지 않고 커피컵을 생산자책임재활용제도(EPR)로 끌어들이는 것도 고민 중이다. EPR는 물건을 팔아 이득을 봤으면, 폐기물을 회수해 재활용도 하라는 취지의 제도다. 즉, 커피컵이 EPR 대상 품목이 되면 커피전문점이나 패스트푸드점이 일정 액수의 분담금을 내고, 그 돈은 공공회수체계 마련 등에 쓰인다. 이렇게 되면 길거리를 떠돌거나 일반 폐지 더미에서 쓰레기 취급받던 종이컵을 재활용 트랙으로 불러올 수 있다.

일회용컵 등 일회용 포장재에 관한 대책은 이달 말 사회관계장관회의 등을 거쳐 확정·발표될 예정이다.

그러나 제도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종이컵과 재활용 방법이 같은 종이팩(우유팩·두유팩 등)은 일찌감치 EPR 대상이 됐지만 여전히 25% 정도만 재활용되는 실정이다. 결국 중요한 건 망자의 환생을 책임지는 저승삼차사와 같은 마음으로 커피컵을 ‘제대로 버리는’ 우리의 자세일지 모른다.

하남=윤지로 기자 kornyap@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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