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공단은 자본주의를 어떻게 가르쳤나

이종태 기자 입력 2018. 1. 17.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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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공단에 우리 기업들이 원활히 입주하기 위해 지적도를 작성하고, 입주 기업의 '토지 이용권'을 확보하고, 세금을 걷기 위해 세무회계 방식을 가르친 것은 시장경제 이식 과정이었다.

개성공단 기업들은 입주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매우 황당한 경험을 했다. 단지 전기, 상하수도, 통신 등 기반 시설이 설치되지 않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공장을 세우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어떤 일’을 할 수 없었다. 그것은, ‘여기서부터 저기까지는 우리 공장이 일정 기간 배타적으로 사용할 부지’라고 공문서에 표시하는 일이었다. 이른바 공장 부지에 대한 등기다. 누가 언제 와서 비켜달라고 할지 모르는 땅에서 사업을 시작할 수는 없지 않은가. 북한에는 공장 부지의 경계선을 그려넣을 ‘바탕 그림(공문서)’ 자체가 없었다. 그 바탕 그림을 보통 지적도(地籍圖)라고 부른다. 지적도가 없으면 등기 자체가 불가능하다.

지적도란 땅의 위치와 종류 등 토지 관련 정보를 나타내는 공문서다. 보통 국가 차원에서 측량을 통해 만들어놓는다. 개별 기업과 개인들은 지적도 위에 자신의 땅을 등기한다. 이런 절차에 따라 땅에 대한 각자의 권리(‘나의 것’과 ‘너의 것’)가 표시된다. 등기는 ‘개인적 소유권’의 사회적 표현이다. 북한에 지적도가 없는 이유는 사회주의 국가이기 때문이다. 모든 토지가 국가 소유인 만큼, 개별 기업과 개인은 땅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 개인 소유가 아니므로 토지를 남에게 팔거나 사는 일 역시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등기할 수 없으니 지적도 역시 필요 없다. 지적도가 필요 없으니 국토를 측량해놓지도 않았다. 북한에 지적도가 없다는 것은, 그 지역이 ‘시장경제로부터 순결한’ 사회주의 국가였다는 의미다.

ⓒ사진공동취재단 2003년 6월3일 개성공단 1단계 공사 착공식의 발파 장면.

개성공단은 이런 순결한 사회주의 시스템에 균열을 일으켰다. 북한이 한국 기업을 입주시키려면 공단 부지를 각 기업에게 등기해줘야 했다. 등기하려면 지적도가 있어야 한다. 2007년 이뤄진 대한지적공사(현재 국토정보공사)의 개성공단 측량 및 지적도 제작은 북한에 ‘개인적 소유권’의 씨앗을 뿌린, 남북 교류사에서 가장 획기적 사건으로 평가될 만하다.

개성공단 기업들은 ‘북한 국가’로부터 해당 부지를 빌리는 형식으로 개성공단에 입주했다. 일정 기간 해당 부지를 사용할 수 있는 ‘토지 이용권’을 받았다. 국가 소유의 땅을 임차한 셈이다. 주택으로 보면 전세와 비슷하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개성공단의 토지 이용권은 한국의 전세와 차원이 다른 ‘사실상의 소유권’이었다. 일단 임차 기간이 50년으로 굉장히 길다. 더욱이 토지 이용권을 제3자에게 팔거나 빌려줄 수 있었다. 토지 이용권을 담보로 돈을 빌리는 것도 허용되었다. 만약 당신이 어떤 물건으로 수익을 추구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팔거나 빌려주며, 심지어 담보로 잡을 수 있다면, 그 물건은 누구 것일까? 사실상 당신의 소유다.

실제로 입주 기업이 토지 이용권을 담보로 돈을 빌렸다가 원리금을 상환하지 못하기도 했다. 채권자가 그 기업의 토지 이용권을 가져갔다. 이른바 ‘강제집행’을 통해서다. 강제집행이란, 국가권력이 미상환 채무자의 재산을 압류해서 채권자에게 원리금을 돌려주는 제도다. 매우 불쾌하고 딱한 상황을 동반하지만 강제집행 자체는 시장경제의 원활한 작동을 위해 필요 불가결하다. 만약 남에게 돈을 빌려줬다가 받지 못했는데 강제집행도 불가능하다면, 아무도 대출을 해주지 않을 것이다. 시장경제 시스템 자체가 작동하지 않게 된다. 당시 개성공단 토지 이용권의 강제집행 절차를 시행한 당사자는 누구였을까? 놀랍게도 대한민국 법원이었다. 한국 법원이 북한 영토인 개성공단에 소재한 한국 기업의 토지 이용권을 차압해 한국인 채권자에게 상환한 것이다. 한국 국가권력의 강제집행권이 다른 나라 영토에 적용된 희귀한 사례다.

ⓒ연합뉴스 2015년 크리스마스 이브의 개성공단 전경.

개성공단 ‘토지 이용권’은 ‘사실상 소유권’

만약 북한 측이 한국에서 비슷한 일을 했다면 보수 세력은 ‘나라가 적화통일이 된다’며 펄펄 뛰었을 것이다. 국내 보수 세력은 개성공단 사업마저 이적행위로 간주해왔다. 그러나 실제로 북한의 ‘앙시앵 레짐’을 바꾼 것은 개성공단이다. 그 변화는 자연스럽고 안정적으로 이뤄졌다. 북한 당국 역시 그 필요성을 인정하면서 체제 리스크를 감수했다. 토지 이용권이나 강제집행 같은 친시장 제도들을 조금씩 익혀나갔다. 개성공단에서 습득한 제도들을 나진·선봉 같은 다른 특구나 전국 차원의 법안에 반영하기도 했다.

북한 당국이 다른 특구에 옮겨 심으려 할 정도로 강한 인상을 받은 제도 가운데 상당수는 ‘개성공단 관리위원회’로부터 나왔다. 개성공단은 남북한의 두 대표 기구에 의해 운영되었다. 북측의 대표 기구는 중앙특구개발지도총국(총국)으로 산하에 세무서와 보안서를 두고 있었다. 한국 측의 그것이 바로 관리위원회다.

관리위원회는 무엇을 ‘관리’했나? 개성공단이 운영되는 기본적 규범들을 만들었다. 물론 개성공단을 규율하는 북측의 최상위 법규는 따로 있었다. ‘개성공단지구법’이다. 최상위 법규(법률)만으로는 남과 북의 자본 및 노동자들이 복잡하게 얽히고설키며 발생하는 다양한 시비와 사건·사고들을 처리할 수 없었다. 예컨대 북측 노동자가 한국인 관리자와 주먹다짐을 한다면? 남측 노동자가 음주운전을 하다가 북측 시설을 파괴하면 어떻게 손해배상을 해야 하나? 더욱이 새로운 법규가 필요할 때마다 일일이 북측 최고인민위원회(한국의 국회에 해당하며 1년에 한두 차례 열린다)를 열어 제·개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결국 개성공단이라는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 새롭게 발생하는 사건·사고들에 대한 법규를 하나씩 만들어가야 했다. 그 일을 주도한 게 바로 남측 관리위원회다.

ⓒ시사IN 자료 2005년 12월28일 개성공단에서 북한 노동자들이 화장품 케이스를 만들고 있다.

남측 관리위원회가 북측 총국과 협의해서 만든 법규는 세칙(한국에서는 시행령)과 준칙(시행규칙)이다. 법률적 공식 지위로 보면, 북측 개성공단지구법의 하위 규범에 불과하다. 그러나 현실에서 발생하는 구체적 문제들을 세칙과 준칙에 따라 해결할 수 있어서 그 영향력이 상위법인 개성공단지구법보다 훨씬 넓고 깊었다. 개성공단에 관한 한 남측 관리위원회가 사실상의 입법권을 갖고 있었던 셈이다. 관리위원회가 2005년부터 만들기 시작한 세·준칙은 2014년쯤 되면 무려 1300쪽에 달하는 <개성공업지구 법규사업준칙집>으로 축적되기에 이른다.

관리위원회가 북측을 지원해서 큰 성과를 낸 업적들 중 하나는 세무회계 문제다. 북한은 공식적으로 세금이 없는 나라다. 사회주의 이론에 따르면, 세금은 ‘자본’의 대리인인 국가가 인민을 착취하는 ‘낡은 사회의 유물’일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북한 당국이 자국 영토에서 영업하는 외국(한국) 기업한테 세금을 받지 않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문제는 ‘세금을 징수하는 방식’이었다.

시장경제 사회의 기업들은 순이익(이윤)을 냈을 때 그중 일부를 법인세로 납부한다. 사회주의 체제의 국영기업에는 이윤이라는 개념이 약하다. 사회주의 기업의 목표는 이윤 창출이 아니라 일정한 양의 품목을 국가 명령대로 생산하면 되기 때문이다. 북한 당국은 국영기업들로부터 ‘이윤의 일부’가 아니라 ‘정해진 액수’를 납부금으로 받아왔다(사실상의 세금이다). 순이익이 없어도 납부금은 내야 한다.

북한 정부로서는 개성공단 등 특구에 외국 기업들을 유치하려면 세금제도의 개편이 필요했다. 만약 국가가 정한 대로 세금을 내야 하는(심지어 순이익을 내지 못하는 경우에도) 시스템이라면, 어떤 기업도 특구에 입주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엄청난 이익을 내는 기업으로부터도 정해진 액수의 납부금만 받는다면 북한 국가가 손실을 입는다. 결국 ‘순이익의 일부’에 세율을 적용해서 징수하는, 국제적이고 보편적인 세제를 채택해야 한다. 북한으로서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법인세를 받으려면 먼저 해당 기업의 순이익 규모부터 파악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평양 조선신보 초고층 건물이 모여 있는 평양 여명거리 모습. 북한의 자본주의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2000년대 후반부터 회계 인력 자체 양성

순이익 파악에는 기술이 필요하다. 그 기술이 바로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핵심 제도인 ‘회계’다. 회계는, 순이익 등 기업의 재무 정보를 정부나 주주 등 이해 관계자에게 알리는 체계다. 기업을 둘러싸고 이뤄지는 현금 흐름 가운데 어떤 부분이 수익이고 다른 부분이 비용인지 구분해서 순이익을 산정한다. 회계 방법에 따라 같은 기업의 순이익도 아주 다르게 산정될 수 있다. 해외투자 비중이 큰 현대 글로벌 경제에서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회계 기준이 필요한 이유다. 투자 기업 처지에서는 국제회계 기준의 적용을 선호한다. 다른 나라에 투자했는데, 순이익이 과도하게 산정되어 부당한 세금을 징수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개성공단 관계자들에 따르면, 북측은 개성공단 가동 직전까지 세금 및 회계 문제를 간과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회계 인력이 희귀했을 뿐 아니라 세금에 대한 고민 자체가 없었다. 심지어 북한 국영기업과 마찬가지로 개성공단 기업들에 대해서도 정해진 납부금을 받으려 했던 모양이다. 2004년 말쯤에는 남측 관리위원회에 “우리는 잘 모른다. 당신들이 1~2년 정도 세금을 받아줄 수 없겠느냐”라고 요청하기도 했다고 한다.

북측은 결국 ‘입주 기업들이 활동하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회계제도와 세금제도를 정비해나가겠다. 우리가 인력을 양성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남측에 요청하게 된다. 관리위원회는 북측 예비 인력들을 중국으로 보내 세무회계 연수를 받게 했다. 당시 북측 연수생들은 회계는 물론 주식회사 같은 개념도 몰랐다. 시장경제 체제에서 법인의 지위나 ‘유한책임’ 같은 개념도 낯설어했다. 개성공단 관계자는 “2000년대 후반부터는 북측 내부에서 회계 인력을 자체 양성하는 데까지 발전했다”라고 말했다. 이 또한 시장경제의 씨앗이다.

세금 이야기에 개성공단 자금이 핵·미사일 개발에 악용되었다는 시비가 또 제기될 수 있겠다. 그런데 세금으로 북측에 지급된 돈은 얼마 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개성공단의 법인세율 자체가 결산 이윤(순이익)의 14%로 한국보다 훨씬 낮다. 순이익이 발생해도 2~5년간 면세해준다. 면세 기간이 끝난 뒤에도 3년 정도 동안 절반만 받는다. 입주 기업들이 본격적 영업 활동을 영위한 것이 8년(2008년부터 2016년 2월)에 불과하니, 상당수 기업은 세금을 거의 내지 못했을 터이다.

문제는 개성공단의 북측 노동자들에게 지급되는 임금이다. 2016년 2월 박근혜 정부가 개성공단을 전면 중단한 논거 역시 ‘임금이 대량살상무기(WMD)에 전용된다’는 주장이었다. 당시 박근혜 정부 성명서에 따르면, “개성공단을 통해 북한에 총 5억6000만 달러(약 6160억원)의 현금이 유입”되었으며 그 돈이 “핵무기와 장거리 미사일을 고도화하는 데 쓰인 것으로 보인다”. 이제 박근혜 정부 주장의 개연성을 따져보자. 개성공단 입주 기업들은 임금을 미국 달러화로 지불했다. 그 돈을 북한 노동자들에게 직접 주지 못했다. 각 기업은 소속 노동자들의 임금 총액을 북측 총국에 건네야 했다. 개성공업지구 노동규정에 “기업은 노동보수(임금)를 화폐로 종업원에게 직접 주어야 한다(임금 직불)”라고 되어 있는데도 그랬다. 북한 당국이 그 달러로 핵·미사일 개발에 필요한 물자를 사들인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될 만하다. 그러나 단정할 수는 없다. 남측 관리위원회도 북측 총국에 임금 직불을 끊임없이 거세게 요구했다. 이에 대한 북측 총국의 답변은 이러했다고 한다. “사정 좀 이해해달라. 우리도 그렇게 하고 싶지만 불가피하다. 상황이 더 발전하면 임금을 직불하도록 노력하겠다.” 실제로 북측 처지에서는 ‘불가피한’ 사유가 있었다. 달러화 임금을 노동자들에게 개별적으로 지급하는 경우 체제 차원의 혼란이 불가피했던 것이다.

북한의 무역 규모는 한국의 400분의 1 정도다. 해외 부문과의 거래가 굉장히 적다. 조선원화(북한 통화)로 다른 나라 통화를 사거나 외국 통화로 조선원화를 매입하는 경우가 흔치 않다는 이야기다. 이처럼 조선원화에 대한 수요·공급 자체가 없으니 그 시세(조선원화의 통화가치) 역시 형성되지 않는다. 북한 당국은 공식 환율을 ‘1달러당 108.8원(2015년 현재 한국은행 자료)’으로 정해놓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희망 사항이지 외환시장(국제 거래나 북한 내 암시장)에서 통하는 수치는 아니다. 즉, 누구도 조선원화 108.8원을 받고 1달러를 내놓지 않는다.

북한 내에서는 달러화의 인기가 대단히 높다. 달러가 있어야 ‘수입품 상점’에서 상품을 구입할 수 있다. 북한 내에서 거래되는 암시장 환율인 ‘1달러당 8000원’이 오히려 조선원화의 진정한 가치에 가까울 터이다. 이런 상황에서 개성공단 노동자들에게 달러로 임금을 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개성공단 노동자들은 암시장(북한에는 외환을 자국 통화로 교환할 수 있는 은행 자체가 없다)에서 달러를 조선원화로 바꿔 다른 노동자나 공무원보다 수십 배 높은 소득을 얻게 된다. 이로 인해 공식적 임금체계가 흔들리면서 체제의 권위가 곤두박질칠 것이다. 한국 역시 경제개발기에 비슷한 이유로 외환 거래를 엄격히 통제한 바 있다.

또한 북한이 가난한 나라이기는 하지만 엄연히 하나의 국가다. 달러를 획득할 통로가 의외로 많다. 한국은행 자료에 따르면, 북한은 2007~2010년 4년간 매해 약 10억~15억 달러의 경상수지 적자를 냈다. 이렇게 공식적 외환 수입이 없어도 2009년 5월에는 제2차 핵실험을 감행한다. 개성공단이 본격 가동된 2011년부터 2015년 사이에도 매년 9억~14억 달러 규모의 경상수지 적자를 기록했다(한국은행 자료). 개성공단이 운영된 8년 동안 주로 임금 형태로 북측 총국에 넘어간 돈은 모두 5억6000만 달러다. 매년 평균 7000만 달러 정도다. 연간 십수억 달러 규모의 경상수지 적자를 기록하는 국가에 대해 7000만 달러만 찍어내 핵무기 개발 자금으로 단정 짓는 것은 매우 악의적이다.

설사 북측이 그 돈을 핵 개발 자금으로 돌려 사용하려는 확고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 치더라도, 그렇게 쓸 수 있는 달러의 규모는 결코 크지 않았다. 연간 7000만 달러 가운데 상당 부분이 5만3000여 북측 노동자에게 필요한 곡물 등 생필품을 해외에서 사오는 자금으로 사용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총국은 임금을 받아가는 대신 해당 노동자들에게 현물표를 나눠주었다. 노동자들은 그 현물표를 국영 상점이나 배급소에서 생필품으로 바꿔 생계를 이었다. 이런 시스템이 돌아가려면, 총국이 임금 대신 생필품을 국영 상점 등에 채워둬야 한다. 만약 북한의 자체적 식량 생산량이 충분하다면, 내부적으로 국영 상점에 조달하고 달러를 빼돌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개성공단이 운영된 대부분의 기간에도 북측의 식량 생산 능력은 매우 부실했다. 관리위원회와 기업주 등 외부의 눈이 지켜보는 상황이므로 어떻게든 물자를 구해와야 한다. 북한 내에서 곡물을 구하기 힘들다면 해외에서 수입할 수밖에 없다. 총국이 가져간 연간 7000만 달러의 임금으로는 충분한 생필품을 수입할 수 없었다. 임금수준이 워낙 낮았기 때문이다. 2016년 초 현재 1인당 월평균 임금은 150달러(약 17만원)이다.

개성공단 초기에는, 북측의 총국이 남측 입주 기업들에게서 임금으로 받은 달러 가운데 대부분을 로바나라는 오스트레일리아의 교포 회사에 넘겼다. 로바나가 생필품을 매입해서 총국에 공급하는 조건이었다. 그런데 로바나가 얼마 지나지 않아 계약을 파기해버렸다. 수지가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북측 총국은 남측 관리위원회에 매달렸다. “달러화를 넘길 테니 물자를 사달라.” 남측 관리위원회도 이런 제안을 환영했다고 한다. 당시에도 한국 보수 세력들로부터 끈덕지게 제기되었던 ‘핵무기 개발 자금 퍼주기’ 논란의 뿌리를 잘라버릴 수 있을 터였다. 실제로 관리위원회는 중국과 오스트레일리아, 러시아 등 세계 곳곳의 곡창지대를 대상으로 싸게 곡물을 매입할 수 있는 판로를 물색했다. 결국 실패했다. 1인당 150달러 수준으로는 충분한 생필품을 구할 수 없었다.

개성공단 임금은 생필품 구입하기에도 빠듯

북한 당국이 개성공단을 일단 운영하게 된 순간, 용인할 수밖에 없는 시장경제 제도가 있었다. 토지 이용권과 회계가 대표적 사례다. 그런 제도를 채택하면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이런 식으로 북한 영토의 제한된 지역인 개성공단에나마 시장경제 제도가, 마치 물이 모래로 스며들듯 확산되었다. 20년 전의 북한 사회주의자였다면 ‘자본주의 반동’이라며 치를 떨었을 제도들이다.

북측 당국 역시 개성공단에서 시험된 시장 제도들을 ‘필요악’으로 간주하기보다는 경제 발전에 활용하려 한 정황이 있다. 북측은 개성공단 가동 이후 제정한 부동산관리법으로, 해외 기업에게만 허용하도록 되어 있었던 토지 이용권을 전국 차원으로 확대하려 했다. 기업이나 단체 외에 일반 인민도 토지 이용권을 얻을 수 있게 설계되어 있었다. 법안은 측량과 등기 개념도 포함했다. 개성공단 이전엔 볼 수 없었던 모습이다.

개성공단의 법제는 최북단의 나진·선봉 특구로 이식되기도 했다. 2013년 개정된 나진·선봉 특구 관련 법률은 강제집행권, 국제회계 기준, 기업의 가격결정권(기존 사회주의에서는 국가가 가격 결정 권한을 갖는다) 등을 포괄한다. 강제집행을 ‘(북측의) 재판소가 담당한다’라고 명기해놓은 것도 이채롭다. 개성공단에서 이뤄진 한국 법원의 강제집행에 경각심을 느낀 결과일 수 있다.

북한은 개성공단 특구를 통해 시험해본 시장경제 제도를 조금씩 체제 내로 흡수해왔다. 개성공단은 실제로 북한 체제와 인민들을 변화시켰다. ‘개성공단의 북한’은 느린 보폭이지만 확고하게 변화되고 있었다. 더욱이 2000년대 들어 북한 내륙에서도 급격히 시장화가 진행되어 깜짝 놀랄 만한 수준에 이른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과 국제 제재를 감안하면, 개성공단의 재개가 단기간에 이뤄질 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한국이 개성공단 같은 경제특구를 통해 북한 전역의 시장화와 경제발전이 더욱 안정적이고 인간적으로 이뤄질 수 있게끔 지원하는 전략을 미리 세워둘 필요성은 충분하다. 개성공단의 경험이 이 전략의 타당성을 입증하고 있다. 통일부 정책혁신위원회는 지난 12월 말 발표한 ‘의견서’에서 “유엔 안보리 결의를 준수하면서도 국제 정세의 변화 등에 따라 여건이 조성된다면 개성공단을 재개할 필요성이 있고 이를 적극적으로 준비하여야 한다”라고 밝혔다.

이종태 기자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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