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워 가려버리고 싶은 매일경제

정상근 기자 입력 2018. 1. 17. 16:20 수정 2018. 1. 17.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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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양극화의 어두운 단면이 부끄럽다는 매경…그래놓고 최저임금은 올리면 안된다?

[미디어오늘 정상근 기자]

현재보다 크게 경제수준이 낮았던 지난 1989년 서울에서 ‘아시아 도시빈민대회’가 열렸을 당시 일화다. 88서울올림픽을 전후해 전두환 정권은 공항에서 서울로 이어지는 대로변 판잣집들을 철거하거나 보이지 않도록 가림막을 설치하며 이른바 ‘88서울올림픽 도시미화’를 진행했다. 이때 빈민대회에 참석해 우리의 봉천동 산동네를 지켜본 개발도상국 출신 참가자들은 “여기가 무슨 가난한 동네냐”며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그들의 기준으로 상수도 시설이 돼 있고 다양한 전기제품을 사용하는 이들의 주거지가 빈민촌일 리 없었기 때문이다.(한국일보 ‘빈곤, 단순히 소득 부족을 말하는 게 아니다. 참여와 기회의 결핍 느낀다면 당신은 ‘빈곤층’’)

군사 독재정권은 점차 심해지는 양극화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눈앞에서 치워버렸다. 박정희·전두환 정권은 ‘산업역군’이란 감언이설로 상경한 노동자들을 재벌들이 푼돈으로 이용케 했고, 도시 미화를 이유로 이들이 그나마 쉴 수 있었던 공간인 달동네와 판자촌을 없애버렸다.

▲ 옛 청계천 판자촌 모습.
청계천변을 따라 길게 늘어섰던 도시 빈민들은 성남으로 쫓겨났고, 성남에서 다시 곳곳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전두환 정권은 재개발을 명목으로 서울 주요 도심지역과 올림픽대로 인근의 빈민촌을 강제로 철거했다. 상계동 주민들은 떠돌다 겨울을 나기 위해 토굴까지 들어가야 했다. 라디오에서는 “하늘엔 조각구름 떠있고, 강물엔 유람선이 떠있고 저마다 누려야 할 행복이 언제나 자유로운 곳”이란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을 때였다.

그리고 2018년, 서울에 그 많던 판자촌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지만 그렇다고 빈민의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여전히 주거환경의 사각지대에는 많은 도시빈민들이 존재하며, 빈민의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워킹 푸어’, ‘하우스 푸어’라는 이름으로 빈곤의 절벽 끝에서 발버둥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양극화도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지난해 12월 통계청과 한국은행, 금융감독원이 공동으로 발표한 ‘2017년 가계금융·복지조사 결과’에 따르면 소득5분위 배율, 그러니까 상위 20%의 소득을 하위 20%의 소득으로 나눈 값이 7.06이나 됐다. 상위 20%가 하위 20% 보다 무려 7배나 더 벌고 있다는 의미다. 상대적 빈곤율은 2016년 17.9%로 전년 대비 0.1%p나 높아졌다.

지난해 출범한 문재인 정부는 이 커져만 가는 양극화를 해소해야 하는 과제를 짊어졌다. 문 대통령은 ‘소득주도 성장론’을 꺼내들었고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에 맞는 국민의 삶의 질 향상을 말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부르짖던 ‘낙수효과’는 끝없는 재벌의 탐욕으로 물 한 방울 떨어질 기미도 안보였고, 지난 2016년~2017년 촛불집회를 거치며 부의 집중에 대한 사회 인식도 많이 변했다.

▲ 매일경제 1월17일자. 1면.
이와 같은 상황에서 16일 보도된 매일경제의 1면 기사는 참담하기 그지없다. 매일경제는 ‘평창가는 첫 길목 ‘부끄러운 민낯’’ 제하의 기사를 1면, 그것도 톱기사로 배치했다. KTX가 동계올림픽이 열리는 강원도까지 가게 됐는데, 용산역을 거쳐 경의중앙선 노선을 따라가다 보면 판자촌을 보게 된다는 것, 매일경제는 놀랍게도 그것을 ‘부끄럽다’고 주장했다.

매일경제는 아래와 같은 표현을 썼다. “23일 앞으로 다가온 평창동계올림픽, 외국 선수단과 관람객이 몰려올 예정이지만 이들에게 서울은 부끄러운 민낯을 드러내야 한다”, “용산역을 지나자마자 열차 창문 밖으로 무너져가는 노후 주택과 녹슨 철제지붕, 폐타이어와 쪼개진 기왓장이 그대로 보인다. 멀리 보이는 한강트럼프월드 등 고층 빌딩들과 겹쳐지면 서울은 엄청난 빈부 격차를 지닌 도시로 보일 수밖에 없다”

매일경제는 빈곤에 몰린 우리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평창 동계올림픽에 방해가 되는 존재로 규정했고, 더 나아가 “한 달도 남지 않은 평창동계올림픽에 대비해 이 지역을 당장 정비할 방법은 없다”면서 “단기 대책으로 임시 펜스라도 설치해 서울 도심의 민낯이 드러나는걸 최소화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며 가려버리자고 주장했다.

80년대 군사독재 시절에나 벌이던 일을 우리나라 유력 경제지라 자평하는 언론이 아무 부끄럼 없이 주장하며, 심지어 이 기사를 1면 톱기사로 배치한 것이다.

언론이라면 사회의 문제를 해소하는데 일조해야 한다. 가려버린다고 해결될 문제가 결코 아니다. 하지만 매일경제는 빈곤의 문제를 해소할 의지도 없어 보인다. 매일경제는 해당 기사 옆에 ‘최저임금 쇼크 귀닫은 정부’ 제하의 기사를 함께 실었다. 최저임금은 월 157만원 수준, 서울은커녕 서울과 가까운 인근 수도권에서도 집값을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하지만 매일경제는 그 최저임금을 ‘쇼크’라고 주장했다. 그 돈의 몇 배나 되는 월급을 지급하는 매일경제는 지금 쇼크사 상태에 놓여있나?

매일경제에겐 빈곤이 부끄러운 것인지 모르지만, 있는 그대로의 것을 가려버리자는 발상은 나치 같은 독재체제에서나 있을법한 일이다. 이 황당한 발상을 바라보는 입장에선 오히려 매일경제가 한국 사회에서 언론의 역할을 자임하고 있다는 것이 부끄럽다. 가려야 할 것은 고단한 서민들의 삶이 아니라 오늘자 매일경제 1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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