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미국-멕시코 장벽' 모형 8개만 덩그러니.."트럼프 정신나간 짓"

입력 2018.01.17. 05:16 수정 2018.01.17.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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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미국-멕시코 국경을 가다
취임 직후 "장벽 추가" 행정명령
의회 반발로 예산 확보 안돼
장벽 모형만 세우고 진척 없어
샌디에이고와 티후아나 사이
국경 오가는 데 큰 제약 없어
철도 레일로 세운 철골 장벽이
태평양으로 20m 뻗어 있지만
아이들 자맥질로도 쉽게 월경
멕시코 경제 살아나자 월경 줄어
장벽 건설 효과에 회의적
"장벽은 백인우월 심리 반영일뿐"

[한겨레]

미국 샌디에이고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멕시코 티후아나의 최서쪽 해변가엔 바다 쪽으로의 월경을 막기 위해 장벽이 20m가량 바다 쪽으로 설치돼 있다. 지난 11일(현지시각) 한 현지인은 “여름엔 아이들이 자맥질을 하며 ‘자유롭게’ 미국을 오고간다”고 귀뜸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와 멕시코 바하칼리포르니아주 티후아나 동쪽 지역을 경계 짓는 2m 높이의 녹슨 건축용 철판들엔 구멍 뚫린 부분을 용접하거나 땅밑까지 철골을 파묻은 지역이 곳곳에 눈에 띄었다. 멕시코에서 미국으로 넘어간 ‘불법 월경’의 흔적들이다.

샌디에이고 쪽은 사막에 가까운 황무지이고, 티후아나 쪽은 빈민촌이다. 티후아나 장벽 쪽엔 주인을 잃은 듯한 검정개가 지나가는 낯선 이방인을 노려보고, 불에 탄 차와 폐타이어들이 여기저기 뒹굴어 국경의 삭막함을 더한다.

지난 11일(현지시각) 1달러를 주고 멕시코 쪽 티후아나 주택가에서 빌린 사다리에 올라 샌디에이고 쪽을 바라보니 휑한 들판에 8개의 미국-멕시코 장벽 모형과 간이화장실이 석양 속에 삭막하게 놓여 있었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지난해 10월말 8개의 장벽 모형을 미국 언론에 하루 동안 공개한 이후엔 접근을 금지하고 있어 멕시코 쪽에서만 볼 수 있다.

미국 샌디에이고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멕시코 티후아나의 최서쪽 해변가엔 바다 쪽으로의 월경을 막기 위해 장벽이 20m가량 바다 쪽으로 설치돼 있다.

미국 세관·국경보호국은 장벽 모형들을 대상으로 파괴, 오르기, 땅 파기를 막을 수 있는지 시험 과정을 거친다고 했지만, 의회에서 예산 지급을 하지 않아 사실상 ‘휴업’ 중이다. 언뜻 보기에 8개 모형은 미국 정부가 입찰기준으로 제시한 18피트(약 550㎝)는 넘는 듯했다. 미국 쪽에서 볼 때 미적으로도 아름다워야 한다는 입찰 조건은 희극적으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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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제 장벽을 사이에 두고 모형 장벽 바로 맞은편에 사는 멕시코인 귈예르미나 페르난데스(52)는 “지난해 8월부터 10월까지 모형을 설치한다며 아침 6시30분부터 오후 5시30분까지 소음이 심했다”며 “앞으로도 장벽을 설치하면 소음과 먼지가 많이 날 것”이라고 걱정했다. 페르난데스는 “마음만 먹으면 땅을 파고도 넘어갈 것이다. 사각지대도 꽤 많다. 내가 보기엔 아무 소용이 없다”며 “트럼프 대통령은 정상이 아니다. 장벽을 짓는 것은 정신 나간 짓”이라고 쏘아붙였다.

샌디에이고와 바다로 연결된 티후아나의 ‘우정 공원’ 지역을 가봐도 월경을 원천 봉쇄하는 것은 어려워 보였다. 철도 레일로 세운 장벽들이 육지 끝에서 바다까지 20여m 정도 이어져 있지만, 한 현지인은 “여름엔 아이들이 자맥질을 하며 ‘자유롭게’ 미국을 오고 가다 순찰대에 혼이 난다”고 귀띔했다. 장벽에 매단 파랑, 노랑, 빨강, 보라색 리본엔 “우리는 멕시코 장벽이 필요 없다”, “사랑이 증오를 이긴다” 등의 글귀가 쓰여 있어, 트럼프 대통령의 장벽 세우기에 대한 반감을 보여준다.

멕시코 티후아나의 최서쪽 해변가에 철도레일로 올린 장벽이 설치돼 있다. 지난 11일(현지시각) 찾은 장벽엔 매단 파랑, 노랑, 빨강색 리본엔 “우리는 멕시코 장벽이 필요없다”, “사랑이 증오를 이긴다” 등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장벽 세우기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는 글이 적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2016년 대선운동 때 멕시코인들을 “강간범”, “범죄인”이라고 부르며 “장벽을 세우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지난해 1월 취임하자마자 행정명령을 통해 국토안보부에 “즉시 국경 남쪽에 물리적 장벽을 건설하는 조처를 취하라”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멕시코 육상 국경은 약 3천㎞에 이른다. 빌 클린턴 행정부 때 22㎞ 정도로 시작한 장벽은 조지 부시 대통령 때인 2006년부터 설치가 본격화돼 이미 약 1천㎞엔 어떤 형태로든 장벽이 설치돼 있다. 나머지는 설치가 어려운 강과 산악 지역이다. 기존 장벽을 모두 허물고 새로 설치하겠다는 것인지, 의회가 예산을 승인할지도 여전히 미지수다. 그런데도 트럼프 대통령은 오는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지지층 결집을 위해 장벽 설치를 의도적으로 다시 밀어붙이고 있다. 그는 다음달 초 장벽 모형을 보러 샌디에이고에 온다.

지난 11일(현지시각) 멕시코 티후아나 지역에서 바라본 샌디에이고 지역에 8개의 미국-멕시코 장벽 모형과 간이화장실이 삭막하게 놓여있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지난해 10월말 8개의 장벽 모형을 미국 언론에 하루 동안 공개한 이후엔 접근을 금지하고 있어 멕시코 쪽에서만 볼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장벽을 세우겠다고 요란을 떨지만, 국경을 맞대고 있는 샌디에이고와 티후아나는 거의 공동생활권이나 마찬가지였다. 샌디에이고에서 5번 고속도로를 타고 남쪽으로 가면 여권이나 비자 심사도 없이 티후아나에 도달한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연결돼 있어 실수로 넘어가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멕시코에서 미국으로 복귀할 때도 여권과 비자만 보여주면 ‘어디 가느냐’, ‘위험한 물질은 없느냐’는 간단한 질문만 하고 통과시켰다. 캐나다에서 미국으로 건너올 때처럼 차량 트렁크를 검색하지도 않는다.

미국으로 국경을 넘어가는 서류 미비(불법) 이민자들은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까지 급격히 증가했다. 퀘이커봉사위원회 샌디에이고지부에서 이민자 지원 프로그램을 담당하는 페드로 리오스 국장은 지난 12일 <한겨레>와 만나 미국도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지적했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 1994년 발효되면서 멕시코 농산물이 미국 농산물과 경쟁할 수 없는 상황이 초래됐다는 것이다. 리오스 국장은 “미국산 커피와 옥수수가 멕시코산보다 훨씬 쌌다. 멕시코 농민들은 불법 월경 외에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없는 절박한 상태로 내몰렸다”고 말한다.

이용인 특파원이 국경 너머 멕시코 티후아나 주민과 이야기를 나누며 현지 상황을 취재하고 있다.

일용직 인력시장이 형성된 샌디에이고 근처 홈디포에서 지난 10일 만난 호르게 마르티네스(50)도 “그땐 멕시코에선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살인, 강도, 폭력이 일상적이었다. 일자리도 없었다”며 “미국으로 넘어올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일주일에 2~3일 정도 일을 구할 수 있는데 일당으로 90달러 정도를 번다”며 “미국 생활이 가난하지만 만족스럽다”고 말했다.

멕시코 경제가 회복되고 정치적으로도 안정되면서 불법 월경은 크게 줄어들었다. 세관·국경보호국 통계를 보면, 2000년 불법 월경 체포자는 160만명이었지만 지난해는 30만명 수준이었다. 멕시코의 한 외국계 공장에서 일하는 하비에르 산도발(49)은 “30년 전에 미국으로 넘어갔다가 2년 만에 멕시코로 되돌아왔다”며 “미국에서 돈은 벌어도 그만큼 많이 쓰게 된다. 친구들 7명과 함께 넘어갔는데 1~2명만 계속 미국에 남아 있고 거의 멕시코로 다시 넘어왔다”고 말했다.

서류 미비 이민자 수도 줄고 있고 엄청난 비용에 비해 효과가 떨어질 게 뻔한데도 트럼프 대통령이 ‘아름다운’ 장벽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결국 그의 인종주의적 세계관 때문이라고 리오스 국장은 비판했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은 멕시코인에 대한 공격과 무슬림 이민 제한 등에서 보듯이 분명히 백인우월주의 세계관을 갖고 있다”며 “트럼프 대통령의 이민정책은 미국 사회에서 수가 줄어드는 백인들이 자신들이 가진 권력을 유색인종에 나눠주지 않으려는 심리에 바탕을 둔 것”이라고 지적했다.

샌디에이고(미국)·티후아나(멕시코)/글·사진 이용인 특파원 yy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