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뮤지컬 '안나 카레니나', 안나의 폭풍 같은 격정에 지배된 무대..관객의 감정 투사될 '여백'은 아쉬움

유정인 기자 입력 2018. 1. 16. 21:35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경향신문]

뮤지컬 <안나 카레니나> 주인공 안나(옥주현)가 눈보라 속에서 새로운 사랑을 떠올리고 있다. 쇼온컴퍼니 제공

고전을 변주하는 것은 매력적인 일인 동시에 위험하다. 그 대상이 ‘완전무결’ ‘가장 위대한 소설’로 불릴 땐 더 그렇다. 레프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가 뮤지컬로 옮겨진다고 할 때, 많은 이들이 기대와 걱정이 뒤섞인 시선을 보낸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지난 10일 개막한 뮤지컬 <안나 카레니나>는 이런 혼재된 시선을 ‘러시아 고전의 가장 러시아적 해석’이라는 색다른 틀로 돌파하고자 한다.

러시아의 대표적인 뮤지컬 프로덕션 ‘모스크바 오페레타 시어터’가 제작해 2016년 자국 무대에 올린 작품이다. 해외에서 라이선스로 공연되는 것은 한국이 처음이다.

작품은 원작에 충실하되, 한편으론 충실하지 않다. 안나와 레빈의 대조적 삶을 두 기둥으로 삼은 원작과 달리 안나 이야기에 집중했다. 귀부인인 안나는 모스크바에 갔다가 젊은 백작 브론스키를 만나 주체할 수 없는 사랑과 욕망에 사로잡힌다. 남편 카레닌과 아들, 사교계의 규칙을 버리고 사랑에 뛰어들지만 그 길에도 완전한 행복은 없었다. 결국 그녀는 기차에 스스로 몸을 던진다. 톨스토이의 ‘정신적 자아’ 격인 레빈의 이야기는 상당부분 축소했다. 당대의 경제·정치·예술·종교 등 전 분야에 대한 통찰을 보여주는 레빈을 상징적 몇 장면으로 압축하면서, 깊이를 버린 대신 안나의 선택에 집중하게 만든다.

감정선은 미국 브로드웨이, 영국 웨스트엔드, 국내 창작 뮤지컬들과 확연히 다르다. 격정적인 감정이 극 전체를 지배한다. 시작부터 끝까지 강렬한 보드카를 떠올리게 하는 러시아적 풍미다.

휘몰아치는 눈보라에 놓인 것 같은 안나의 사랑과 불안, 절망은 보다 극적으로 표현된다. 원작의 담담하고 세밀한 필치보다는 강렬함, 역동성에 무게를 뒀다.

이 때문인지 관객의 감정이 투사될 만한 여백은 거의 없다. 가령 원작에서 브론스키를 ‘알아버린’ 안나가 기차역에 마중나온 남편을 보며 ‘귀가 저렇게 못생겼었나’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직접 말하지 않음으로써 드러나는 섬세한 감정의 변화는 그려지지 않는다. 사교계 규칙을 깬 안나를 배척하는 러시아 귀족계급의 ‘우아한 기만’은 “짐승만도 못해, 당장 나가”라는 목소리로 직선적으로 표현된다. 규칙의 틀에 가둘 수 없는 안나의 넘치는 생명력은 ‘아름다움’으로 좁혀 해석되는 듯하다.

작품의 미덕은 무대에 소환되는 러시아 그 자체다. 고전발레와 문학, 클래식음악의 중추인 국가답게 황량하면서 매혹적인 러시아의 겨울을 풍부하게 무대로 옮겨온다. 안나와 브론스키가 돌이킬 수 없는 사랑과 운명을 확인하는 기차역의 눈보라나 모스크바의 스케이트장이 대표적이다. 오페라극장에서 당대 유명가수 패티가 부르는 노랫말 “죽음 같은 사랑”의 아름다워서 더 위태로워 보이는 심상이 정점에 달한 안나의 고통과 대비되는 장면은 백미로 꼽을 만하다.

극의 처음과 끝을 장식하는 기차는 주제를 압축한다. 시계태엽처럼 맞물린 기차의 바퀴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의 상징인 동시에, 선로를 벗어나거나 뛰어들지 않도록 강제하는 인간의 규칙 전체를 상징하는 것으로 읽힌다. 기관사이면서 사회자 격인 MC는 계속해서 말한다. “신사숙녀 여러분, 규칙을 지키세요. 안 그러면 신의 심판을 받습니다.” 어디로 향하는 선로에 오를 것인지, 그 끝에는 과연 우리가 찾는 ‘행복’이 기다릴지,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2월25일까지.

<유정인 기자 jeongin@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