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공격적 다자주의'가 성공하려면

자키 라이디 파리정치대 국제관계학과 교수 입력 2018. 1. 16.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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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오른쪽에서 두 번째) 중국 국가주석과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지난 8일 중국 베이징에서 정상회담을 갖고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사진 : 연합뉴스>

지난해 12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열린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의는 완벽한 실패로 끝이 났다. 안건이 많은 것도 아니었지만 회원국은 공동성명을 발표하지 못했다.

이번 회의의 실패에 대한 반응은 나라마다 다르다. 미국이 WTO 각료회의의 실패를 자축하는 동안 중국은 침묵을 유지했다. 홀로 불만을 표시하고 있던 유럽에만 나쁜 뉴스였다.

미국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편협한 보호무역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다자협정은 미국에 불리하다”고 공개적으로 말하고 있고, 미국의 관리들은 WTO 이전의 분쟁 해결 절차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국이 다자주의에서 멀어질수록 유럽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여러 전문가들이 유럽이 국제 경제 무대에서 더 강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고 보는 이유다. 실제로 유럽은 리더십을 발휘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최근 유럽연합(EU)과 일본이 맺은 경제협력협정(EPA)은 일본 농산물 시장에서 유럽이 미국에 비해 우위에 설 수 있게 해줄 것이다. 또 미국이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재협상에 나섰기 때문에 유럽이 멕시코와 경제 협력을 강화할 수 있는 기회도 생겼다.

이런 기회를 더 잘 살리기 위해서는 유럽이 중국과 협력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WTO 각료회의에서는 침묵을 지켰지만, 사실 중국은 다자주의(multilateralism)의 리더십을 차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중국과 유럽의 파트너십은 미국이 국제 무역에 끼치고 있는 부정적인 영향을 상쇄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 될 것이다.

미국의 WTO 탈퇴는 유럽에 악몽

문제는 이런 파트너십이 성사될 수 있을지가 미지수라는 점이다. 유럽과 중국 모두 국제화와 다자주의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이기는 하지만, 구체적인 입장에는 차이가 있다. 유럽은 ‘공격적인 다자주의’를 지향한다. 다자주의를 강화하기 위해서 기존의 규칙이나 제도를 바꾸는 데 적극적이다. 반면에 중국은 그런 변화에 소극적이다.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데 도움이 되는 규칙이나 제도라면 더욱 바꿀 생각이 없다.

유럽은 다자주의를 위한 공동의 규칙을 중국이 준수하기를 바란다. 이런 측면에서는 오히려 유럽이 미국과 같은 입장이다. 미국과 유럽은 중국이 사기업에 지속적으로 보조금을 지급하고, 시장 진입장벽을 유지하는 데 비슷한 불만을 가지고 있다.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중국 정부가 세운 시장 진입장벽은 EU 수출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유럽과 미국은 서로 다른 해결책을 내놓고 있다. 유럽은 중국이 WTO 법률과 제도를 악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 기존 법률과 제도를 개정하려고 한다. 양자 협정이나 복수국간 협정을 통한 방법들도 거론된다.

반면에 미국은 시스템 자체가 침몰하도록 내버려 두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내리는 정책 결정을 보면 미국이 WTO를 이탈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본다. 만약 미국의 WTO 탈퇴가 현실이 된다면 EU에는 악몽이 될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전임자였던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자기만의 해결책이 있었다. 그는 아시아 국가들과 맺은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이나 EU와 협상을 진행한 범대서양 무역투자동반자협정(TTIP) 같은 새로운 다자간 프레임워크를 통해 중국으로 하여금 국제 무역에서 (자국의 이익을 챙기려는) 술책을 쓰지 못하도록 하려고 했다. 이런 시도가 성공적으로 이뤄졌다면 중국이 새로운 국제 무역의 기준을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뒤에 남겨지도록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는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오바마 전 대통령은 자신의 임기 내에 두 협정을 마무리지으려고 조급하게 굴었고, 이런 조급함이 유럽에서는 우려를 낳았다. 유럽에서는 TTIP가 환경과 위생 규제를 약화시킬 수 있다는 문제제기가 나왔다. 협상 과정의 투명성도 문제로 제기됐다. 결국 유럽의 지도자들은 시민사회의 우려를 감안해 TTIP 협상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 없었다.

국제 무역에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미국과 EU가 이런 노력을 재개해야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집권하는 동안에는 불가능할 것이다.

EU, 한목소리 내는 게 최우선 과제

앞으로 유럽은 큰 난관에 봉착할 것이다. EU는 애초에 하나의 국가가 아닌 만큼 무역을 비롯한 국제 경제 문제에 대해서 하나의 통일된 의견을 내놓는 것이 힘들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끄는 미국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영향력을 십분 활용하려고 할 것이 분명하다. 현실 정치에 기민하게 반응하는 중국이 의견을 통일하지 못하는 유럽 대신 미국의 목소리에 귀를 더 기울일 것으로 보는 건 당연한 예상이다.

이런 현실에서 EU가 가장 우선순위에 둬야 할 건 회원국의 의견을 통일하는 것이다. 회원국 간 입장이 정리돼야 미국이 세운 장벽을 넘어서 중국에 대응할 수 있는 공동 시스템을 설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중앙유럽과 동유럽에서 ‘반자유주의’의 기치를 내세운 정부가 출현하면서 문제가 더 복잡해지고 있다. 이들 정부는 자신들만의 이익을 추구하기 때문에 어떤 형태의 다자주의에도 관심이 없다. 그들은 트럼프나 시진핑, 푸틴이 옹호하는 현실 정치에 더 매료돼 있다. 이런 나라들은 조달과 관련한 EU의 규정을 무시하면서까지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한다. 중국으로부터 막대한 투자를 받은 그리스 같은 국가들이 대표적이다.

분명히 말하자면, 유럽 국가들은 중국의 투자를 환영해야 한다. 동시에 중국도 자국에 대한 유럽의 투자를 따뜻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EU와 중국은 몇 년의 시간을 투자하고도 눈에 띄는 진전을 보이지 않고 있는 양자 간의 투자 협정을 마무리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 이 협정은 중국이 자국 시장에 대한 진입장벽을 완화하는 것을 포함해야 한다.

지난해 취임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공격적인 다자주의를 전파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EU 전체가 함께 노력하지 않는다면 마크롱의 시도는 성공을 거두기 어렵다. 다자주의에 대해 보수적인 입장을 가진 중국과 다자주의를 없애려고 하는 미국 사이에 끼여 유럽만 다칠 수 있는 것이다.

▒ 자키 라이디(Zaki Laidi)
파리정치대 유럽학연구소장, 마뉘엘 발스 전 프랑스 총리 고문, ‘유럽의 쇠퇴’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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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대서양 무역투자동반자협정(TTIP) 미국과 유럽연합(EU)이 2013년부터 추진하고 있는 자유무역협정(FTA)이다. TTIP가 체결되면 EU는 연 1370억달러, 미국은 연 1091억달러의 경제적인 효과를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 사실상 협상이 중단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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