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뜻밖의 '배우 이미지' 벗으려 유학갔다가 '다문화' 눈떴죠"

입력 2018.01.16. 20:36 수정 2018.01.17.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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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짬】 다문화교육 엔지오 ‘호프 키즈’ 박정숙 단장

다문화 어린이 문화교류 네트워크 호프 키즈를 10년째 꾸리고 있는 방송인 박정숙씨.

남들은 새로 생긴 골칫거리로 여겼다. 10년 전이다. 바로 다문화가정의 아이들이었다. 주로 동남아시아에서 온 젊은 신부들과 이 땅의 나이 든 총각이 결혼했다. 한국말도 한국 문화도 잘 모르는 어머니 아래서 자라는 어린이들은 교육현장에서 소외되기 쉬웠다. ‘어머니의 정보력이 진학을 좌우한다’는 한국의 교육현실에서 그들은 사회 진입 단계부터 뒤처져야 했다.

방송인 박정숙(47)씨는 남들과는 다른 생각을 했다. 그들을 ‘호프 키즈’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이 한국이 보유한 ‘희망의 아이들’이라는 것이다. 역발상이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한국의 희망이 되는 자질을 불어넣어주기 시작했다. 다문화교류 네트워크 ‘호프 키즈’를 꾸리고 단장을 맡고 있는 박씨가 다문화가정의 아이들에게 희망의 불씨가 되게 하는 방법은 현실적이었다.

엠시 활약중 드라마 ‘대장금’ 출연
‘문정왕후’ 단역에도 인기 유명세
뉴욕 건너가 컬럼비아대서 국제학 석사
“이방인 실감·다문화 중요성 깨달아”

2008년 귀국 ‘호프 키즈’ 창단 앞장
다문화가정 아이들 ‘문화체험’ 제공

“아이들이 학교에서 가져온 알림장도 읽지 못하는 어머니가 많았어요. 그러니 아이들은 준비물도 챙길 수가 없고, 숙제도 제대로 못했어요. 그래서 멘토들을 다문화가정에 보내기 시작했어요. 일대일로 만나 알림장도 읽어주고, 공부도 가르쳐주었어요.” 바로 네트워크였다. 멘토들은 주로 다문화가정과 가까이 사는 고등학생이었다. 멘토들은 다문화가정의 아이와 어머니에게 한글도 가르치고, 알림장의 내용을 설명해줬다. 멘토들은 학교에서 요구하는 봉사활동의 하나였으니 서로가 도움이 되는 만남이었다. 이렇게 ‘찾아가는 공부방’의 도움을 받아 대학에 진학한 다문화가정의 자녀들이 이제는 스스로 멘토가 되고 있다.

박 단장은 다문화가정의 아이들이 문화적 소양을 갖추게 하는 데도 노력했다. 예술의 전당에서 <호두까기 인형> 뮤지컬을 하면, 리허설 시간에 아이들을 무료로 초대했다. 때론 오케스트라 공연도 보여줬다. 그의 취지에 호응하는 문화계 인사들이 도움을 줬다. 각종 문화활동 기회를 사이버 공간에 올리면, 1만여명의 다문화교류 네트워크 회원들이 그 기회를 잡았다. 어린이 축구교실을 열고, 전국의 다문화어린이축구단이 참가하는 대회도 연다. 프로선수들이 어린이들에게 축구 기술을 가르치기도 한다.

“다문화가정의 아이들에게 ‘어릴 때 사회로부터 대접을 받았다’는 인식을 심어주고 싶었어요. 이 땅에서 소외받지 않고 컸다는 것이 그들이 이 땅에 당당히 자리잡는 데 큰 도움을 줄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여전히 만만찮다. “아빠는 없고 엄마는 직장에 나가서 혼자 밥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하고 집에 방치된 아이도 많았어요. 어떤 아이 엄마는 이혼소송을 당하고도 한국말을 할 줄 몰라 제대로 대응도 못했어요. 통역을 도와줬어요.”

박 단장이 다문화가정의 어린이들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바로 드라마 <대장금> 때문이었다. 전세계 한류의 시초로 꼽히는 드라마이자 그의 인생에도 전환점이었다.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그는 1993년 대전엑스포 홍보사절로 선발된 뒤 졸업과 동시에 지상파 방송에서 엠시(MC)로 자리잡았다. 한창 방송인으로 활약하던 그에게 2003년 뜬금없이 연기자의 길이 열렸다. <대장금> 연출자 이병훈 피디가 ‘문정왕후’로 캐스팅한 것이다. 처음엔 단역에 가까웠으나, 시청률이 50%를 넘어가면서 그의 배역도 커졌다. 단 한편의 드라마 출연이었지만, 그 여진은 컸다. ‘배우’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그는 훌쩍 유학길에 올랐다. 미국 뉴욕의 컬럼비아 대학원에 유학하면서 그 자신 이방인 또는 외국인으로서 ‘다문화사회’를 실감했다. 미국과 일본에서 박사 과정을 밟던 그는 2008년 귀국한 뒤 다문화가정 문제가 한국 사회에서 점점 중요해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동서 냉전 시대가 끝난 뒤 국제적으로 벌어진 갈등의 배경에는 기존 사회와 이주민 사이의 갈등이 자리잡고 있어요. 그런 사회적인 분노와 서운함이 커다란 폭력문제로 비화되곤 했어요. 이미 한국 초등학생 10명 중 1명이 다문화가정의 자녀인 지금 좀 더 적극적인 관심이 필요해요.”

박 단장은 요즘 다문화가정의 아이들이 4차 산업혁명의 흐름에 뒤지지 않게 프로그램을 만들어 보급하고 있다. 정보통신기술(ICT) 플랫폼 기반으로 아이들에게 ‘스팀(STEAM) 교육’을 확장하는 것이다. ‘스팀’은 과학(S)·기술(T)·공학(E)·예술(A)·수학(M)의 머리글자를 딴 것으로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아우르는 융합교육을 말한다. “새로운 분야에 대해 조금씩이라도 맛보게 하면 미래를 두려움 없이 맞아할 수 있어요.”

‘호프 키즈’의 성장에 박 단장의 순수한 열정이 자리잡고 있다.

글·사진 이길우 선임기자 nih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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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22. 09:23 기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