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보니]SRT 청소원들은 왜 열차에 인사를 할까?
[경향신문]
“왜 열차 껍데기인 쇳덩어리를 향해 인사를 하나. 이건 예의도 아니고 친절도 아니고 겸손도 아니다.”
경향신문 독자 박준규씨는 최근 페이스북에 사진 한 장과 함께 글을 올렸습니다. 경부선과 호남선 노선을 운영하는 민간 고속열차 SRT를 이용하면서 마음이 불편한 장면을 봤기 때문입니다. 그가 불편하다 생각한 건 열차가 종점인 수서역에 들어오자 미리 대기하던 청소노동자들이 고개 숙여 인사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인사하는 분들은 객실을 정리정돈하는 용역회사 직원들이다. 모두 중년의 여성노동자들이다. 보통 8량 열차라서 열차가 들어올 시간이 되면 8명이 객차 길이 간격으로 도열한다. 기관차가 20미터 정도 앞에 다가오면 허리를 구부려 공손하게 인사한다. 기차가 멈출 때까지 인사는 거듭된다.”
어떤 장면일지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집니다.
■청소노동자에게 인사까지 시키는 갑질?
“처음엔 장거리 운행하느라 고생한 기관사에게 드리는 헌사의 성격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기관차가 자신 앞을 지나가도 움직이는 객차를 향해 연신 허리를 구부린다. 지나친 행위다. 노동자의 자아에 심적 압박을 가하는 걸로 보인다. 친절과 겸손을 강제함으로써 사실상 노동자의 차별에 순응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는다고 본다.”
박씨는 지적은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었습니다. “과잉 친절로 오히려 기분만 상한다”고 토로한 그의 글과 사진이 퍼지면서 비슷한 의견이 줄을 이었습니다.
“고객 친절이라는 허울을 뒤집어 쓰고 실제론 아무 쓸 데 없는 갑질을 하고 있는 거다” “인사를 하려면 경영자들이 나와서 해야지 왜 관리자들이 해야 할 일을 힘없는 노동자들에게 강요하나” “청소하시는 분이 무슨 노예도 아니고 왜 저렇게까지 하는지 모르겠다” “청소노동자에게 감정노동까지 강요하는 미개한 발상이다” ”봉건적이다. 화가 난다” “사람 위에 사람 없다”
일부는 불합리한 인사 관행을 고쳐달라는 내용의 항의 민원을 넣자고 주장했고, 실제 업체 홈페이지에 글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왜 인사 안 하냐” 반대 민원도 있었다
SRT를 운영하는 주식회사 SR 측도 이 문제를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SR 관계자는 “열차가 들어올 때 청소하는 분들이 인사를 하는 건 맞다”면서도 “열차에 대고 인사를 하는 게 아니라 타고 계신 고객들을 환영하는, ‘손님맞이’의 의미로 인사하는 것”이라고 해명했습니다.
그러면서 SR 측은 “과거에도 이번과 비슷한 항의가 있어 1~2개월 정도 청소노동자들의 인사를 중단시킨 적이 있었다”고 밝혔습니다. 그럼 왜 다시 문제의 인사가 시작된 걸까요. ‘인사를 왜 안 하냐’는, 반대의 민원이 더 많았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그렇게 공손하게 서비스 한다고 홍보는 다 해먹고 이제는 왜 안 하냐’ ‘벌써 변한 것 아니냐’는 식의 민원 제기가 더 많아 여론 수습을 위해 인사를 재개했다는 겁니다.
■인사를 ‘차별화된 서비스’로 제안한 업체
취재 결과 청소노동자들의 인사 문제는 단순히 고객 반응에 달린 것만도 아니었습니다. 인사는 객실 청소를 담당하는 용역업체와의 계약서에도 명시된 공식 업무의 하나였습니다.
2016년 12월 코레일이 독점하던 철도시장에 뛰어든 SRT는 경쟁력 확보를 위해 초기부터 ‘차별화된 서비스’를 강조했습니다. SR이 진행한 외부 공모에 한 업체가 ‘일본 철도처럼 깔끔하고 정연한 청소 서비스’를 제안했고, 이것이 채택돼 결국 입찰을 따냈습니다.
이 업체는 ‘차량관리원’이라 불리는 청소노동자들이 깨끗한 유니폼을 입고 전문 청소장비를 이용해 15분 만에 열차 청소를 완벽하게 마친다는 ‘15분 서비스’를 내세웠습니다. 열차 도착 때 청소노동자들이 도열해 일제히 하는 인사도 계약서의 ‘과업 범위’에 포함시켰습니다. 일종의 ‘고급 서비스’인 셈인데, 이를 위해 SR은 업체 측에 통상보다 비싼 용역료를 지불했다고 합니다.
SR 측은 일단 이 문제를 원점에서 다시 검토해보겠다는 입장입니다.
SR 관계자는 “청소노동자들의 인사를 일방적으로 중단하는 것은 엄밀히 보면 ‘계약 위반’ 소지가 있다”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고객들이 의견을 주시고 있는 만큼 결론을 열어놓은 상태에서 해당 문제를 다시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김형규 기자 fideli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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