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호미 대신 노트북 들고.. 꿈꾸던 통나무집에서 살죠

남해·부여·공주/박근희 기자 입력 2018. 1. 12. 04:00 수정 2018. 1. 12.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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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 전원일기]
[Cover story] 농사 대신 카페·공방.. 소박한 시골라이프 즐기는 젊은 귀촌인

"처음엔 이상한 눈으로 보는 마을 어르신들도 계셨어요. 한창 일할 나이 젊은 사람이 땅끝마을인 남해, 그것도 이 촌(村) 구석엔 왜 내려왔느냐는 분위기였죠. 귀촌 3년 차가 된 지금은 마을에 젊은이들이 몇 없으니 물탱크 청소 등 힘 쓰는 일에 종종 동원되곤 한답니다. 촌엔 왜 내려왔느냐고요? 느리게 사는 촌이 좋아서, 촌스러운 게 좋아서요."

경남 남해군 남면 석교리, 조용한 마을 안쪽에 자리 잡은 가게 'B급상점'의 주인 우세진(40)씨가 매장 안 화목난로에 땔감을 넣으며 말했다. 땔감이 차가운 공기를 연소시키며 타닥타닥 타들어갈 때마다 난로 위 노란 주전자 주둥이에선 따뜻한 김이 폭폭 소리를 내며 피어올랐다. 이따금 격자창의 미닫이문을 열고 손님들이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들어왔다. 남해 여행하다 일부러 들른 커플이나 가족부터 이웃 마을 아낙네들까지 B급상점의 문턱을 넘는 이들은 다양했다. 멀리 찾아온 손님들에게 우씨는 별말 없이 따뜻한 보이차 한 잔씩 따라 건넸다. 창고를 개조한 B급상점에서 우씨는 나무를 깎아 도마를 만들어 팔고, 그의 아내인 한송이(34)씨는 향초를 만들어 판다. 여기에 남해에 사는 젊은 작가들과 협업해 만든 기념품과 우씨가 고른 책, 한씨가 고른 소품들로 B급상점을 채웠다. 손님이 뜸해진 시간엔 우씨는 새로 진열된 상품이나 매장과 동네 풍경 등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리고 마을에 버려진 장작이나 나무 팔레트, 가구 등을 가져와 쓸 만한 소품으로 만든다. 한씨는 그 옆 농가에서 살림을 하고 아이들을 돌본다. 틈틈이 인터넷 도매사이트에 들어가 매장에 갖출 상품들을 그때그때 주문하는 것도 MD 담당인 한씨의 몫. "요즘은 '로켓배송'이 있어 시골이어도 주문 후 1~2일이면 택배로 받을 수 있다"며 웃는다. B급상점은 지난해 9월 문을 열어 이제 오픈 4개월 차에 접어들었지만 인스타그램, 블로그 등을 통해 소문나면서 겨울에도 하루 20~30팀이 찾는 남해 여행 인기 코스가 됐다.

서울 토박이인 우씨는 귀촌 초창기에 이곳 주민들의 주업인 시금치 유통·경매, 멸치잡이일을 했다. 하지만 몸에 익지 않은 일을 하니 금방 탈이 났다. 여러 시행착오를 거치며 부부는 시골에서도 잘할 수 있는 일,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B급상점을 열었다. "솔직히 도시에서 잘나가는 친구들 보면 '나만 뒤처지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날도 있는데 이제는 어디에서 사느냐보다는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우씨는 "도시에 살 때에 비하면 벌이가 넉넉한 것은 아니지만 고물가에 높은 월세, 경쟁 치열한 도시에선 감히 시도조차 해보지 못한 일들을 차츰 시도해보며 살고 싶다"고 했다. 답이 도시에만 있는 것은 아니란 얘기다. 우씨처럼 경쟁의 속도에 지쳐 팍팍한 도시를 뒤로하고 시골로 향하는 젊은 귀촌인들이 최근 들어 늘고 있다. 통계청이 지난해 6월에 발표한 '2016 귀농어·귀촌인 통계'에 따르면 2016년 기준 귀촌인은 47만5000여 명, 귀촌인 평균연령은 40.6세이고, 전체 귀촌인 중 30대 이하가 차지하는 비율은 이미 절반을 넘어섰다.

한때 전원(田園)은 은퇴 후 삶의 종착역 즈음에 찾는 공간이나 안식처로 인식됐지만 젊은 귀촌인들에겐 새로운 도전 무대, 대안적 삶의 공간이다. 이들은 농사에 목숨 거는 대신 농가를 개조해 민박, 카페를 꾸미거나 공방, 작업실을 만들어 서둘러 인생 2막을 준비한다. 거창한 성공을 꿈꾸는 2막이 아닌 '시골 라이프'를 즐기며 소박한 삶을 영위하는 2막이다. 조용하다 못해 적막한 농한기에 전원 풍경을 바꿔놓고 있는 젊은 귀촌인들의 신(新)전원일기를 펼쳐봤다.

조훈(왼쪽)·김수진씨 부부가 충남 부여군 규암면 합송리로 귀촌해 운영하고 있는 카페‘합송리 994’에서 마주 보며 웃고 있다. 부부는 낡은 한옥을 직접 고쳐 핸드드립 카페를 열었다./양수열·임영근 영상미디어 기자

호미 대신 노트북 들고 시골로

웹툰 '풀 뜯어먹는 소리'의 작가 주태희(39)·김주영(37)씨 부부는 4년 전인 2014년 호미 대신 달랑 태블릿PC와 노트북을 '장전'하고 충남 공주 유구읍의 한 귀촌마을로 내려갔다. "평소 시골살이에 대한 동경도 있었지만 생각해보니 도시에서 높은 집값, 고물가에 시달리며 팍팍하게 살아야만 하는 이유도 없었다"는 게 부부의 얘기. "인터넷만 된다면 어디서든 살 수 있는 세상"이라고 생각했단다. 부부는 도시에서 전셋집 구할 돈으로 꿈꿔 오던 통나무집을 얻었다.

귀촌인들을 대상으로 조성된 귀촌마을로 들어간 덕분에 귀촌 초기에 있을 수 있는 원주민과의 갈등 없이 정착에 성공할 수 있었다. 부부는 먹고살 궁리를 하다 자신들의 귀촌 정착기를 웹툰으로 만들었다. 귀촌해서 정 할 게 없으면 정말 풀이라도 뜯어 먹고 살자는 비장(?)한 마음으로 웹툰 '풀 뜯어먹는 소리'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웹툰은 귀촌에 대한 관심 증가로 연재 때마다 당일 조회 수 25만~30만 건을 기록할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고 최근 시즌3까지 완결했다.

"귀촌해 아이가 생기고 나니 솔직히 교육환경이나 도시의 편의시설이 아쉬워지기도 하더라"는 김씨는 "도시에서 두 사람이 직장 다닐 때만큼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것은 아니지만 큰 욕심을 내지 않으니 삶의 질은 높아졌다"며 웃었다. 육아 때문에 부모님까지 덩달아 귀촌하면서 현재 부부의 통나무집엔 3대가 함께 살고 있다.

조훈씨가 현대에 맞게 직접 고친 카페 ‘합송리994’의 주방에서 아내 김수진씨가 커피를 내리고 있다./양수열·임영근 영상미디어 기자

각각 대기업 직원, 종합병원 심리치료사로 일했던 허홍(34)·이소연(36)씨 부부는 아이와 함께 2015년 1월 이씨의 고향인 경북 문경으로 귀촌했다. 처음 1년 동안은 문경 외곽에서 전원생활을 하며 건강을 돌보다 도시와 시골의 정서, 풍경이 적절히 섞여 있는 시내로 옮겼다.

'블루밍로스터리'란 간판을 단 곳에서 남편은 카페를 운영하며 원두를 로스팅해 납품하고, 아내는 '시들지 않는 꽃'이라 불리는 프리저브드 플라워로 오르골 등을 만들어 온·오프라인으로 판매하고 있다. 프리저브드 플라워 클래스도 운영하는데 문경 인근 지역 문화센터에서 쉽게 만나볼 수 없는 수업이라 인기가 많단다. 수입 구조가 어느 정도 안정적으로 접어들면서 얼마 전 2층짜리 건물을 인수했고, 1월 중순 확장 이전할 계획이다. 오래전부터 자신들만의 브랜드를 만들고 싶었다는 이씨는 "대도시에선 창업이라는 도전 자체가 부담스러울 수 있었는데 비교적 부담이 적은 지방 소도시에서 시험 기간을 거쳐 조금씩 꿈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고 했다.

①충남 공주 유구읍으로 내려가 귀촌을 소재로 한 웹툰‘풀 뜯어먹는 소리’를 연재하고 있는 김주영(왼쪽)·주태희씨 부부. ②경남 남해군 남면 석교리에 편집숍인 ‘B급상점’을 차린 우세진(왼쪽)·한송이씨 부부. ③김주영·주태희씨 부부가 사는 공주 귀촌마을의 통나무집./양수열·임영근 영상미디어 기자

저성장 사회의 새로운 풍경, '新귀촌시대'

'한창 나이'에 촌으로 향하는 도시인들이 눈에 띄게 늘었다. 블로그와 인스타그램엔 최근 1~2년 사이 '귀촌일기' '시골 라이프'를 주제로 한 글과 동영상들이 속속 올라온다. 정착지도 수도권 인근인 경기 지역뿐만 아니라 전국구다. 은퇴 세대나 은퇴를 앞둔 세대의 비율이 높은 귀농과 달리 귀촌은 특히 20~30대 젊은 층의 이동이 두드러지는 건 사회·문화 현상과 관련이 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젊은 귀촌인' 증가 현상에 대해 '높은 청년 실업률'과 '라이프스타일의 다양화'에 따른 것이라고 분석했다. "대도시에 초밀집해 살아가는 우리나라는 구조적으로 노동시장 진입 장벽이 높다. 저성장 사회에서 높은 청년 실업률을 경험한 20~30대가 대안 공간으로 대도시 대신 시골에 눈을 돌리게 됐다"는 설명이다. 구 교수는 또 "도농 간의 격차가 줄어들고 자연 친화적이고 건강한 생활양식을 추구하는 미국식 '킨포크(Kinfolk) 라이프', 소박한 삶의 여유를 즐기는 덴마크식 '휘게(Hygge) 라이프' 등이 인기를 끌면서 시골식 소박한 삶을 동경하는 젊은 층이 늘었다"고 설명했다.

성공한 삶에 대한 인식 변화가 영향을 미쳤다는 견해도 있다. 김귀영 귀농귀촌센터장은 "예전엔 '성공'이란 개념이 '대도시에서 좋은 대학 나와 대기업에 다니는 것'으로 인식됐지만 요즘 세대는 '자신을 위해 단순하면서도 행복하게 사는 것'도 성공이라고 인식한다"며 "성공에 대한 가치 변화가 탈도시화의 촉매가 되는 것 같다"고 했다.

경북 문경에서 로스터리 카페 겸 꽃공방 ‘블루밍로스터리’를 운영하는 허홍·이소연씨 부부. /이소연

'도피성 귀촌'은 곤란, 맞는 일 찾아야

경쟁 심한 도시에서 벗어나 시골로 갔다고 해서 반드시 도시보다 나은 삶을 누리는 것은 아니다. "귀촌 초기엔 소득이 아예 없을 때도 있어 낯선 환경에 경제적 압박까지 받아 이중고를 겪을 수 있다"는 게 귀촌인들의 공통적인 의견이다.

충남 부여군 규암면 합송리에서 한옥카페 '합송리994'를 운영하는 귀촌 7년 차 부부 조훈(51)·김수진(48)씨는 "2012년에 처음 전남 해남으로 귀촌해 3년간 살면서 단순 노동인 지역 농사나 소일거리에 참여도 해봤는데 쉽지 않더라"며 "결국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모색해 잘할 수 있는 일로 정착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조씨는 서울 중심가에서 카페를 운영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핸드드립을 전문으로 하는 한옥 카페를 열었고, 아내 김씨는 취미였던 뜨개질로 니트 제품을 만들어 블로그를 통해 판매한다. 부부는 "두 사람이 대기업 다닐 때만큼의 벌이를 기대하긴 어렵지만 도시에서 누리던 것을 모두 누리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안분지족하니 삶의 질은 자연스럽게 높아졌다"며 웃었다.

집이 있다면 민박업에 등록해 민박을 운영하거나 숙소 공유 플랫폼인 '에어비앤비(Airbnb)' 호스트에 도전해 보는 것도 방법이다. 3년 전 제주로 귀촌해 숙소 공유를 하는 김지민(35)씨는 "목가적인 분위기의 빈 농가를 저렴하게 임차·개조해 숙소를 공유하면 정착 초기 비용에 대한 부담을 줄일 수 있다"며 "인스타그램과 블로그만 잘 활용해 알리면 찾아오는 사람이 꽤 된다"고 귀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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