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혜광고, 박종철 이름 꺼내면 선생님이 끌고가.."

이은지 2018. 1. 10.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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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입학 박상현씨 "추모시 썼다가 선생님에게 많이 맞아"
혜광고 28기 동기회, 22년만에 박종철 추모비 건립 이끌어내
동기들 "영화 1987에 인간 종철이의 따뜻한 모습 없어 아쉬워"
━ “1987년 혜광고에서 ‘박종철’은 금기어였다”…후배의 증언
혜광고 28기인 변종준, 김상준 씨와 37기인 김승주 씨(사진 왼쪽부터)가 지난 4일 만나 박종철 열사와의 추억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은지 기자
“1987년 1월 고문치사로 숨진 대학생이 혜광고 선배라는 것을 곧 알았지만, 이후 혜광고에서 ‘박종철’은 금기어였습니다.”

1987년 3월 혜광고에 입학한 박상현(48) 씨는 1학년 내내 고 박종철 열사의 이름을 입 밖에 꺼내지 못했다고 한다. 박 씨는 10일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박종철 이름을 꺼내면 선생님들이 방송실로 끌고 가 심하게 구타했다. 이런 상황이 몇 번 반복되자 박종철은 금기어가 돼 버렸다”고 말했다. 그는 “선생님들이 학생들이 민주화 시위에 참여할까 봐 아주 민감하게 반응한 것 같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문예부였던 박씨는 1987년 12월 박종철을 기리는 추모시를 썼다가 심한 체벌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선배의 희생정신을 기리고 싶어서 연말 ‘문학의 밤’에 낭독하려고 추모시를 썼지만, 이 사실을 안 문예부 담당 선생님께 끌려가 엄청나게 맞았다”며 “추모시는 갈기갈기 찢어졌고, 문학의 밤에 참석할 수도 없었다”고 기억했다

지난해 7월 박종철 장학금을 받은 혜광고 재학생 6명이 박종철 기념비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 혜광고 28회 동기회]
아이러니하게도 선생님의 억압이 강해질수록 학생들의 저항의식은 더욱 강해졌다. 박씨는 “친구들끼리 광주항쟁 비디오를 보고, 리영희 선생의 강연을 들으러 다니면서 사회문제에 눈을 떴다”며 “박종철 선배를 위해 뭔가 해보자는 생각에서 88년부터 1년간 학교 측과 싸워 전국 최초로 ‘학생회장 직선제’를 쟁취해냈다”고 말했다.

이 때문인지 혜광고를 시작으로 다른 고등학교에서도 학생회장을 직선제로 선출하는 곳이 속속 등장했다. 박씨는 “박 열사를 기리는 추모비 건립을 추진하려 했지만 학교 반대가 너무 심해 엄두를 내지 못했다”고도 했다.

박 열사 추모비 건립은 박종철 동기들이 해냈다. 박 열사와 가장 친했던 변종준(55)씨의 제안으로 1992년 동기회가 꾸려졌다. 동기회장은 추진력이 뛰어난 김상준(55) 씨가 맡았다.

그러나 군부 독재에 이어 1993년 문민정부가 출범했지만 시대 분위기는 여전히 엄혹했고, 추모사는 할 수 없었다. 변 씨가 박 열사를 기리는 추모사를 혜광고의 공식 행사에서 한 것은 동기회가 발족한 지 20년이 흐른 2002년이 처음이었다.
최초로 언론에 공개되는 박종철 열사(오른쪽 두번째)사진. 고교 시절 친구들과 찍었다. [사진 변종준 씨 제공]
이때부터 추모비 건립 운동이 본격적으로 펼쳐졌다. 학교 측이 ‘추모비는 우상숭배’라며 끝까지 반대하자 혜광고 동기와 후배 등이 매일 새벽부터 학교 앞에서 침묵시위를 이어갔다. 결국 2004년 학교 측은 흉상 대신 비석으로 된 추모비 건립을 받아들기에 이르렀다.

박 열사 동기회는 2010년부터 매년 혜광고 재학생들에게 박종철 장학금을 전달하고 있다. 후배들이 박종철을 잊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동기는 물론 선·후배가 십시일반 모은 돈이다. 지금까지 50여명의 후배가 장학금을 받았다.

박 열사의 죽음은 혜광고 선후배들의 삶을 모두 바꿨다. 김상준 혜광고 28기 동기회장은 1990년 학생운동에 뛰어들어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집행유예를 받기도 했다. 사회운동에 관심이 전혀 없던 변 씨 역시 ‘박종철 기념사업’을 추진하다 보니 어느덧 ‘민주열사’가 됐다고 한다.

지난 2일부터 시작된 서울 용산구 남영동 대공분실을 시민의 품으로 되돌려 달라는 국민청원운동도 28기 동기회가 주도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박 열사가 고문을 받다 사망한 곳이다.

변 씨는 “종철이는 집이 넉넉하지도 않았지만 새로 산 오리털 파카를 추위에 떨고 있는 노숙자에게 줄 만큼 마음이 따뜻한 친구였다”며 “한편으로는 학생운동 하던 서울대 선배를 지키기 위해 모진 고문을 감내할 만큼 신념이 강했다. 이런 종철이를 위한 일이라면 무슨 일인들 못 하겠냐”고 미소 지었다.
김상준 혜광고 28기 동기회장이 박종철 열사가 자주 다니던 고갈비 집을 지난 4일 찾았다. 이은지 기자
영화 ‘1987’의 흥행으로 박 열사를 기억하는 이들이 많아졌지만, 동기들에게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 영화라고 했다. 영화 속 인간 종철의 인간적 모습은 하나도 그려지지 않아서다. 김 회장은 “친구들과 짤짤이하고, 골목에서 담배 몰래 피우고, 고갈비 집에서 막걸리 한잔 기울이던 평범했던 종철이가 군사정권의 폭력으로 아무 이유 없이 희생됐다는 점이 잘 드러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다음 영화에는 인간 박종철의 모습이 담겼으면 좋겠다”는 게 김 회장의 바람이었었다.

부산=이은지 기자 lee.eunji2@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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