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 같은 '고부 전쟁'..가족의 평화는 올까

이혜인 기자 2018. 1. 9. 21:22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경향신문] ㆍ다큐영화 ‘B급 며느리’ 찍은 선호빈 감독·부인 김진영씨

다큐멘터리 영화 ‘B급 며느리’의 주인공인 며느리 김진영씨.

김진영씨(36)는 많은 며느리들이 생각은 하지만 속으로만 삼키는 질문들을 입 밖으로 다 내놓는 ‘보기 드문’ 며느리다. 가령 “결혼 전까지 이름 부르며 막역하게 지낸 남편 동생을 왜 갑자기 ‘도련님’이라고 불러야 해요? 싫어요”라거나 “이 집안에 어른이 넷인데 밥 먹고 나면 왜 저만 설거지해야 해요?” 같은 말들을 시부모 앞에서 떳떳하게 한다.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없는 곳에서 아들에게 “걘 B급도 아니고 F급이야, F급!”이라며 분통 터져 한다. ‘되바라진’ 며느리 vs 고집 세고 간섭 심한 시어머니. 둘 사이의 충돌은 점점 더 격해지고, 급기야 며느리는 시댁에 발길을 끊겠다고 선언하는데….

오는 17일 개봉하는 다큐멘터리 영화 ‘B급 며느리’는 남들 알까봐 쉬쉬하는 고부갈등을 아주 소상하게 카메라에 다 담은 영화다. 이 영화를 만든 건 남편이자 아들인 선호빈 감독(37)이다. 대체 왜 이런 영화를 만든 걸까? 선 감독과 부인이자 영화의 주인공인 김진영씨를 지난 8일 경향신문사에서 만났다.

“처음에는 진영이가 집에 있는 카메라로 엄마랑 자기를 찍어달라고 했어요.”

2013년 여름, 며느리와 시어머니 조경숙씨의 갈등 빈도가 점점 잦아지던 때다. 시어머니는 진영씨에게 상처로 남을 만한 잔소리들을 여러 차례 했는데, 정작 아들인 선 감독 앞에서는 그런 일이 없다고 잡아뗐다고 한다.

다큐 감독인 선씨의 집에는 늘 촬영용 카메라가 있었다. 김씨는 답답한 마음에 남편에게 카메라로 자신과 시어머니의 모습을 찍어서 한번 같이 보자고 했다. 그런데 그 영상이 생각보다 너무 재밌었다.

“그때 다른 주제로 작품을 준비하는데 별로 재미가 없었어요. 고민하던 중에 주변에 있는 유부남 감독들과 함께 진영이랑 엄마를 찍은 영상을 같이 봤는데 ‘야, 이거로 해라. 완전 재밌네’라고 하더라고요. 다큐 하는 사람들은 생활의 모든 것이 영화 소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처음엔 아주 작은 영화로 만들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사람들이 훨씬 좋아하면서 제작지원까지 받고 일이 커졌어요.”

선호빈 감독(오른쪽)과 부인 김진영씨. 강윤중 기자

촬영은 물론 영화화에 전혀 거부감이 없는 진영씨는 선뜻 허락했다. 어머니 조씨에게는 선 감독이 1년 동안 허락을 구해서 촬영을 시작했다. 선 감독은 “실제 촬영본의 강도가 10이라면, 영화에는 3 정도만 담았다”고 하지만, ‘B급 며느리’는 정말 옆집 싸움을 현장에서 지켜보는 것처럼 날것 그대로다. 특히 며느리 진영씨의 고발성 멘트가 정말 거침없다. 예를 들면 시어머니는 진영씨가 손주에게 입힌 옷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서 매번 자기 스타일대로 갈아입히는데, 진영씨는 그에 대해 전부 이의제기를 하고 “제가 싫으면 제 아들(손주)도 만날 수 없다”고 반박한다. 감독은 어머니와 부인 사이에서 말 그대로 ‘새우 등 터지는’ 고통을 맛본다. 하지만 감독은 “진영이의 논리적으로도 완벽하고 직설적인 질문들이 통쾌하기도 하고 재밌기도 했다”고 말했다. 남들은 다 그러려니 하고 참으며 넘기는 것들을 진영씨는 왜 그냥 넘길 수 없었을까.

“한국에선 상황이 평화롭게 유지되려면 며느리만 한 수 접고 넘어가야 돼요. 내가 원하는 것을 참고, 말을 못하고요. 저희 자랄 때는 안 그랬거든요. ‘너는 여자니까 좀 못 배워도 돼, 운동 못해도 돼, 말하면 안돼’ 이런 얘기를 듣는 대신 남자만큼 못하면 손가락질받았어요. 그런데 결혼하고 나니 ‘여자니까 참아라’ ‘설거지 같은 건 여자가 해야지’ 이런 말을 계속 들어요. 그래서 제가 참고 넘어가면요? 그렇게 해서 집안의 평화가 유지된다면 그게 정말 평화일까요.”(진영)

‘B급 며느리’는 DMZ국제다큐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 등에서 앞서 상영됐는데 관객들로부터 열화와 같은 성원을 얻었다. 선 감독은 “영화를 보는 관객의 반응이 연령과 성별에 따라 갈렸다”고 말했다. 영화에서 어쩔 수 없이 진영씨가 시어머니에게 한 수 접고 들어가는 부분이 있는데 50대 남성들은 그 장면을 보면서 ‘갈등이 봉합된 화목한 장면’으로, 30대 여성들은 ‘분통 터지고 서러운 장면’으로 해석했다. 가족들의 반응도 제각각이다. 영화를 보고 난 진영씨 친정아버지는 “내 딸 잘 키웠다”며 뿌듯해하고, 친정어머니는 딸의 고통에 공감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선 감독은 “진영이가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장면들을 많이 넣어서 관객들에게 쾌감을 선사할 수도 있었지만, 보통 가정들처럼 며느리가 무력감을 느끼는 상황들을 그대로 넣고 싶었다”고 했다.

2015년 말 촬영이 마무리된 후로 약 2년의 시간이 흘렀다. 진영씨가 시댁에 발길을 끊는 극한의 상황은 정리되고 서로 왕래하며 지내고 있지만, 진영씨는 아직도 ‘B급 며느리’로서 투쟁 중이다. 진영씨는 “지난주에도 어머니와 싸웠고, 그 전주에도 싸웠다”며 “그런데 싸움을 통해 어머니와 제가 서로 가지 않아야 할 선을 알게 됐다”고 했다. 선 감독도 잘 지내고 있다.

“얼마 전에 제가 관객과의 대화에서 김진영을 존경한다고 했어요. 저처럼 살면 평생 아무것도 안 바뀌었을 것 같다고요. 그땐 힘들었지만, 지금은 좋아요. 오히려 자신을 드러낸 진영이가 저보다 부모님을 더 존중하는 게 아니었을까요?”

<이혜인 기자 hyein@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