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L Nostalgia] '추가시간의 기억' 조세 보싱와 - 102

이형주 기자 2018. 1. 8.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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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 보싱와

[STN스포츠=이형주 기자]

Nostalgia, 과거에 대한 향수란 뜻이다.

지금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EPL) 무대에 훌륭한 실력을 가지고 있는 선수들이 많이 모여 있다. 그 원동력은 이전의 선수들이 우수한 플레이로 팬들을 매료시키며 EPL을 발전시켜왔기 때문이다. 이에 EPL Nostalgia에선 일주일에 한 명씩 과거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선수들을 재조명해본다. [편집자주]

◇ '추가시간의 기억' 조세 보싱와 - <102>

올 시즌 첼시에 있어 라이트윙백 자리는 고민거리 중 하나다. 빅터 모지스의 경우 2% 아쉬운 활약을 펼치고 있고 다비데 자파코스타의 경우 적응에 보다 시간이 필요해보이는 상황이다. 2008년 당시에도 첼시는 오른쪽 측면에서 고민을 안고 있었다. 비록 그 당시는 포백을 썼기에 라이트윙백이 아닌 라이트백이었지만 고민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첼시의 이 고민은 2008년 영입된 이 선수로 인해 해결됐다. 이 선수는 그 이후 활약을 이어간 것은 물론 경기장 안팎으로 많은 이야깃거리를 남겼다.

보싱와는 1982년 콩고민주공화국의 음반다카에서 태어났다. 보싱와의 가족은 유년기에 아버지의 고향인 포르투갈로 이주했다. 그로 인해 보싱와는 포르투갈에서 자라났다.

보상와의 축구 실력은 어릴 때부터 인정을 받은 편이다. 포르투갈의 대도시 포르투를 연고로 하는 보아비스타 FC 유스에 입단했다. 이후 2000년 프로 데뷔에도 성공했다.

2003년 지역 라이벌이자 포르투갈의 명문팀인 FC 포르투로 이적한 그는 한동안 슬럼프를 겪었다. 게다가 보싱와가 포르투에서 커리어 초반을 보내던 시절, 팀에는 파울로 페레이라, 카를로스 세크리타리오라는 걸출한 라이트백들이 존재했다.

하지만 보싱와는 포기하지 않고 자기 발전에 매진했다.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 멤버가 된 보싱와는 2008년까지 포르투에서 준수한 활약을 펼쳤다.

당시 EPL의 첼시는 라이트백 매물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2004/05시즌 리그 15실점의 주역인 페레이라는 노쇠화가 뚜렸했다. 줄리아노 벨레티는 준수한 백업자원이었지만 빅클럽의 주전으로는 아쉬운 부분이 많았다. 당시만 해도 브라니슬라프 이바노비치는 센터백으로 활약했다. 첼시는 미카엘 에시앙을 라이트백으로 돌리는 일도 많았다.

첼시에 보싱와는 좋은 매물이었고 2008년 8월 이적이 이뤄졌다. 당시 보싱와의 이적료는 2060만 유로에 달했는데 서드 파티라 불리는 에이전시에 이적료가 가게 되는 구조여서 발생했던 일이다.

보싱와의 첼시 첫 시즌 활약은 빼어났다. 보싱와는 EPL 1라운드 포츠머스 FC전에서 데뷔전을 치렀고 6라운드 스토크 시티전에서 데뷔골을 터트렸다. 이후에도 환상적인 중거리슛 득점을 하는 등 좋은 모습을 보였다.

활약을 이어가던 2009년 2월 보싱와는 2018년인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사건을 겪게 됐다. 리버풀 FC와 24라운드에서 만난 첼시는 후반 44분 페르난도 토레스에 실점하며 끌려갔다. 0-1로 뒤진 상황에서 요시 베나윤이 코너 플래그 앞에서 엉덩이를 빼고 시간을 끌었다. 보싱와는 이를 참지 못하고 베나윤을 발로 찼다.

역설적이게도 당시 주심인 마이크 라일리가 해당 상황을 보지 못했다. 이로 인해 0-2로 패한 이 경기에서 보싱와는 경고 및 퇴장 등 어떤 징계도 받지 않았다. 경기에서 징계를 받지 않았기에 잉글랜드 축구혐회(FA)는 물론 국제축구연맹(FIFA) 징계도 없었다. 이로 인해 보싱와는 활약을 이어갔고 팀의 FA컵 우승에 기여했다.

하지만 보싱와의 활약은 이어지지 못했다. 2009년 10월 보싱와는 무릎 부상을 당했다. 이로 인해 시즌을 완전히 망치고 만다. 보싱와의 플레이스타일이 스피드에 많이 의존해왔기 때문에 그는 부상 이후 이전만큼의 활약은 보이지 못하게 됐다.

2011/12시즌 들어 보싱와가 부활의 날갯짓을 펼쳤다. 안드레 빌라스 보아스 감독 하에 보싱와는 라이트백 핵심으로 자리하게 됐다. 수비적인 보아스 감독의 전술에서 보싱와는 풀백으로 공격을 풀어주는 존재여서 많은 중용을 받게 됐다.

이후 은사 보아스가 성적 부진으로 경질됐지만 보싱와는 팀에 없어서는 안 될 선수로 자리했다. 당시 부상자가 많았던 첼시는 보싱와를 본 포지션인 라이트백은 물론 센터백, 레프트백으로도 기용했다. 하지만 보싱와는 이 모두를 능숙하게 해내며 팀의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에도 기여했다.

당시 첼시가 거둔 챔피언스리그 우승은 팀 역사상 최초의 챔피언스리그 우승이라는 위대한 발자취였다. 뿐만 아니라 수년간 첼시에서 활약한 디디에 드록바, 프랭크 램파드, 존 테리, 페트르 체흐, 애슐리 콜 등 레전드들의 설움을 달래주는 우승이었다.

우승 셀레브레이션이 기대되는 상황이었지만 보싱와가 모든 것을 망쳤다. 보싱와는 팀 레전드들을 헤집은 뒤 자신의 맘대로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이로 인해 시상식은 엉망이 됐고 보싱와는 지탄을 받았다.

당시 보싱와의 계약은 구단에 의해 1년 연장 옵션 발동이 가능한 계약이었다. 2011/12시즌 보싱와의 활약을 볼 때 충분히 재계약이 가능했다. 하지만 첼시는 재계약을 하지 않았고 보싱와는 퀸즈 파크 레인저스로 이적하게 됐다. 영국 언론 <더 선>은 시상식 논란이 보싱와의 계약 해지에 영향을 끼쳤다고 보도했다.

보싱와는 QPR에서 저조한 활약을 펼쳤다. 보싱와 뿐만 아니라 QPR의 팀 상황 자체가 좋지 못했다. 이로 인해 보싱와는 한 시즌 만에 터키의 트라브존스포르로 떠나게 됐고 그 곳에서 은퇴했다.

◇EPL 최고의 순간

2008/09시즌 EPL 6라운드에서 스토크와 첼시가 맞붙었다. 보싱와는 박스 쪽으로 맹렬히 쇄도했고 프랭크 램파드가 보싱와 쪽으로 패스를 띄워줬다. 보싱와는 가슴 트래핑 후 슈팅으로 골망을 갈랐다. 이는 보싱와의 첼시 마수걸이 골이 됐고 경기는 2-0 첼시의 승리로 종료됐다.

◇플레이 스타일

운동 능력이 훌륭한 풀백이다. 빠른 스피드를 이용해 상대 윙어들과의 경쟁에서 승리하며 공을 탈취했다. 공격력이 훌륭한 선수라 공격 상황에서 팀에 큰 도움이 됐다. 무릎 부상 이후 운동 능력을 상실한 뒤에는 경험을 바탕으로 측면을 든든히 메웠다.

◇프로필

이름 – 조제 보싱와

국적 - 포르투갈

생년월일 - 1982년 8월 24일

신장 및 체중 - 183cm, 75kg

포지션 – 라이트백

국가대표 경력 – 25경기

◇참고 영상 및 자료

프리미어리그 2008/09시즌~2012/13시즌 공식 리뷰 비디오

첼시 2008/09시즌~2011/12시즌 공식 리뷰 비디오

QPR 2012/13시즌 공식 리뷰 비디오

첼시 공식 홈페이지

QPR 공식 홈페이지

<트랜스퍼마켓> - 선수 소개란

<데일리 미러> - Far from ordinary Jose Bosingwa enjoying life in London with Chelsea

<스카이 스포츠> - Bosingwa escapes FA action

<스포르티지> - No one Does Business like FC Porto

사진=프리미어리그 홈페이지 캡처

total87910@stnsport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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