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먹고 담배 산 뒤 "나 미성년자거든요" 사악한 '셀프 신고'

최규진 2018. 1. 7.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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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주만 처벌' 청소년보호법 악용
무전취식·포상금 노리고 '셀프신고'
업주들 "두달 영업정지 무서워..울며 겨자먹기"
경찰 "공갈·협박 혐의 처벌 가능"

서울 난지한강공원에서 편의점을 운영하는 이모(70)씨는 지난달 손님들에게 맥주를 판매했다가 봉변을 당했다. 계산을 마친 손님 중 2명이 몇 분 만에 경찰관들과 함께 찾아온 거였다. 경찰관은 "이 학생들의 신분증을 검사했느냐"고 추궁했다. 알고 보니 여러 명의 손님 중에 막 18세가 된 고등학생들이 섞여 있었던 것이다. 그 학생들은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우리가 직접 신고했다"고 밝혔다. 이어 경찰관에게 " 신고 포상금을 줘야 하는 것 아닌가요"라고 물었다. 이씨는 경찰 조사를 받으면서 “워낙 바쁜 시간이고 단체 손님 속에 끼어 있어 신분증 검사를 다 하지 못했다. 이렇게 작정하고 속이면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느냐”고 하소연했다.

서울 서대문구 신촌에서 10년간 치킨집을 운영하던 이모(68)씨는 지난해 8월 가게 문을 닫았다. 석 달 전 가짜 신분증에 속아 고등학생들에게 모르고 술을 팔았던 게 화근이었다. 밤새도록 술을 마신 학생들은 계산할 때가 되자 경찰에 직접 신고를 했다. ‘미성년자에게 술을 판매했다’, ‘신분증 검사를 한 적이 없었다’는 말에 실랑이를 벌였지만, 영업정지 2개월의 행정처분을 피할 수는 없었다. 이씨는 “차라리 술값을 안 받고 울며 겨자 먹기로 돌려보내는 방법밖에 없다”고 말했다.
최근 편의점이나 술집 업주를 속이고 술·담배를 구입한 청소년들이 경찰에 고의 신고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중앙포토]
최근 업주를 속이고 술·담배를 구입한 청소년들이 경찰에 고의로 ’셀프신고’하는 사례가 늘면서 자영업자들이 골머리를 앓고 있다. 미성년자임을 악용해 술을 마신 뒤 술값을 내지 않기 위해 협박을 가하거나, 포상금을 노리고 편의점과 술집을 돌면서 악의적인 신고를 일삼기 때문이다.

실제로 자영업자들이 모이는 일부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미성년자 주의’ 피해사례를 쉽게 찾을 수 있다. 10대 청소년이 아예 신분증을 도용하거나 위조하는 등 날로 속이는 수법이 교묘해지면서 피해 업주들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외식업중앙회가 2010년부터 2012년까지 3년간 조사한 통계를 보면, 미성년자에게 주류를 판매했다 적발된 3339개의 업소 가운데 청소년들이 법을 이용해 고의로 신고한 경우가 2619개 업소로 78.4%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대부분의 자영업자는 이러한 청소년들의 ‘일탈 행위’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현행 청소년 보호법·식품위생법에 따르면 청소년을 청소년 출입·고용 금지업소에 출입하게 하거나 주류를 제공할 경우, 청소년은 처벌하지 않고 판매자만 처벌을 받도록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업주들은 ‘2년 이하 징역 또는 2000만원 이하 벌금형에 영업정지 처분까지 받으면 사실상 문을 닫아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서울 신촌에서 술집 운영하는 김모(32)씨는 “경쟁업체에서 미성년자들을 고용해 남의 가게에 보내 골탕 먹이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현행 청소년 보호법에 따르면 청소년을 청소년 출입·고용 금지업소에 출입하게 하거나 주류를 제공할 경우, 업주에게 2년 이하 징역 또는 2000만원 이하 벌금형에 행정 처분을 내리도록 하고 있다. [중앙포토]

일부 자영업자들은 청소년들에게도 상응하는 처벌이 내려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외식업중앙회 곽동섭 정책부장은 “청소년이 신분증을 위조했을 경우에는 행정처분을 면제할 수 있지만, 업주들이 입증하는 데 한계가 있다. 억울한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불기소 처분이나 처벌을 면제하는 등 근본적인 해결책도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경찰 관계자는 “청소년이 업주를 위협하며 고의로 신고할 경우 공갈이나 협박 혐의로 처벌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에 대한 처벌보다는 지도책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권일남 명지대 청소년지도학과 교수는 "미국의 경우 자녀가 범법행위를 했을 경우 부모도 경범죄로 처벌한다. 청소년보호법의 취지에 따라 청소년을 처벌하기보단 가정에서 먼저 양육에 대한 사회적 책임 의식을 높이는 지도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최규진 기자 choi.kyu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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