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때문에 청와대 비상대책회의를 소집하다니.."

2018. 1. 7.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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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찾아서] 고석만의 첨병 ① 서막, 오늘의 땅

[한겨레]

고석만 피디. 박재동 그림

<한겨레>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 21번째 주인공은 고석만 프로듀서다. 1973년 <문화방송>(MBC)에 입사한 이래 그는 30여년간 숱한 화제작을 제조했다. ‘정치드라마의 대부’ ‘스타 피디 1세대’ 같은 명성과 더불어 ‘문제 피디’라는 시비도 따라다녔다. 특히 ‘공화국 시리즈’와 ‘재벌 시리즈’는 한국 사회의 가장 민감한 환부를 정면으로 드러낸 까닭에 대부분 ‘조기 종영’을 해야 했다. ‘고석만의 첨병’에서 끝내지 못한 드라마의 숨은 이야기들을 마침내 털어놓는다.

1991년 대하드라마 <땅>은 김기팔 극본·고석만 연출이 다시 뭉친 작품이란 사실만으로 기획 때부터 안팎의 관심을 받았다. 두 사람의 첫 작품 <제1공화국>이 첫 정치드라마였고, <야망의 25시>가 경제드라마였다면, <땅>은 정치경제를 아우르는 한국 현대사 해부 드라마였기 때문이다. <땅>의 첫번째 주요 인물인 ‘장건식’(길용우)은 몰락한 집안 출신의 인텔리 이상주의자이다. 사진 엠비시가이드 제공
<땅>에 등장하는 두번째 인간형인 ‘장대식’(오지명)은 일제시대 독립운동을 했다고 주장하지만 정체가 불분명하고 해방 이후 시류에 따라 변신하며 땅 투기로 부를 쌓은 현실주의자다. 사진 엠비시가이드 제공
<땅>의 세번째 인간형은 이상주의자 장건식과 현실주의자 장대식의 사이에서 눈치껏 타협하며 살 길을 찾는 기회주의자 ‘윤기현’(최낙천)이다. 작가 김기팔은 얽히고설킨 세 가족의 50년사를 통해 땅을 둘러싸고 빚어지는 한국 사회 빈부격차의 현실을 극명하게 묘사할 예정이었다. 사진 엠비시가이드 제공

1991년 1월6일 50부작 ‘땅’ 첫 방송
김기팔 작가 ‘땅의 정치경제사 해부’ 지주집안 출신 이상주의자 ‘장건식’
부동산 재벌 된 현실주의자 ‘장대식’
둘 사이 오가는 기회주의자 ‘윤기현’
해방 때부터 엇갈린 ‘세 가족 50년사’ 첫 장면 ‘백담사 전두환’ 등장 ‘충격’
‘골프장 반대’ 시위 장면부터 ‘딴지’
요정 나간 가짜 여대생 팁 장면 등등 시청률 41.4%…이튿날 아침 북새통
청와대 정무수석, 최창봉 사장 ‘호출’
안팎 압력에 4월28일 15회 조기종영
“최 사장 함구한 ‘최초 명령자’ 누구?”

1991년 1월6일 일요일 밤 9시35분, 김기팔 극본·고석만 연출의 <문화방송>(MBC) 대하드라마 <땅>이 첫 방송 되었다.

S#1 메인 타이틀.

S#2 산과 절.(대웅전 앞에 임시로 비밀막을 친 큰 건물)

전직: 날씨도 쌀쌀한데 이리 먼 곳까지 찾아주신 여러분은 참말 정이 많으신 분들이십니다.

S#3 가건물 안.(주로 중년 이상의 불교신도들이 듣는 가운데 전직 대통령이 법문을 펴고 있다. 한복 차림의 전직 대통령 부부가 조금 높은 단 위에 앉아 있다. 신도들 중에 윤기현-최낙천-이 섞여 있다. 허름한 차림이라 눈에 안 띈다.)

전직: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사실 우리 내외가 자발적으로 이 절에 찾아 들어온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처음에는 이런저런 섭섭한 일이 많았던기 사실입니다. (중략) 사실 천국과 지옥, 천당과 극락이란 것도 죽어서 가는기 아니라 살아서 겪는 것 아니겠습니까? 나는 대구에서 가난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움막집 아이로 태어났십니다. 그러나 내 아버님의 가르침, 가난을 남의 탓으로 돌리지 말그라, 부자가 왜 부자가 되는지 곰곰이 연구하그라 카는 아버님의 가르침 때문에 열심히 살아왔십니다. 움막집 아이인 내 혼자 노력으로 육사도 들어가고, 들어갈 때는 성적이 신통치 않았지만도…장교 임관 뒤에는 누구보다 빨리 진급했십니다. 동기생 중에서 별도 제일 빨리 달고 또 많이 달고 대통령도 제일 먼저 되고….(신도들 빠져들고…)

6·29 선언을 매개로 신군부와 자유주의 정치세력의 협약을 통해 노태우는 정권을 창출했다. 그 노태우를 전두환이 비판하고 있다.

S#4 가건물 안(계속)

전직: 참으로 안타까운 일은 88올림픽을 치르고 나면 선진국이 되는 길이 보장되어 있다고 국내외 전문가들이 이구동성으로 장담 안 했십니까? 그런데 나라 경제가 이 모양으로 물가는 오르고… 정치인들, 지도자들이 제대로 정치를 몬하고 서로 싸우고… 큰일입니다. 땅값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뛰어올라 집 없는 서민들…(계속).

전두환의 연설 장면 위에, 최근 이슈가 된 3당 합당,국회 몸싸움 뉴스 필름이 덮쳐지며 프롤로그가 끝나면, 눈 덮인 산하를 훑어나가는 화면 위에, 주제곡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를 변조한 행진곡풍의 주제곡이 울려퍼지며 부제 ‘서막, 오늘의 땅’이 뜬다.

1991년 1월 대하드라마 은 첫 장면에 유배지인 백담사에서 신도들 앞에 나란히 앉아 연설을 하는 전직 대통 령 전두환·이순자 부부의 뒷모습을 등장시키는 등 ‘신선한 파문’으로 첫회 시청률 41.4%를 기록했다. 엠비시가이드 제공

대하드라마 <땅>은 1990년 11월 기획 발표 직후부터 언론의 화제가 되었다. 주요 기사의 제목들만 보자. ‘김기팔·고석만 <땅>에서 재결합’, ‘땅의 의미를 정치경제사적으로 해석’, ‘안방 회오리 예고’, ‘남성전용 연속극 새해에 첫선’, ‘투기로 생긴 부(富)의 편중 고발’, ‘세 가족을 통해 뒤틀린 경제구조 해부’.

<땅>은 50회 예정으로 1991년 1월부터 한해 동안 방송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첫회 방송부터 화제를 모으더니 논란이 벌어지면서 결국 4월28일 15회로 방송이 중단되었다. 그 첫회 ‘오늘의 땅’을 면밀하게 분석해본다. 전체의 흐름을 관조하고, 뒷날 문제가 있다고 지적된 몇 장면을 들여다보기로 한다.

김기팔 극본의 <땅> 첫회를 ‘콘티 대본’에서 발췌하여 원본 그대로 옮기는 생소함에 찬반이 있을 수 있으나, ‘백문이불여일견’이라고, 극본을 통해 실체를 만끽해보기 바란다. 대본을 옮기면서 생각해보니, 첫아이를 얻은 아비가 출생 기념으로 술을 빚어 안방 툇마루 밑에 묻어 놓았다가 오늘에야 여는 ‘성인주’ 같았다. 27년 만에 뚜껑을 열면서, 작가의 향기가 훼손되지 않길 바란다.

타이틀백과 광고가 끝나고, 오프닝 팡파르와 함께 첫 장면.

S#5 하늘, 헬리콥터가 날고 있다.

S#6 헬리콥터 안, 장대식(70대·오지명), 그의 아들 장강(50대·조경환) 그리고 딸 장윤(40대 후반·김미숙)이 타고 있다. 그들,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S#7 헬리콥터 아래, 아름다운 초원. 골프장이 건설되고 있다. 지금 한창 공사중이다.

S#8 헬리콥터 안.

강: (윤에게) 어떻노?

윤: …….

강: ‘야코’ 죽었나?

윤: (씩 웃는다)

강: 니도 인자 복부인 노릇 그만하고….

윤: 왜 이래 이거?

강: 니 복부인 아이가?

윤: (픽 웃고)

강: 부동산 투기 시대는 인제 지나갔다. 감옥에 간다.

윤: (아래 가리키며) 오라버니! 이건 뭐요, 그럼?

강: 뭐가?

윤: 이 골프장은 뭐냐 이거예요. 이건 감옥에 갈 부동산 투기 아니고 뭐유.

강: 허허허… 니가 ‘야코’ 죽긴 죽었구나.

윤: (웃어버린다)

대식: (아래를 보다가 돌연) 뭐꼬? (선글라스를 벗고 망원경으로 내려다본다)

강: 뭡니까? 아버님?(골프장 한쪽 끝에 플래카드를 흔들며 손을 흔드는 장인식의 모습)

강: (비행사에게) 저기 다시 접근하시오.(좀 더 선명하게 보인다. 플래카드에는 ‘골프장 건설 결사반대’라고 쓰여 있고 60대의 장인식-나영진-과 그의 아내가 이마에 ‘결사반대’라는 머리띠까지 매고, 헬리콥터를 향해 주먹질을 하고 있다)

강: 아직 해결 안 났다는 세 집 중에 하납니다. 윤 실장 말이 해결은 시간문제라 합니다.

대식: 윤 실장 불러봐라.

강: 예! (무전기를 든다) 여긴 시피(CP)다. 윤기현 실장 나와라!

소리: 예, 예 현장 사무실입니다. 윤 실장은 지금 안 계십니다.

대식: 뭐라꼬?

강: 윤 실장 어디 있나?

소리: 오늘 새벽에 여행 다녀온다고 떠났습니다.

대식: 뭐 여행? 당장 내려!(식식거린다)

강: 안 됩니다. 아버님!

윤: 왜 헬리콥터 못 내려, 오빠?

강: 보안상 이유다.

윤: 보안상?

강: (대식에게) 대구 시내로 들어갈까요? (대식…말없이…)

윤: 아버지랑 오빠가 이 골프장 주인이라구 선뜻 못 나서는 이유가…주민들 데모 일으킬까봐? 그래서 복지재단을 내세우구…그게 보안상 이유로구만, 민주화가 되게 겁나긴 겁나시는 모양이구만.

강: 비 콰이엇!

여기서 김기팔 작가의 ‘작품 의도’를 다시 들여다본다. “땅은 생명의 원천이다. 인간은 땅 위에서 살며, 땅에서 나는 물과 곡식을 먹고 산다. 그래서 땅을 가지기 위한 경쟁을 치열하게 해왔다. 땅은 불이 날 염려도 없고 도둑맞을 염려도 없어 저마다 땅을 소유하려 했다. 그래서 송곳 하나 꽂을 땅이 없는 사람과 만석꾼 지주 간의 빈부 격차가 있어왔다. 결국 땅의 소유 여부가 빈부 격차의 심화를 재촉해왔다. 이 드라마는 8·15 해방이라는 대격변기를 겪은 1945년부터의 땅 문제를 살펴볼 예정이다.”

S#14 산동네. (S#9~13 중략)

S#16 건식의 집 앞. (부엌 하나, 방 하나로 된 여러 가구 사는 판잣집. 미숙-이응경-의 안내로 인식 나타난다. 미숙과 건식이 방으로 들어간다.)

미: 아버지~.

S#17 건식의 방 안. (건식과 이관수가 술을 마시고 있다. 방문 열리고 미숙 나타난다.)

미: 손님 오셨어요.

건: (어리벙벙) 손님?

미: (밖에 대고) 들어오세요.

(인식 들어온다.)

인: 행님!

건: …….

인: 인식입니다.

건: …….

인: 건식이 행님! 지 모르겠십니꺼?

건: 어쩐 일이여?

인: 행님 절 받으시이소. (인식 짐 벗어놓고 큰절을 한다. 거의 울 듯한 표정이다.)

인: 행님.

건: 어쩐 일이당가?

인: 콤퓨터 조회…콤퓨터 조회 안 했십니까? 그래 형님 주소 알았십니다. 이기 얼매만임교 행님!(그예 울음 터뜨린다.)

지주의 아들 장건식(70대 초반·길용우)은 현재 빈민촌에 세들어 살고 있다. 현실에 적응치 못해 떠돌고…거기 대조적으로 강남의 땅 재벌 장대식(70대 중반·오지명) 일가. 빌딩과 부동산을 어마어마하게 소유하고 있는 재벌급 회장인 그와, 그의 아들 장강(50대 초반·조경환)이 사장인 상류 가정. 장건식과 장대식은 먼 일가친척이다. 빈부 격차가 심하듯 성격이며 사는 방식이 대조적이다. 윤기현(70대 초반·최낙천) 일가, 현재 땅 재벌인 장대식 집안의 하수인으로 부동산소개업을 해 떡고물을 얻어먹고 산다. 장건식·장대식·윤기현, 세 친구. 시대와 더불어 역전되고 고난과 영광이 교차되는, 현대사 속의 현대사 ‘땅’.

S#18 산동네 구멍가게 앞. (미숙 와서 공중전화를 한다. 통화가 된 듯. 주변을 살피며 말을 시작한다.)

미: 여보세요…저 미스 고예요. 저 다름이 아니라, 오늘 일이 좀 있어서 못 간다구(놀라다), 예?

S#20 룸싸롱 사장실.(마담이 전화하고 있고, 옆에 남자 사장이 있다)

마담: 야! 너 지금 정신이 있는 거니 없는 거니? 야! 챈스! 너, 챈스 알지?

S#21 가게 앞. (미숙이 전화하고 있고)

미숙: 네, 챈스가 어때서요?

S#22 사장실

사장: 미스 고야?

마담: 너 챈스 잡을 거니, 안 잡을 거니?

사장: 바쁘대믄 관둬.

마담: 너 지금 어디니? 어디야? 집이야?

S#23 가게 앞

미숙: 네, 오랜만에 집에 왔더니 마침 아빠 손님이 시골서 올라 오셔서요.

S#24 건식의 방. (건식과 인식, 술 마시고 있다)

인: 행임, 말씨 와 그렇소?

건: 말씨가 어띠어서?

인: 누가 들으면 호남 출신인 줄 알겠소.

건: ……(술 마시려고)

인: 행임, 좀 천천히 드이소.

건: 어째 술도 못 마시게 한다냐?

인: 행님!

건: (사이, 마시고)

인: 우리 고향에 큰 골프장 들어서는 거 알지요?

건: 몰러

인: 이리 소식이 어두우시니….

건: 골프장하고 나하고 무슨 상관있냐?

인: 그 골프장이요 겉으로는 무신 복지재단이 세우는기다 돼 있지만도, 내용적으로 그 주인은 장대식이락 합니더. 옛날에 장대식이가 먹은 행님네 밤나무골 15만평 안 있십니꺼?

건: 딴 얘기하세.

그런데 바로 이 장면이 방송될 때쯤, 방송사의 어느 본부장 집으로 불편한 전화가 날아왔다 한다. 독설을 날린 장본인은 문화공보부 매체국장, 그는 장관으로부터, 장관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는 것이다. 방송 시작 15분께. 이게 사실이라면, 괜히 제발 져린 사람들이 방송이 제대로 시작도 하기 전에 한 두 장면 보고, 대사 한두 마디 듣고 호들갑을 떠는 것이다. 그게 아니면 공범자로 불리우는 (방송사) 고위간부들의 농간이다.

(S#25~S#61 중략)

S# 62 연회장. (여자애들은 취하는 것을 간신히 참고 각자의 남자에게 밀착해서 안겨 있다)

국회: (강에게) 인자 내각책임제되고 그라면 국회의원 참말 해묵을만 해질긴 데…. (고관에게) 안 그렀소?

고관: ……(웃기만)

국회: 니, 공천 신청 내그라, 옆에서들 어련히 안 봐주겠나?

강: 내는 ‘5공 잔재’다.

국회: 봐라, 니가 무신 ‘5공 잔재’고? 니가 ‘5공 잔재’면 우리도 다 마찬가지 아이가.

고관: 5공 운운은 마, 낡은 얘기니 괘념치 마이소 선배님.

국회: 봐라, 니 뒤는 봐 줄테니께….

강: 이거 분위기가 이상해지누만, 이 자리 마련한 이유가…. 두 분 오랜만에 뵙고, 우선 스트레스 풀고…내로서는 두 분하고 이런자리 가지는 것이 영광이라! 인자 내는 여러분들 배후에서 간혹 이런 술자리나 마련하고…, 이것은 진심잉기라, 자 드입시더, 건배!(잔 부딪치고 마시고…)

국회: 취하는데….(분위기 잡는다) 나 잠깐….(모델을 끌고 어물쩍 나간다)

강: (고관에게) 술이 오르면 찬바람 좀 쏘이고….

고관: 그럴까예?

(고관 나가고 배우 기쁘게 따라나가고, 인제 강과 미숙만)

강: 니 대학생이라꼬.

미숙: 네, 가짜 대학생요.

강: (잠시 놀란다) 니, 예쁘데이.

S# 64 골목. (토하는 민경욱-정진, 뒤에서 등 두드리는 인식)

인: 니, 와 이러노, 니, 술이 어째 이래 약해졌노?

경: 이 자슥아, 니가 내 속 안 뒤집어 놨나?

인: 내가?

경: 이 자슥아, 옛날 이야기는 와 자꾸 꺼내노.

인: 그래 토했나? 그라믄 인자 술 내가 살기구마.

경: 촌놈이 돈 어데 있노.

인: 이 자슥아, 촌에 돈 많대이 (악 쓰듯) 농촌 잘 산대이~!

S#66 별장

미: 선생님!

강: 응?

미: 저 한가지 여쭤봐두 돼요?

S#67 연회실.(장강과 미숙)

미: 선생님 5공 때 전국구의원 지내신 장강 의원님이시죠?

강: 보고도 못 본 척….

미: 부동산 재벌이신 부민재벌의…?

강: 듣고도 못 들은 척….

(강은 미숙의 어깨에 팔을 얹고 안으려고, 미숙 옆으로 빠지고)

강: 가짜 대학생….

미: 네.

강: 니, 여기 올 때 교육 안받고 왔나?

미: 받았습니다

(강 다시 안으려고,미숙 다시 피하고)

강: 이라먼 큰일 날긴데….

미: …….

강: 이유가 있나? 이유 대봐라

미: …….

(강은 지갑에서 10만원짜리 수표 여나무장을 세지 않고 준다)

강: 대한민국은 경제는 발전했어도 빈부 격차가 심한 것이 문제지? 즉 분배가 잘못됐다 이말이지, (수표를 미숙의 가슴골에 넣어 주며) 소득 재분배다. 이것이 자본주의의 장점이지.

미: (담담하게 바라보고만 있고)

강: 니도 자본주의 신봉자지? 그렇지?

첫회 방송 도중부터 방송사 간부들에게 전화를 하기 시작한 노태우 정권의 노골적인 외압에 드라마는 끝 내 ‘15회 조기 종영’을 하고 말았다. 첫회 극중 장대식의 아들 강(조경환)이 요정에 돈 벌러 나간 장건식의 딸 미 숙(이응경)의 가슴팍에 수표를 넣어주는 장면 등을 구실로 방송위원회는 제작진을 징계한다. 엠비시가이드 제공

바로 문제가 되었다는 ‘부의 분배’ 장면이다. 방송사 심의실 지적 사항이다. ‘분배문제를 유의하여 처리 바람’. 방송사의 심의기준은 시류에 민감하다. 지금은 그 험난했던 시절 다 보내고 방송민주화를 부르짖고 있는 때라 느슨해진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수표뭉치를 가슴에 찔러 넣는 장면은 충분히 놀라움이었을 거다. 실제로 함축적인 장면은 다음에 나오는데….

S#63 길거리. (밤거리를 몽유병자 처럼 걷고 있는 건식, 저쪽에서 30대의 대식의 모습이 보인다. 해방 직후의 모습.)

대식: 야, 건식 동지 아니가, 야, 건식 동지 ! (평안도 사투리) (걸어오는 사람은 물론 다른 사람이다. 다시 걸어 간다)

대식: 장건식 ! 내다 ! (경상도 사투리) (이번에는 경찰 정복-총경-을 한 대식의 모습이 보인다)

(순간 화면 바뀌면, 빨치산 무리 속의 장건식, 총격전을 벌인다. 물론 환각이다. 멍하니 서있는 건식)

이 장면이 나갈 때 또 전화, 충성스런 다른 사람이 그 본부장에게 전화를 해왔다고 한다. 그는 얼마 전 청와대에 들어간 폴리너리스트, ㅁ 기자였다. 우리 사회는 현재 계층에 따라 사회발전에 요구하는 가치가 다양하게 분화되어 있다. 어느 쪽의 요구를 수용하여 체제의 통합과 발전을 유도할 것인가는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70년대 이후 새로이 부상하여 91년, 오늘 그 규모가 확대되고 있는 중산층의 가치라고 할 수 있다. 대하드라마 <땅>은 현재의 정치, 경제 상황에 대한 냉소적 비판이 아니라, 우리 체제의 주변부에 포진해 있는 일탈계층을 체제의 중심으로 유도·통합하려는 중산계층의 가치에 기초하고 있다.

S#73 검문소 부근. 검문소를 통과하는 장윤(김미숙)

S#74 절. (장윤과 만나는 전 대통령 전두환과 이순자 부부)

S#75 사회변동 현장필름.(남북 고위급회담, 국회 본회의와 예결위, 모스크바, 남북음악회,전두환 전 대통령 부부의 하산과 귀경)

S#76 서울

S#77 농촌(이농하고 빈 집들…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은 가지가집니다. 잘 사는 사람, 못 사는 사람, 똑똑한 사람, 못난 사람, 그리고 좋은 사람, 나쁜 사람…. <문화방송> 대하드라마 <땅>은 이 땅과 그 위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깁니다. 그 서막은 여기서 일단 막을 내립니다. 다음주 이 시간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될 땅과 그 위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 사연과 곡절을 기대해 주십시오.

마지막 장면이 끝나고 크레딧이 흐를 때면 전화가 오기 시작한다. 다른 매체, 다른 장르와 다르게 방송의 반응은 즉각 이루어진다. 방송의 특성은 속보성·동시성·광역성에 기반한다. 시청평과 격려 전화들이 한시간 넘게 이어졌다. 오늘의 총평은 “시원하다“, “이것이 본질이다“, “너무 리얼하다”,“박수를 보낸다”…하며 다들 좋아하는데. 그 중에 “너무 나갔나?”, “의욕과잉인가?”하는 사람도 있다. 전국에 ‘땅’ ‘땅’ ‘땅’…, 자체 전화조사 시청률 41.4%.

냉정하게 복기를 해봐야 한다. 작품성과 주제의식부터 서사구조, 표현기법 등, 이 시대 방송언어로서 ‘첨병의 역할’은 했는가? 방송으로서 균형은 유지되고 있는가? 작품 전체 완성도는 어디까지 도달했는가? 그날 밤도,그 훗날에도,그리고 오늘도…그날의 <땅>을 차근차근 돼새겨 본다. 중요한 것은, 김기팔 극본·고석만 연출의 <땅>은 27년 전에 쓰고 만든, 그 시대의 시사이다. 그런데 27년 전과 오늘이 달라진 게 없다는 사실에 새삼 몸서리 쳐진다.

첫 방송 다음날인 91년 1월7일 월요일 아침, 방송사 상층부는 무거운 기류에 짓눌리고 만다. 청와대에서 전화가 오고 최창봉 사장 호출령이 떨어졌다는 거다. 사장은 청와대에 들어가 손주환 정무수석을 만나고 돌아왔다. 누가 어떤 관점에서 어떻게 보고 어떻게 힐난 했길래, 이렇게 반응하는가? 최창봉 사장은 어떻게 변명하고, 뭐라 설득했으며, 어떤 항변을, 무슨 방식으로 저항을 했는지 모른다. 그는 끝내 함구했다. 급기야는 ‘청와대비상대책회의’소집령이 떨어진다. 문자 그대로 풀이하면,“국가적 비상이다”,“대책을 수립하라”,“모두 모여 의논하라”.드라마 한편에 ‘청와대비상대책회의’가 소집되다니. 도대체, 최초 명령자는 누구인가?!

집필 고석만 프로듀서, 진행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외압에 내부검열에 막혀 못다 한 ‘민주주의 드라마의 비사’ 밝힙니다”

‘길을 찾아서’ 21번째 주인공 고석만 피디

고석만 피디

꼭 10년 만이었다. 2008년 <한겨레> 창간 20돌 기념 기획으로 ‘길을 찾아서’ 연재를 준비할 때, 그는 ‘대중문화 대표 인물’ 후보로 꼽혔다. 하지만 그는 “아직 회고록 쓸 만한 ‘깜냥’이 못 된다”며 삼고초려마저 고사했다. 그래서 잊고 있었다. 그런데 지난해 초가을 무렵 그가 먼저 찾아왔다. 꼼꼼하게 정리된 자신의 인생 궤적과 이미 상당히 정리된 ‘초고’까지 들고 왔다. 프로듀서 고석만, 그에게 어떤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칠순을 앞두고 지나온 길을 되짚어보니 ‘한’이 한두 가지 남아 있더라고요. 우선은 작가 김기팔 선생과 어머니입니다. ‘김 선생’이 피디로서 공적 인생의 전환점이라면, 어머니는 ‘인간 고석만’의 행로를 밝혀준 지표라 할 수 있어요. 어머니는 저를 낳은 후유증으로 8년간 앓다가 떠나셨고, 선생은 쉰다섯 한창나이에 한을 품은 채 떠나셨어요. 뒤늦게나마 ‘못다 한 이야기’를 남겨 한을 풀어드리고 싶어요.”

그래서 ‘고석만의 첨병’ 첫 장을 김기팔의 역작 드라마 <땅>으로 열기로 했다. 1991년 1월 첫 방송부터 충격과 파란을 몰고 온 <땅>은 방송사는 물론 청와대까지 ‘높으신 분’들의 심기를 거스른 죄로 불과 15회 만에 중단됐다. “조기 종영의 울분을 술로 달래다 쓰러져 끝내 눈을 감은 그날, 91년 12월24일이 바로 <땅>의 마지막회 방송 예정일이었어요. 그래서 더더욱 잊을 수가 없지요.”

실제로 두 사람은 1981년 첫 정치드라마 <제1공화국> 때부터 10년간 동고동락한 ‘환상의 콤비’였다. ‘실존 대통령(이승만 역 최불암)이 등장하는 첫 드라마’로 화제를 모은 <제1공화국>이었지만 ‘간첩을 미화했다’는 이유로 두 사람은 나란히 안기부에 끌려가 고초를 겪어야 했다. 첫출발부터 그처럼 순탄치 않았던 그의 작품 궤적은 내내 ‘중도하차’의 연속이었다. ‘공화국 시리즈’ 때마다 권력층의 외압은 물론이고, ‘3김’을 비롯한 등장인물들의 민감한 반응과 주문에 시달렸고, 그럴수록 시청자들의 관심과 호응은 뜨거워졌다. <거부실록>, <야망의 25시> 같은 ‘재벌 시리즈’ 역시 그 못지않은 장애물과의 싸움이었다. “김대중·김영삼·김종필 쪽의 반응이 달랐고, 삼성·현대·대우 등등 재벌마다 대응 방식도 달랐어요. 방송할 때는 한마디도 밝힐 수 없었지만, 이제는 말할 수 있는 대목들이 있지요.”

그가 ‘이제는 말하고자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외압보다 더 깊이 묻어두어야 했던 ‘방송사의 내부 공범자’들이다. “방송 이전에 기획 단계나 준비 과정에서 ‘내부 검열’에 막혀 뒤집어진 작품까지 더하면 다 밝힐 수조차 없어요. 그때마다 앞장서서 외압을 끌어들이는 ‘내부 고발자’가 있었죠.”

그런 만큼 지난 10년 사이 ‘친정’이라 할 <문화방송>(MBC)이 정권과 유착한 공범자들의 전횡 속에 ‘공영성’을 잃어가는 모습을 그는 누구보다 가슴 아프게 지켜봐야 했다. “어쩌면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는지…, 이제라도 다시 방송의 주인인 시청자만 보고 일어설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드라마 왕국 엠비시’의 투쟁사를 전하고 싶어요.”

하지만 그는 현역 시절 드라마가 외압에 시달릴 때마다 ‘나는 투사가 아니다’라고 말하곤 했다. “김기팔 선생과 함께 작품을 만들 때 입버릇처럼 했던 말이 있어요. ‘우리 드라마의 주제도, 주인공도 민주주의다.’ 그 정신과 의기가 지금도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2004년 제작 현장을 떠나 <교육방송>(EBS) 사장을 맡은 그는 경영자로서도 성공적인 평가를 받았다. “무슨 일이든 사람이 중요하다는 생각에, 직원들의 이름을 모두 외우는 일부터 시작했어요.”

그의 ‘치밀하고 꼼꼼한 기획력’은 이번 연재에서도 여지없이 발휘될 예정이다. 그는 전주에서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시작된 50여차례의 가출을 감행한 ‘문제아’였으나, 중학교 때 그 가출 일지를 쓴 <외가집 가는 길>로 ‘전국 학생 시나리오 공모’에 뽑히더니, 중앙대 시절 ‘전국대학방송경연대회’에서 단막극 <흑설>로 작품·극본·연출·기술·연기상 등 5개 부문을 휩쓸었다. 피디이기 전에 작가였던 그의 타고난 글솜씨를 맛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사진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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