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이매진] 국악인생 60년 안숙선

2018. 1. 7.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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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의 '아기 명창'에서 한국 '최고 명창'으로

(서울=연합뉴스) 임형두 기자 = 안숙선 명창은 이 시대 최고의 소리꾼이다. 어려서 '아기 명창'으로 소질을 발휘한 안 명창은 마흔 무렵의 나이에 판소리 다섯 바탕을 완창했고, 40대 후반에는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그리고 국제무대에서 우리 전통문화 선양에 앞장서왔다. 소리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지 60주년이 된 2017년을 보내면서 지나온 삶을 함께 더듬어보고 새해 소망도 들어봤다.

'그네를 탄 춘향' 무대에 선 안숙선 명창 [사진/국립국악원 제공]

"높은 봉 상상봉이 평지가 되거든 오시려오 / 사해 너른 바다 육지가 되거든 오시려오"

한양 낭군을 향한 옥중 춘향의 그리움이 통절했다. 변학도의 수청 명령을 당당히 거역하고 정절을 꿋꿋이 지켜내는 춘향. 시련을 견디고 끝까지 수절하는 천하절색의 기개가 관객의 마음을 뭉클하게 울렸다.

고진감래인가? 상황의 극적 반전! 암행어사가 돼 돌아온 이도령과 옥중 시련을 이겨낸 춘향이 향단, 방자, 월매 등과 함께 손에 손을 잡고 덩실덩실 춤췄다. 그리고 재회의 기쁨을 신명 나게 노래했다. 이어지는 '사랑가'의 열창! 130석 규모의 공연장을 뜨거운 열기로 채우는 절정의 대단원이었다.

"이리 오너라 업고 놀자 / 이리 오너라 업고 놀자 / 사랑 사랑 사랑 내 사랑이야 / 사랑이로구나 내 사랑이야 / 이히이히 내 사랑이로다"

지난 12월 8일 저녁 서울 국립국악원 풍류사랑방에서 펼쳐진 작은창극 '그네를 탄 춘향' 공연 현장. 하얀 치마·저고리 차림에 부채를 들고 무대에 선 도창(導唱) 안숙선(安淑善·69) 명창은 울림 큰 소리와 원숙한 연기로 무대를 감명 깊게 이끌어나갔다.

그 며칠 뒤 인터뷰를 위해 서울 강남구 헌릉로 자택을 찾았다. 안 명창은 나지막한 산자락에 아늑하게 앉아 있는 자택의 연습실에서 수수한 차림과 얼굴로 기자를 반가이 맞았다. 때 이른 한파가 몰아친 날이었지만 가야금과 북, 십폭(十幅)병풍이 놓인 연습실에는 안온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한 해의 끝자락이어서일까? 안 명창은 한 해를 보내는 소회와 함께 새해에 대한 다짐을 차분한 어조로 조곤조곤 들려줬다.

"칠십 나이가 눈앞에 다가와서 더 그런가요? 세월이 쏜살같다는 말이 실감 나는 요즘입니다. '하루하루를 좀 더 꽉꽉 채우며 살걸' 하는 아쉬움이 남아요. 그러면서도 후학들에게 도움되는 밀알이 돼야겠다는 다짐으로 저 자신을 위안해본답니다."

어린 시절의 안숙선(사진 오른쪽) 명창

◇ 국악 집안에서 자라난 '아기 명창'

안 명창의 60년 경력은 놀랍다 싶을 만큼 화려하다. 1957년 여덟 살의 나이에 국악을 만난 안 명창은 1979년 국립창극단에 들어간 것을 계기로 기량을 맘껏 발휘해 남원 춘향제 전국명창경연대회 대통령상(1986년), 판소리 다섯 바탕 완창,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 산조 및 병창 보유자 지정(1997년), 국립창극단 예술감독(1998~2005년), 옥관문화훈장(1999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교수(2000~2013년), 프랑스 문화훈장과 대한민국 문화훈장(2011년) 등의 경력을 잇달아 쌓아가며 국악 발전과 선양을 국내외에서 이끌었다. 현재는 춘향제전위원회 위원장직을 8년째 맡고 있다.

안 명창과 국악의 만남에는 외가의 영향이 컸다. 이모(강순영)는 가야금을, 외당숙(강백천)은 대금을 연주했고 외사촌(강도근)은 판소리의 명인이었다. 외가를 드나들며 국악의 묘미를 자연스레 몸에 익혔던 것.

"여덟 살 때의 어느 날이었어요. 가야금을 치던 이모님이 허리가 결린다며 방바닥에 누우시기에 등허리에 올라 자근자근 밟아드렸지요. 이모님은 '시원하다! 시원하다!'고 감탄하시더니 가야금을 잡고 앉아보라는 거예요. 심부름 잘하고 야무진 조카여서 더 귀여웠을까요?"

이모의 손을 잡고 남원국악원에 들어간 안 명창은 주광덕 명인에게서 판소리를 배우며 소리 세계에 흠뻑 빠져들기 시작한다. 집에서는 이모와 외사촌한테서 가야금과 판소리로 예인의 길을 차근차근 다져갔다. 흥보가, 적벽가, 춘향가, 심청가, 수궁가 등을 익히고 가야금 산조와 병창을 공부한 것. '아기 명창'은 이때 들은 찬사 섞인 별칭이었다.

"복이 많았어요. 이모와 외사촌에게서 소리와 악기를 공짜로 배울 수 있었으니 말이에요(웃음). 소리의 고장인 남원에서 태어나고 자란 것도 큰 도움이 됐고요. 국악원이 광한루원 옆에 있어 초등학교 때 심심하면 친구들과 그곳에 가서 뛰놀았답니다. 오작교를 건너고 광한루를 오르내리면서요. 지금도 '춘향가'에 유달리 애착이 가는 이유랍니다."

안 명창을 전국 최고의 소리꾼 반열에 올려놓은 또 하나의 디딤돌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일생을 통틀어 가장 존경하는 스승으로 받드는 만정 김소희(1917~1995) 선생의 부름이었다. 해외순회공연을 준비 중이던 만정은 싹수 있는 남원의 소녀 명창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한번 보자'며 서울로 오게 했다.

1968년 무렵에 국립국악협회 회원이 된 안 명창은 국창인 만정에게서 춘향가, 흥보가, 심청가를 익힌 뒤 향사 박귀희(1921~1993) 선생에게선 가야금 병창을 배우게 된다. 그리고 정광수의 수궁가, 박봉술의 적벽가, 정권진의 심청가, 성우향의 심청가도 야무지게 체득해나간다.

안 명창은 "예술적 확신이 없던 10대 후반 나이에 국악계의 거목이자 금자탑이셨던 이분들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찔한 생각도 든다"며 "특히 만정, 향사 선생님은 오늘의 저를 낳고 품어주신 보금자리였다"고 감사의 마음을 나타냈다.

"선생님은 '어디 가서든 품격을 잃지 말라' '공인답게 행동하라'며 인간됨을 무엇보다 강조하셨어요. 자만하거나 관객을 속이는 소리를 하면 엄하게 꾸짖으셨습니다. 진정으로 가슴을 울리는 소리는 고고한 품격에서 나온다시면서요."

1998년 평양에서 열린 '윤이상 통일음악회'에서 열창하고 있다.

◇ 국립국장에서 판소리 다섯 바탕 완창 첫발

"갈까보다 갈까보다 / 임을 따라서 갈까보다 / 천 리라도 따라가고 / 만 리라도 따라 / 나는 가지 // 바람도 쉬어 넘고 / 구름도 쉬어 넘는 / 수지니 날지니 / 해동청 보라매 / 모두 다 쉬어 넘는 / 동설령 고개"

판소리 '춘향가' 중에서도 '갈까보다'는 안 명창에게 두고두고 가슴 뭉클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서울에서 호텔 등을 오가며 공연하던 그가 예술적 본향이나 다름없는 국립창극단의 오디션 때 불렀던 대목이어서다.

입단에 성공한 안 명창은 '수궁가'의 무당 역할과 '광대가'의 말뚝이 마누라 역할에 이어 '춘향가'의 향단이 역을 차례로 맡으면서 나날이 쑥쑥 커가는 자신을 발견했다. 안 명창은 "제가 향단이를 할 때 월매 역할을 하셨던 오정숙 선생님은 무섭고도 훌륭한 선배였다"며 "당시 창극의 인기가 대단했는데 훌륭한 예술인들이 모인 창극단에서 활동한 게 큰 행운이었다"고 회고했다.

2013년까지 34년간 계속되는 국립창극단 시절 중에서도 1986년은 유달리 감명 깊은 해였다.

남원 춘향제 전국명창경연대회에서 영예의 대통령상을 안은 안 명창은 서울 중구 장충동의 국립극장에서 대망의 판소리 다섯 바탕의 완창을 시작했다. 그해 '적벽가'를 시작으로 '수궁가'(1987), '흥보가'(1988)에 이어 '심청가'(1989년)와 '춘향가'(1990년)를 차례로 완창해 나간 것이다. 당시 국악계의 다섯 바탕 완창자는 박동진(1916~2003), 오정숙(1935~2008) 명창 정도에 불과했다.

"한 바탕에 5~6시간이 걸리니 완창하고 나면 한동안 몸살을 앓아야 했어요. 건강의 소중함을 깨달은 것도 그때죠. 그 시절만 생각해도 눈물이 절로 납니다. 완창 일정이 잡히면 밤낮없이 가사를 외우고 소리 구조를 익혔어요. 고향인 남원의 춘향제 전국명창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으면서는 제 나름의 사명감도 절실히 깨닫게 됐습니다."

국악계에서 탄탄히 자리 잡은 안 명창은 세계 무대를 향해 날개를 활짝 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조통달 명창과 함께 유럽 7개국 12개 도시를 돌며 한국전통문화 알리기에 앞장섰다. 올림픽 때는 춘향의 역할을 맡으며 세계인들을 한껏 매료시켰다.

안 명창은 "순회공연 전에는 문화와 역사가 다른 외국인들이 우리 전통예술에 과연 얼마나 공감할까 싶었지만 막상 공연을 하고 나니 전혀 기우였음을 실감했다"면서 "오랜 공연시간 내내 졸지도 않고 감동의 세계에 푹 젖어든 관객들의 모습을 보고 출연자로서뿐 아니라 한국인으로서도 큰 긍지와 자부심을 갖게 됐다"고 회고했다. 그러면서 "문화는 만남이자 소통이고 감동이다"고 그 효과를 요약해 들려줬다.

1998년 사물놀이 김덕수 명인 등과 함께 방북해 평양에서 민간 차원의 첫 합동음악회를 가졌던 순간도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다. 당시 안 명창은 김 명인의 북장단에 맞춰 '춘향가'를 불러 남북 음악인들에게 깊은 공감을 얻었다. 안 명창은 "온갖 어려움과 시련을 이기고 춘향과 이도령이 재회하듯이 오랜 분단의 아픔을 안고 있는 우리 민족도 하나가 되어 '춘향가'를 부를 날이 하루바삐 오길 바란다"고 소망했다.

안 명창은 "끊임없이 연습하다 보면 갑자기 득음의 순간이 온다"고 말했다. [사진/전수영 기자]

◇ "소리 공부는 평생 수련…오늘도 쉼 없이 연습"

소리는 무엇이고 득음이란 또 무엇일까? 안 명창은 소리는 창자의 외면(겉)과 내면(속)을 모두 담아내야 한다고 강조한다. 삶의 희로애락을 속 깊이 우러나오는 진솔한 소리로 나타냈을 때 자신과 세상을 울리는 감동이 된다는 것. 이를 위해서는 부단한 연습이 필수란다.

"연습을 놓으면 절대로 안 돼요. 가사는 머리로 외우는 게 아니라 온몸으로 외워야 합니다. 그러려면 반복 또 반복해야 하죠. 열심히 살다 보면 인생의 참의미가 어느 날 문득 깨달아지듯이, 끊임없이 연습하다 보면 어느 순간 갑자기 '아, 이 소리야!' 하고 스스로 깜짝 놀랄 때가 바로 득음의 순간입니다. 득음이란 그 클라이막스이자 찰나죠. 마치 산 능선을 오르내리며 정상부에 설 때마다 느끼는 희열이랄까요? 소리 공부는 평생 수련이랍니다."

풍부한 성량과 명료한 발음으로 무대와 객석을 휘어잡곤 하는 안 명창은 이 득음의 기쁨을 잃지 않으려 몸 관리, 목 관리를 하며 오늘도 쉼 없이 연습한다. 자택 연습실에서는 물론 근처의 세곡천이나 야산에 산책하러 가서도 부단히 자기연마를 한다. 물론 이들 산책로를 걸으면서 '무엇보다 인간됨을 잃지 말라'는 스승들의 가르침도 새기고 또 새긴다. 부끄러움 없는 자기자신과 진정으로 공감할 수 있을 때 세상의 공감을 얻게 된다는 믿음에서다. 이 같은 가르침은 제자들에게도 이어지고 있다.

전통의 보존·전승도 중요하지만 발전·확대를 위해 창의적으로 더욱 노력할 필요가 있다고 안 명창은 강조한다.

"일상에서 우리 전통음악이 듣기 어려운 반면에 서양음악이 위세를 떨치고 있어요. 이렇게 된 데는 시대적 추세도 있겠지만 일반인들이 친근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판소리 사설 등을 좀 더 쉽게 풀어줘야 해요. 국악의 대중화가 다른 데 있는 게 아닙니다. 어려서부터 누구나 자연스럽고 편하게 접하는 음악이 되도록 교육적 접근을 해야 한다는 거예요. 우리 민족만의 흥과 한을 품고 있는 국악은 알면 알수록 정말 매력 있는 음악입니다. 보존·계승에 그치지 말고 창조와 발전으로 나아가자는 얘기죠."

안 명창은 장르 간 만남과 교류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첼리스트 정명화(74) 씨와 3년째 진행하고 있는 '예술세상 마을 프로젝트'가 대표적인 사례다. 현대차 정몽구재단이 주최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가 주관하는 이 프로젝트는 지난해 전북 남원 비전마을과 전촌마을, 강원 평창 계촌마을에서 주목받았다. 임준희 작곡의 '판소리, 첼로, 피아노, 소리북을 위한 세 개의 사랑가' 등을 협연해 관객들의 큰 호응을 얻은 것이다. 두 예인은 2018평창동계올림픽 행사에서도 어울림 무대를 마련한다.

안 명창은 "어느 날 우연히 '한번 해볼까요'라고 했던 게 이제는 서로 동화됐다고 할 만큼 판소리와 클래식이 친숙해졌다"며 "동서양 음악이 밀고 당기는 맛이 갈수록 짜릿하다"고 웃음 지었다.

앞으로의 계획과 소망을 묻자 안 명창은 "목소리가 더 꺾어지기 전에 저의 판소리 녹음작업을 끝내고 싶다"고 했다. '춘향가'와 '적벽가'는 녹음을 완료했으나 나머지 바탕은 과제로 남아 있는 상태. 이와 함께 소리법을 후손들에게 전수하는 저서를 출간하고, 판소리를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판소리전수관을 동편제 본향이자 자신의 고향인 남원에 건립하는 데 힘을 쏟을 예정이다.

자신이 외가로부터 이어받은 국악의 가통은 딸과 손주들에게 전수되고 있어 큰 보람과 함께 뿌듯함을 느낀다고. 거문고 연주자인 딸 최영훈 씨는 국악고교와 한양대 음대를 나와 현재 국립창극단 기악부에서 활동 중이다. 손주들 역시 국립국악중학교와 한양대 등에서 국악을 공부하고 있다.

작년 2월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G-365 평창동계올림픽 성공기원 음악회'에서 안 명창이 '세 개의 사랑가'를 부르고 있다. 당시 첼리스트는 정명화, 피아니스트는 한상일.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8년 1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id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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