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1987' 관람 경찰 수뇌부 "반면교사 삼겠다"

박준호 2018. 1. 4. 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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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청 차장 비롯 국·과장 등 간부 200여명 '총집합'
"경찰에 지울 수 없는 과거…다시는 되풀이 안 돼야"
"경찰 존재 이유는 오로지 국민임을 분명히 깨달아"
"불철주야 노력하는 전체 경찰 사기 꺾이지는 않길"

【서울=뉴시스】고승민 기자 = 4일 오후 서울 광화문의 한 예술영화관에서 경찰청 간부와 직원들이 상영관 1개를 통째로 대관해 영화 '1987'을 관람하고 있다. 영화 '1987'은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을 다뤘으며 경찰이 조직 차원에서 민주화 관련 영화를 단체 관람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2018.01.04. kkssmm99@newsis.com

【서울=뉴시스】박준호 기자 ="착잡하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반면교사로 삼고 노력하겠다."

경찰 지휘부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전국적으로 불붙은 민주화 항쟁을 극화한 영화 '1987'을 30여년 전보다 지금 더 무겁고 겸허히 받아들였다.

4일 저녁 민갑룡 경찰청 차장을 비롯한 국·과장 등 경찰청 간부 200여명이 영화 '1987'을 관람하기 위해 서울 광화문의 한 영화관을 찾았다.

경찰청이 오후 6시40분부터 8시50분까지 통째로 대관한 1개 상영관에는 치안정감급인 민 차장을 비롯해 본청 치안감·경무관 등 지휘부가 거의 다 '집합'했다. 인권 경찰 개혁 추진과 발맞춰 잘못된 과거에 대한 반성 의지를 드러내는 경찰의 분위기를 엿볼 수 있는 한 단면이다.

영화 '1987'은 1987년 1월14일 서울대학생 박종철군이 서울 용산구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던 중 고문을 당해 사망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는 과정과 이한열 최루탄 사망 사건, 6월 민주항쟁을 다루고 있다.

경찰청은 이전에도 영화관을 빌려 단체관람(단관)을 추진한 적은 몇 번 있었지만 민주화 항쟁 관련 영화를 관람하는 건 매우 이례적이다. 이번 '단관'은 이철성 경찰청장의 의중이 반영된 것으로 전해진다.

영화 줄거리의 상당 부분이 예전 경찰의 공권력 남용과 과오를 들춰내는 만큼 대부분의 간부들은 영화관에 입장할 때 표정이 그리 밝지 않았다.

【서울=뉴시스】박준호 기자 = 4일 서울 광화문의 한 영화관에서 민갑룡 경찰청 차장이 영화 '1987'을 관람한 뒤 극장을 나서며 심경을 말하고 있다. 2018.01.04 pjh@newsis.com

이들은 영화 상영 내내 대개 숨죽인 듯 무거운 침묵을 지켰다.

박종철 군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경찰의 물고문으로 사망하는 장면, 당시 치안총감이 사인을 은폐하기 위해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고 기자회견을 하는 장면에서도 간부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말없이 턱을 괸 채 스크린만 응시했다.

"고문살인 자행하는 군부독재 몰아내자!" 캄캄한 영화관에서 정적을 깬 건 영화 후반부에 이한열 열사가 등장하면서부터다.

'1987'에서 이한열 열사 배역을 맡은 배우 강동원이 군사독재 타도를 외치다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쓰러졌다. 이후경찰의 강경진압이 시작되며 시위대가 무참히 짓밟히는 장면이 이어졌다. 30여년 전 민주화 항쟁을 사실에 가깝게 재연한 장면을 지켜보던 간부들은 하나둘씩 조용히 눈물을 훔쳤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분노한 이한열 열사가 시위 도중 경찰이 쏜 최루탄을 머리에 맞고 쓰러지는 장면, 6월 항쟁 당시 서울시청 광장을 가득 채운 시위 인파가 애국가를 합창하는 모습, 민주화 열망을 담은 민중가요 '그날이 오면'이 상영관에서 흘러나올 땐 객석이 조금 술렁였다.

약 2시간10분이 지난 밤 9시 무렵에야 영화가 끝났지만 극장 안은 한동안 미동도 없이 무거운 기류가 돌았다. 대부분의 간부는 입을 닫은 채 조용히 극장을 나왔다.

민갑룡 차장은 6월 항쟁 당시 경찰대학에 재학 중이어서 외출이 제한돼 있었다. 민 차장은 영화를 관람한 뒤 "당시 주변 친구들이 나를 공격할 땐 왜 그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며 "오늘 영화를 보니 이해가 된다. 우리 모두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해야겠다"고 말했다.

【서울=뉴시스】영화 '1987'(감독 장준환)의 한 장면.

당시 의경으로 복무하며 시위 현장에 배치됐던 한 고위 간부도 영화를 관람했다. 그의 친동생은 이한열 열사와 친구지간으로 장례식 때 맨 앞줄에서 상여를 맸다.

이 고위 간부는 "80년대 대학생활을 보내면서 민주화 항쟁을 지켜봤기에 착잡했다"며 "경찰에 지울 수 없는 과거이자 아픈 역사지만 다시는 그런 불행한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반면교사로 삼아야겠다"고 말했다.

또 다른 간부는 "오늘 단체관람이 일부 국민들 입장에서는 호들갑 떤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인권경찰을 향한 경찰의 반성과 의지로 평가해 줬으면 한다"며 "경찰의 존재 이유와 법 집행 목표는 오로지 국민임을 분명히 깨닫는 기회였다"고 전했다.

경찰청의 다른 관계자는 "경찰이 깊이 반성하고 성찰해야 하는 건 분명하지만, 이 영화로 국민의 안전을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는 전체 경찰의 사기가 꺾여서는 안 된다"며 "'왜 경찰만 비난하느냐, 경찰도 그 시대의 피해자다'라고 변명할 수 없듯이 경찰을 고약하게만 바라보는 시선으로 오해하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고 우려하기도 했다.

pjh@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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