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W] 철공소 골목의 마지막 겨울, 장인도 기술도 사라진다
수십년 쇠 깎은 철공 장인들, 마땅히 갈 곳 없어 공장 접기로
"0.01mm까지 깎을 기술 있는데.." 전수자 없어 기술의 脈 끊겨
일본은 1인 공장이 제조업 뿌리
3일 오전 서울 동대문구 용두동 철공소 골목의 한 공장. 3평 남짓한 공간에 쇠 깎는 소리가 요란했다. 이 공장 사장이자 유일한 직원인 황세연(79) 삼원기계 대표가 기계 앞에서 방범 카메라 설치에 쓰는 스테인리스 부품을 깎고 있었다. "가끔 뜨거운 쇠 찌꺼기가 얼굴에 튀어서 화상을 입기도 하지만, 이 손으로 100분의 1㎜까지 정확히 깎아낼 수 있다"고 했다. 소규모 맞춤형 부품이 필요한 이들이 그의 고객이다. 그러나 황 대표는 내달 말까지 공장을 비워야 한다. 이곳에 아파트가 들어서기 때문이다. 그는 "65년째 이 일을 했다. 더 하고 싶지만 받아주는 곳도 없고, 이제는 접어야 하나…"라고 했다.
그곳에서 200여m쯤 떨어진 곳에 김광현(64) 대표의 공장이 있다. 그의 별명은 '유압 재키(차량 등 무거운 물건을 들어올리는 장비)의 달인'. 자동차 재키 등 100여 가지 재키를 수리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다. 김 대표는 최근 일이 끝나면 공장 이곳저곳에 널린 도구를 정리한다. 이곳을 떠날 채비를 하는 것이다. "새로운 곳으로 옮겨 다시 시작하기엔 힘에 부친다"고 했다.
철공소가 밀집해 있는 서울 용두동은 "사람 시체 말고는 다 만든다"고 알려진 곳이다. 하지만 도심 재개발로 이곳에 있는 철공소들이 내달 말까지 모두 나가야 한다. 이곳에서 40년 가까이 일했던 '철공 장인(匠人)'도 사라질 운명이다. 철공소를 받아줄 지역도 없고, 이 기술을 배우겠다는 사람도 없다. 기술의 맥(脈)이 끊어지게 된 것이다.
이곳엔 1인 공장이 70여 곳 남아 있다. 지난해 가을부터 130여 업체가 문을 닫았다. 그중 3분의 2 정도는 경기도 남양주, 구리시 등으로 흩어졌고, 나머지는 폐업 여부를 고민 중이다. 철공소 기술자가 모인 '집적 효과'는 사라진 것이다.
용두동 철공소 골목은 1970년대 청계천에서 넓은 작업 공간을 찾아 이주한 이들이 모이면서 조성됐다. 나사·볼트·철판 등 재료 도매상부터 선반·밀링 등 가공업체, 그리고 각종 기계를 수리하는 소규모 공장이 밀집해 있어 '원스톱 작업'이 가능했다.
제조업에 뜻을 품고 온 젊은이들이 있지만, 이들도 떠나야 한다. 기계를 만진 지 만 3년 된 임선보(31)씨는 조립하고 금속을 다듬는 데 흥미를 느껴 다니던 디자인 회사를 그만두고 재작년 이곳으로 들어왔다. 그는 "일을 배우려면 10년은 걸리는데 기계를 계속 만지지 못할까 걱정"이라고 했다.
자동화 설비가 보편화됐지만, 제품의 마지막 부가가치를 만드는 것은 장인들의 기술이다. 일본은 '모노즈쿠리(もの 造り·혼신의 힘을 쏟아 최고 제품을 만든다)' 정신으로 1인 공장이 쉽게 문을 닫지 않는다. 오히려 일본 정부는 이런 중소기업을 70만개(2014년 기준)에서 140만개까지 확대하는 '일본산업 부흥 플랜'을 추진 중이다. 박성택 중소기업중앙회 회장은 "대학생들이 IT 벤처를 차리려 해도 부품이 필요하고 기계가 필요하다"며 "이들이 수십 년 쌓은 기술과 젊은이들의 아이디어가 결합해 정보통신 기술이 융합된 디지털 장인 기업이 나오는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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