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아들과 손잡고 20여년 '큰나무'로 우뚝 섰네요"

2018. 1. 2. 2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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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짬】 발달장애인 공동체 개원 문연상·손인실 부부

강화 큰나무캠프힐에서 함께 생활하고 일하는 발달장애인들과 문연상(왼쪽 셋째) 목사·손인실(오른쪽 셋째) 교사 부부가 작업장인 큰나무 카페에서 함께 했다. 일부 출퇴근하는 장애인은 빠졌다.

“우연찮게 장애인 사역을 맡은 지 20여년인데요, 이렇게 강화도 시골 마을에서 빵을 굽게 될 줄 상상이나 해봤겠어요? 장애인 친구들과 계속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이, 끝까지 책임을 져야겠다는 마음이 저를 여기까지 이끌었던 것 같아요.”(문연상 목사)

“글쎄요. 특별한 인연은 모르겠어요. 그냥 고교시절부터 막연히 장애인을 돌보는 일에 끌렸던 것 같아요. 마음이 편하다고나 할까요?”(부인 손인실 교사)

지난해 11월 강화도 양도면 도장2리 진강산 기슭에서 문을 연 발달장애인 생활공동체 큰나무캠프힐의 대표 문연상 목사와 교사 손인실씨 부부는 미리 약속이라도 한 듯 똑같은 대답을 했다.

“처음 시작할 때 마음먹은 게 있다면 ‘운영자만 살찌우는 시설은 만들지 말자’였어요. 끝까지 ‘함께’ 건강한 삶을 일구고 싶어요.”

1994년 교회 청년부에서 만나 결혼
신학대생 남편 우연히 ‘장애인부’ 사역
특수교육센터 이어 큰나무학교 세워
“학교 울타리 벗어난 뒤 ‘자립’ 고민”

2013년 독일 캠프힐 견학하며 ‘영감’
3년 준비 강화도 ‘큰나무캠프힐’ 열어

강화도 양도면 도장2리 산기슭에 자리한 카페 큰나무는 큰나무캠프힐 공동체 가족들이 농장에서 키운 농산물을 활용하는 작업장이자 마을 주민들을 비롯한 지역사회와 소통하는 창구가 되고 있다.

장애인과의 인연은 부인 손씨가 먼저였다. “대학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했는데 특히 ‘장애인 복지’에 관심이 끌려 대학원에서도 ‘정신지체아 부모교육’ 관련 논문을 썼어요. 장애인복지단체에서 일하면서 목동의 평광교회에서 장애인부 봉사활동을 했는데, 그때 청년부 회원으로, 신학대생인 남편을 만나 1994년 결혼을 했지요.”

장로회신학대를 다닌 남편 문 목사는 94년 서울 봉천동의 꿈꾸는교회(옛 남서울제일교회)에 전도사로 시무할 때 장애인부와 인연을 맺었다. “애초 ‘상담’ 공부를 더 할 계획이었는데, 운명처럼 장애인 사역이 다가왔어요. 그런데 아이들과 함께하면서 행복했지만, 아쉬운 점도 많았어요.”

실제로 많은 한국 교회에서 ‘장애인부’를 두고는 있지만, 대부분 별도의 공간을 두고 돌봐주는 수준에 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립적인 생활인으로 키워주는 교육 프로그램이 절실했다.

부부는 96년 12월 신림동에 발달장애인 특수교육센터를 세워 10년간 교육과 언어치료 등을 실천했다. “90년대 중반에는 정부가 특수교육 지원금을 주지 않아 부모가 매달 약 200만원의 치료비를 부담해야 했어요. 뜻 맞는 장애인 사역자와 함께 저렴한 비용으로 이용할 수 있는 센터를 만들었어요.”

2006년에는 부모들과 함께 방과후 대안학교인 큰나무학교로 전환했다. 중·고등학생과 성인기 전환을 앞둔 20대 초반 청년 등 20명이 내내 함께했다.

“그런데 학교를 졸업하면 아이들이 더 이상 갈 곳이 없었어요. 집에 틀어박혀 있거나, 아니면 시설로 들어가야 할 형편이었죠. 어엿한 한 사람의 생활인으로 자립할 공간이 필요했어요.”

2013년 큰나무학교를 부천에서 시흥으로 이전한 부부는 여러가지 모델을 수소문한 끝에 학부모들과 함께 장애인 생활공동체인 캠프힐의 독일 본부를 견학했다. 캠프힐은 발도르프 인지교육의 한 갈래로, 1940년 오스트리아 출신 의사 카를 쾨니히의 인지학과 철학을 바탕으로 영국 스코틀랜드의 애버딘에서 처음 세워졌다. 현재 전세계 100여곳에서 운영되고 있고, 국내에는 경기도 양평의 슈타이너학교(교장 김은영)가 맨 처음 도입했다.

“독일에 가보니 캠프힐 전체가 안온하고 좋아 보였어요. 수용소 같은 시설에 갇힌 우리 장애인들의 무표정하거나 무기력한 모습을 많이 봐왔는데, 그곳 장애인들은 행복해 보이더라구요.”

부부는 2014년 말부터 ‘벽돌 한 장 콘서트’를 열어 캠프힐 건립기금 마련에 나섰다. 2년 만인 2016년 말 지금의 터를 마련해 착공을 했고, 그로부터 1년 만인 지난해 11월 마침내 큰나무캠프힐 준공식을 할 수 있었다. 큰나무학교 이전식과 사단법인 설립식도 함께 했고, 카페 큰나무도 개업했다.

지난해 11월 25일 열린 큰나무캠프힐 개원 잔치에서 2014년 ‘벽돌 한장 콘서트’ 때부터 응원을 해온 평화의나무합창단이 축하 공연을 하고 있다.

이날 캠프힐 개원 잔치 때에는 특히 인근 도장2리 이장을 비롯해 220여가구의 주민들도 참석해 기꺼이 축하를 해줬다. 이는 문 목사 부부가 4년 전부터 1800평 규모의 농장을 장기임대해 마을 사람들과 교류하며 신뢰를 다져온 덕분에 가능했다.

“도시에서는 발달장애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어요. 캠프힐에서는 다 함께 농사를 지으며 자급자족을 해요. 밭을 일구고, 파종하고, 기르고, 거두고, 갈무리하고 가공하는 일까지 다 하는 거지요.”(문 목사)

캠프힐에는 현재 문 목사 가족과 발달장애인 6명(19~24살), 교사 4명이 모여 산다. 가장 나이가 많은 박상일씨는 3살 때 특수교육센터에서부터 지금껏 함께하고 있다. 장애인 4명은 입주해서 공동생활을 하고 있고, 인근 마을에 부모까지 세 가족이 이주해 일부는 출퇴근을 하고 있다. 새로 입주할 가족도 계속 늘어날 예정이다.

캠프힐에서는 우리밀로 빵을 만들어 일상의 식생활도 해결하고 카페에서 팔기도 한다. 제빵은 문 목사가 주로 하고 있는데, 무화과빵, 먹물 치아바타 등을 주민들이 즐겨 사가고 있다고 한다.

“처음에 오지와 같은 시골 구석 카페에 누가 오겠냐고들 걱정도 했는데, 뜻밖에 입소문이 나면서 많이들 찾아오고 있어요. 덕분에 장애청년들이 자연스럽게 손님들과 소통하며 어울리고 있네요.”(문 목사)

“무엇보다 함께 생활하고 일하면서 청년들의 얼굴이 한결 밝아지고 몸도 건강해졌어요. 자신감도 많이 생겼구요. 관리자와 대상자로 구분되는 일반 시설과 달리, 여기서는 소외되지 않고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생산자이자 생활인으로 한몫을 다하니까요.”(손 교사)

부부는 “기존 마을 안에서 발달장애인들이 어울려 함께 사는 ‘한국형 캠프힐의 모형’을 일구어 나가겠다”고 다짐했다.

ccandori@hani.co.kr, 사진 큰나무캠프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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