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이로운 풍경, 생명

송민령 2018. 1. 2.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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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민령의 뇌과학 에세이-1] 감기로 골골거리던 2014년 늦가을이었다. 과학 저널 '사이언스'의 홈페이지를 뒤적거리다가 면역 세포인 T세포(아래 동영상에서 주황색)가 표적 세포(아래 동영상에서 파란색)를 공격하는 영상을 보게 되었다. T세포는 바이러스에 감염된 세포와 암 세포를 파괴하거나, 항원에 대한 정보를 기억했다가 같은 항원을 다시 만났을 때 면역계를 재빨리 활성화하는 등 면역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위 영상에서 왼쪽은 T세포와 표적세포를 둘 다 보여주고, 오른쪽은 T세포만 보여준다. 영상에 보이는 주황색과 파란색은 T세포와 표적세포의 본래 색깔이 아니며, 세포 내부에 형광 단백질을 발현시켜서 얻은 것이다. 예컨대 녹색 형광 단백질(green fluorescent protein)이라는 형광 단백질은 파장이 488나노미터(㎚) 근처인 푸른빛을 흡수한 뒤, 파장이 509㎚인 녹색빛을 내놓는다. 따라서 T세포 내부에 녹색 형광 단백질을 발현시킨 뒤 푸른빛을 쏘아주고, 현미경에 녹색빛만 검출하는 필터를 달면, T세포가 있는 위치만 밝게 보일 것이다. 여기에 디지털로 주황색을 입히면 위와 같은 이미지를 얻을 수 있다.

그런데 세포 내부에 발현된 미량의 단백질이 내는 형광은 대개 양이 적어서 검출하기가 어렵다. 강한 빛을 쏘아서 단백질이 더 많은 형광을 방출하도록 하는 방법도 있지만, 강한 빛은 형광 단백질과 생체 조직을 손상시켜서 여러 번 오래 촬영하지 못하게 한다는 단점이 있다. 한번 촬영할 때마다 시간도 오래 걸린다. 살아 움직인다는 것이 생명 현상의 중요한 특징인데 이래서야 세포나 세포 내 단백질들의 활동을 관찰할 수가 없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온 것이 2014년 가을 사이언스에 게재된 격자 시트광 현미경(lattice light sheet microscopy)이다. 격자 시트광 현미경은 아래 동영상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아주 얇은 시트광이 세포를 지나면서 형광 단백질을 들뜨게 하는 방식을 사용한다. 그리고 이렇게 얻은 2차원 이미지들을 합성해서 3차원 이미지를 만든다. 세포 전체가 아닌 시트광에 해당하는 얇은 단면에만 빛이 가해지기 때문에, 격자 시트광 현미경은 강한 빛이 형광 단백질과 생체 조직을 손상시키는 정도를 극적으로 줄인다. 더욱이 초당 300프레임이나 찍을 수 있어서, T세포가 표적세포를 공격하는 것처럼 경이로운 생명 현상을 동영상으로 촬영할 수 있었다.

하필이면 감기로 골골거릴 때 보았던 이 영상은 묘한 감동을 주었다. '지금 내 몸 안 어딘가에서 면역세포들이 저렇게 싸우고 있겠구나'라고 생각하니, 어쩐지 응원하고 싶기도 하고, 신나기도 하고, 신비롭기도 했다. 교과서에서 T세포에 대한 지식을 배울 때나, T세포의 작용을 도식화한 그림을 보았을 때와는 아주 다른 느낌이었다.

어디 면역세포뿐일까? 지금 이 순간에도 내 몸 안에서는 온갖 경이로운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내 몸이기는 하지만 나 조차도 모두 알지 못하는, 내가 완전히 통제할 수 없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수십 년간 나를 지탱해오고, 나와 함께 변해 온 것들… 매일 세수할 때 내 얼굴을 보면서도 알지 못했던 낯설고도 반가운 느낌이 밀려들었다.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퇴근 무렵 힘들 때마다, 열심히 뛰는 내 심장과, 자세에 따라 수축하고 펼쳐지는 근육과, 매 순간 나와 함께 변해가는 뇌 속 신경세포들을 볼 수 있다면, 그건 얼마나 멋진 일일까?

공초점형(confocal) 현미경으로 촬영한 생쥐 해마. 해마는 사건 기억과 공간 탐색에서 중요한 뇌 부위이다. 분홍색, 연두색, 하늘색 부분은 각각의 신경세포를 나타낸다. 본문에 설명된 것처럼 형광 단백질이 내는 형광을 촬영한 뒤 디지털로 색깔을 입혀서 얻은 이미지다. / 사진 출처=Flickr(zeissmicro)
생명 연구를 돕기 위해 개발된 기술들은 점점 더 다양한 생명 현상을 우리 눈으로 볼 수 있게 해주고, 생명 과학은 나조차도 몰랐던 내 몸 안의 타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발전한 과학과 기술 덕분에 비로소 만나게 된 내 몸 안의 현상들과 그 현상들에 대한 이야기에는 묘한 설렘과 매력이 있다. 그 이야기가 매 순간 느끼고, 생각하고, 기억하는 내 뇌의 것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뇌에 대한 이미지, 이야기와 함께 이 코너를 풀어갈까 한다.

2018년 첫 글은 뇌 속의 멋진 풍경들을 소개한 웹페이지를 선물하면서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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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민령 작가(카이스트 바이오 및 뇌공학과 박사과정)]

※참고자료:

[1] Bi-Chang Chen et al. (2014) Lattice light-sheet microscopy: Imaging molecules to embryos at high spatiotemporal resolution. Science 346(6208): 1257998.

[2] '초고해상도 현미경' 노벨상 수상자, 다시 한걸음 더 (한겨레 사이언스온 2014.10.28) http://scienceon.hani.co.kr/206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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