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뜨면 핵연료 보이는 원전 옆에서 30년 살았다"

2017. 12. 28.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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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차 전력수급기본계획 공청회 찾은 원전 주변지역 주민들
원전 주변지역 경제, 탈원전 뒤엔 낙후 넘어 공동화 우려
"주민 반대해도 일방적으로 원전 짓더니 이제는 없앤다니"
산업부 "그간 정부가 행정편의식으로 원전 건설한 것 반성"

[한겨레]

경북 경주 양남면 나아리 나아해변에 자리 잡은 월성원전 1~4호기. 월성 1~4호기 뒤쪽에 신월성 1~2호기와 방폐장이 있다. 김일우 기자 cooly@hani.co.kr

“주민 의사와 상관없이 정부가 일방적으로 원전을 지어놓은 뒤 지난 40년간 행복권, 지역개발권이 박탈된 채로 살았다.”

정부의 탈원전 친환경 에너지 전환 정책을 뒷받침하는 8차 전력수급기본계획안(2017∼2031년 전력수요 전망과 전력설비 확충 계획) 확정을 앞두고 원자력발전소 주변지역인 경북 경주와 울진 주민들이 울분을 쏟아냈다. 이들은 28일 오전 서울 여의도 한국전력 남서울지역본부에서 열린 8차 전력수급기본계획안 공청회를 찾아 정부의 일방통행식 원전 건설 사업으로 “지난 세월 희생을 강요당한 채로 살았다”며 정부에 대안을 요구했다.

지난 14일 산업부는 8차 전력수급기본계획안을 발표하며 ‘월성 1호기는 지속 가능한 생산 설비로 볼 수 없다’고 밝혔다. 월성 1호기는 내년 상반기 가운데 폐쇄 절차에 들어갈 것이 유력하다. 또 정부는 신한울 3·4호기 등 신규 원전 6기 건설 계획도 백지화했다. 약 반년에 걸쳐 각계 의견을 수렴하며 만들어진 8차 수급계획안이지만, 수십년간 ‘울며 겨자 먹기’로 원전에 의존해 살아온 지역 주민들에겐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내용이었다.

특히 내년 상반기 중 폐쇄가 유력한 월성 1호기 주변 지역 주민들의 항의가 거세다. 월성 1호기는 1975년 공사를 시작해 1983년 상업운전을 시작한 대표적 노후 원전이다. ‘너무 오래돼 위험하니 조속히 폐쇄해야 한다’는 주장이 많았지만, 정부는 지난해 2월 월성 1호기 수명을 2022년까지 연장했다.

월성 1호기 주변에는 1997∼1999년 사이 하나둘 건설된 월성 2∼4호기와 2012년과 2015년에 들어선 신월성 1·2호기도 있다. 또 가까운 곳에 2015년 8월 본격 가동된 방사성 폐기물 처분장도 있다. 이들이 밀집한 경주 양남면과 양북면은 경주 안에서도 ‘원자력 군락’이라는 특수한 의미를 띄는 곳이다. 오래전 행정구역 통합으로 월성군과 경주시가 합쳐졌지만, 여전히 이곳 주민들은 ‘우리 동네 월성’이라고 부른다.

경주에서 온 한 주민은 “정부가 일방적으로 원전을 지은 뒤 지나고 보니 지역이 개발될 모든 조건이 사라져서 우리는 원전과 같이 살아갈 방법을 터득할 수밖에 없었다. 지역은 낙후할 대로 낙후했고 인구도 얼마 없다”며 “월성 1호기를 2020년까지 정상가동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28일 오전 서울 여의도 한국전력 남서울지역본부에서 열린 ‘8차 전력수급기본계획 수립을 위한 공청회’에서 원전 주변지역 주민들이 정부의 탈원전 정책에 항의하며 대책 마련을 요구하고 있다. 최하얀 기자 chy@hani.co.kr

이 주민들은 지난해까지도 월성 1호기 수명연장을 반대하며 정부와 갈등을 빚다가, 상생협력금 1310억원을 한수원으로부터 받는 것에 합의했다. 현재까지 825억원이 집행된 상태다. 원전 주변지역 주민들은 ‘발전소 주변지역 지원법’에 따라 발전사업자인 한수원으로부터 정해진 지원금도 받는다. 원전과 함께 지역경제가 사라지고, 대신 원전 사업자가 지원하는 현금이 주민들의 소득수준을 유지하는 유일한 재원으로 굳어지는 경우는 흔하다. 원전 의존도가 높은 까닭에 원전이 싫어도, 탈원전 또한 반가울 수가 없다.

“우리 월성 사람들이 시골 사람이라고 이렇게 대해도 되나. 작년엔 월성 1호기에 안전 설비를 더 들여놔서 다른 원전들보다 안전하다고 수명 연장을 하겠더니, 이제는 안전하지 않다는 거 아니냐. 누구를 믿나. 이래서야 정부를 믿을 수 있나. 경주에 중·저준위 방폐장 유치하면서 고준위 폐기장(건식 저장고) 2016년까지 옮긴다고 했는데 이것도 말이 없다.”

신규 원전 신한울 3·4호기 백지화 소식이 날아든 울진도 비슷하다. 울진에는 1982년 착공해 1988∼1989년 상업운전을 시작한 한울 1∼4호기가 있고, 2004∼2005년에는 한울 5·6호기가 준공됐다. 신형 원전인 신한울 1·2호기는 현재 거의 준공돼 상업운전을 앞두고 있다.

한 울진 주민은 공청회가 진행되는 내내 ‘나 한마디만 하게 해달라’며 호소하다가 마이크를 잡자 “30년 헌신한 애국자를 뭐로 보는 건가”라고 성토했다. 그는 “1980년대엔 전두환 정권이 (원전 유치를) 막 밀어붙였다. 강제로 지어놨다”며 “그 뒤에 김대중 정부 때도 정부가 고향 사는 사람들을 내몰며 ‘너그가 전력 사업에 협조해달라’고 했다. 그래놓고 어느 날 문재인 정부가 탈원전 한다고 한다. 고향 다 버린 우리도 애국자다. 눈만 뜨면 핵연료가 보이는 곳에서 살고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울진 주민은 “탈핵이건 신재생이건 수십 년 희생당한 지역 주민에게 대안 경제 인프라를 달라”고 호소했다.

공청회에 패널로 참석한 8차 전력수급기본계획 워킹그룹(산업부가 임명한 전문가들)은 이런 주민들의 의견에 중간중간 답하면서 어렵게 공청회를 이어나갔다. 한밭대 조영탁 경제학 교수는 ”원전이나 송전선 주변지역 주민들의 고통을 너무나 잘 안다”며 “월성의 경우 사용후핵연료 저장시설이 곧 포화 상태가 되는데, 이에 대한 해결책은 정부가 주민과 정부, 국회까지 참여하는 제대로 된 공론화를 거쳐 사회적 합의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공청회에 참석한 양이원영 환경운동연합 에너지국 처장도 “지금 탈원전을 반대하는 주민 상당수가 과거엔 원전 유치를 반대했던 분들”이라며 “원전에 지역경제가 종속돼 벌어지는 일인 만큼 정부가 ‘전환 비용’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에너지 전환 정책에 따라 낙후를 넘어 ‘공동화’가 우려되는 지역들을 위한 대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소란 속에 공청회가 끝나기 직전 산업부 최우석 전력산업과장은 무거운 표정으로 “그동안 산업부가 너무나 많은 분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 짧은 시간에 일을 진행한 것을 반성한다”며 “앞으로는 대형 발전소 건설 사업 때 지역주민의 의견을 조금 더 세심하게 경청하겠다”고 말했다. 공청회는 물리적 충돌은 없이 시작 2시간여 뒤 끝났다. 산업부는 29일 전력정책심의위원회를 열어 8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을 확정할 예정이다.

최하얀 기자 ch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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