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년 전 출시된 당뇨폰, 한국선 구경도 못해'..반(反) 4차 산업혁명 규제 백태

김도년 2017. 12. 25.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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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SDI, '4차 산업혁명과 규제개혁' 보고서 발표
온라인 중고차 플랫폼·원격화상 투약기 등 규제로 사업 제약
"신산업 활성화하려면 기존 산업 종사자 안전망 갖춰야"
"신기술에는 사전 허용, 인허가 신속처리, 임시허가 제도도 필요"
벤처기업 인포피아와 헬스피아, LG전자는 지난 2004년 혈당을 측정해 무선으로 데이터를 보낼 수 있는 '어머나폰(일명 당뇨폰)'을 출시했다. 그러나 이 제품은 통신기기에서 의료기기로 분류됐고, 식약처 심사가 진행되면서 생산이 중단됐다. [사진 LG전자]
손가락 끝 혈액을 뽑아 시험용 막대에 올린 뒤 휴대폰에 삽입한다. 폰 화면엔 측정된 혈당치가 뜨고 이 정보는 무선 통신을 타고 병원으로도 전송된다. 2004년 벤처기업 인포피아(현 오상헬스케어)와 LG전자가 개발한 일명 '당뇨폰'이다. 시장에선 "전 세계 원격의료 산업에 돌풍을 일으킬 것"이란 찬사가 쏟아졌다. 하지만 생산은 6개월 만에 중단됐다. 혈당 체크 기능 탓에 통신기기가 아닌 의료기기로 분류되면서 식품의약품안전처 허가를 받아야 했다. 게다가 허가를 기다리는 사이 스마트폰이 등장하면서 2세대(2G) 폰용으로 만들어진 이 기술은 쓸모없어져 버렸다.

인포피아는 기술을 발전시켜 2008년 '블루투스 혈당기'를 또 들고 나왔다. 원격의료가 허용된 영국 등지에서 호평을 받아 이 회사 전체 혈당기 매출액의 87.7%(2016년 기준)를 해외에서 벌고 됐다. 하지만 국내 매출은 미미하다. 의료법상 의사·간호사 등 의료인 없이 환자가 직접 측정한 의료 정보를 병원에 보낼 수 없는 탓에 혈당기의 활용도가 크게 떨어지기 때문이다.

국책 연구기관 정보통신정책연구원(KISDI)은 규제가 기술 혁신을 따라가지 못한 '제2의 당뇨폰' 사례를 조사해 발표했다. 지난 22일 내놓은 '4차 산업혁명과 규제개혁'이란 기획보고서에서다. 상당수의 사례들은 기존 법과 규제가 언급한 것만 허용하고, 나머지는 모두 금지하는 열거주의식(포지티브 방식) 법체계 때문에 발생했다. 이럴 경우 새로운 기술이나 서비스는 일단 불법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개인의 주거 공간을 제삼자에게 대여하는 숙박 공유 서비스가 대표적이다. 숙박 공유업은 '관광진흥법' 상 외국인을 상대로 한 도시민박업·한옥체험업 등으로만 제한적으로 허용돼 국민을 상대로 한 서비스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원격의료도 의료법과 같은 법 시행규칙 상 의료인으로 규정된 사람(의사·한의사·조산사·간호사)끼리만 의료 정보를 교환할 수 있어 의사와 환자가 무선 통신기기를 이용해 직접 소통하는 건 불법이다.

과거 업태를 기준으로 마련된 법체계도 '제2 당뇨폰' 확산에 한몫한다. 온라인 중고차 거래 플랫폼은 인터넷 가입자끼리 중고차 거래를 하는 '장터' 개념이지만 3300㎡ 이상의 주차장, 200㎡ 이상의 경매장 등을 갖춰야 하는 자동차관리법의 규제를 받는다. 환자가 화상 통신으로 약사와 소통해 의약품을 제공받을 수 있는 '원격화상 투약기'도 약국 이외 장소에서 의약품 판매를 금지한 '약사법'의 저촉을 받게 돼 있다.

규제 당국이 기존 이해당사자와의 충돌을 우려해 '소극 행정'을 하는 점도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카풀 업체는 다양한 통근 패턴을 반영한 '출·퇴근 시간선택제'를 도입하려 했지만, 택시업자 반발을 의식한 국토교통부는 '출·퇴근'의 개념을 좁게 해석해 평일 아침과 저녁 시간으로 카풀 서비스 시간을 제한한다. 버스를 콜택시처럼 부를 수 있는 '콜버스' 서비스도 기존 노선버스·택시 면허업자로 사업자 범위가 한정되기도 했다.

이광형 카이스트 문술미래전략대학원 교수는 "지금껏 규제 완화 시도가 실패한 데는 기존 규제로 이익을 얻는 집단의 반발과 이를 의식한 규제 당국의 복지부동한 행태가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고 강조했다.

정보통신정책연구원은 신산업을 활성화하려면 역설적으로 기존 산업 종사자 보호를 위한 사회적 안전망 구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호주 뉴사우스웨일스주, 미국 매사추세츠주에서 우버 이용 횟수만큼 세금을 걷어 택시업자를 지원한 사례도 들었다.

강준모 정보통신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기존 산업에 대한 보조금 지급은 사양산업 구조조정을 방해할 순 있지만, 이해관계자 간 갈등을 해소해 신산업 시장 진입을 앞당기는 역할도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정부 규제도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열거주의를 '네거티브(법에서 금지한 것 외에는 모두 허용)' 방식으로 전환하는 것을 넘어 우선 신산업 진입을 허용한 뒤 문제가 생기면 규제하는 '사전 허용-사후 규제' 방식으로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김정언 정보통신정책연구원 ICT전략연구실장은 "규제 당국이 일정 기간 안에 반드시 인허가 결론을 내는 신속처리 제도를 마련하거나 임시허가를 할 수 있는 권한을 주는 것도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김도년 기자 kim.don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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