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별시선]일본을 이기는 방법

배훈 일본변호사·재일코리안2세 2017. 12. 22. 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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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서울 올림픽이 열린 1988년 4월부터 1년 동안 연세대학교 어학당에 다녔다. 당시 회계사보를 하다가 적성이 아니다 싶어 변호사로 전직한 터라 나이는 30대 중반을 넘었고, 어린 아이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한국을 알고자 했다. 그런데 서울에서 만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국적이 무엇인지 물었다.

배훈이라는 한국 이름을 쓰는 내게 국적을 묻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재일동포들이 차별 등을 피해 일본으로 귀화했다면, 그 이후에는 한국 이름을 쓸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한국국적이라고 대답하면 일본국적을 왜 받지 않느냐는 질문으로 이어졌다. 한국인은 물론 재미코리안들도 똑같은 질문을 했다. 사실 식민지 시절 건너온 조선인과 이들의 자손인 이른바 올드커머 재일코리안의 압도적 다수는 이미 일본 사회에 정착한 상태였다. 그리고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일본에서 인생을 마치게 되므로, 그런 점에서 왜 일본국적으로 바꾸지 않느냐는 질문이 이상할 것도 없었다. 광복 70년이 지난 지금도 일본에는 30만명 넘는 올드커머가 차별 속에 한국·조선적을 유지하고 있다.

이렇게 특별한 재일코리안의 태도는 일본의 역사인식과 관련이 깊다. 일본 정부의 인식은 패전 이후 재일코리안을 어떻게 대했는지를 통해 드러난다. 식민지 조선 지배를 정당화했던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은 일본의 패전 이후 ‘관리·동화·추방’ 정책으로 바뀌었다. 기본권을 박탈하기 위해 재일코리안을 외국인으로 만들어 관리했다. 재일코리안을 일본에 동화시키거나 추방하는 방법을 썼다. 식민지배에 대한 반성은 조금도 없었다.

여전히 일본은 달라지지 않은 역사인식에 바탕을 두고 재일코리안을 대하고 있다(이러한 역사는 재일코리안변호사협회 <일본 재판에 나타난 재일코리안>, 이범준 <일본제국 vs. 자이니치>에 생생하게 기록돼 있다).

우리에게 기본적인 권리조차 보장하지 않았던 일본 정부는 지금도 민족교육권과 지방참정권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일본의 지독한 배제정책 피해자인 재일코리안은 깊은 정신적 상처를 입었고 그래서 일본국적에 거부감을 갖게 된 것이다.

1947년 시행된 일본국헌법은 연합국최고사령관총사령부(GHQ)가 기초했다. 전쟁 포기와 전력보유 금지가 규정된 9조도 GHQ 초안에서 나왔다. 하지만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고 1950년 6·25가 터지면서 미국의 전쟁책임 추궁은 중단된다. 오히려 일본의 재무장을 허용해 1950년 경찰예비대, 1954년 자위대가 만들어진다. 이 무렵부터 과거 전쟁을 주도한 세력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정치에 나선다. 그렇게 일본 사회는 조선 지배와 대륙 침략 등 전쟁책임에 대해 스스로 따지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렀다.

일본 정부 관계자나 정치인의 부적절한 역사인식에 바탕을 둔 발언에 한국 국민과 언론이 강하게 반발하는 소식을 일본 언론에서 자주 접한다. 하지만 그런 발언은 일본인 전체의 논의와 합의에 기초한 역사인식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발언들이 가볍고 쉽게 변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따라서 한국인들이 이런 일본인들의 발언에 하나하나 반응할 필요가 없다.

<손자병법>은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고, 적을 모르고 나만 알면 한번 이기고 한번 질 것이며, 적을 모르고 나도 모르면 싸울 때마다 위태롭다”고 했다.

물론 일본은 한국의 적이 아니라 라이벌이고 파트너이지만 손무의 가르침이 통하는 관계다. 일본을 알지 못하고 내놓는 한국인의 항의와 비판은 별다른 효과도 없을뿐더러 일본에서 반한파만 키울 뿐이다. 이제부터라도 한국은 일본을 깊이 연구하고 분석해 장기적인 대책을 세울 필요가 있다.

<배훈 일본변호사·재일코리안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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