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경향신문 선정 올해의 책]정성과 공력으로 빚은 깊은 울림..여운도 짙다
[경향신문]
신문사 출판 담당기자는 매주 수백권의 책더미에서 ‘보석’을 캐내는 심정에 놓인다. 읽는 재미가 넘치면서도 지적 희열과 통찰을 주는 책, 내공이 탄탄하면서도 열린 자세로 독자에게 말을 거는 책은 많지 않아서다. 다행히 올 한 해도 정성과 공력이 깃든, 깊은 울림을 남기는 책들이 우리를 찾아왔다. 경향신문 문화부는 2017년을 돌아보며 10권의 책을 꼽았다. 해가 바뀌고 나서도 서가에 꽂아두고 살펴볼 만한 책들이다. 이 보석들을 아끼고 다듬어 오래도록 빛이 나도록 만드는 건 우리의 몫이겠다.
■지금 여기의 우익은 ‘정통’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설계자들
김건우 지음 | 느티나무책방
해방과 정부 수립 시기를 지나며 ‘학병 세대’는 대한민국의 밑그림을 그리는 역할을 도맡았다. 양심적 우익의 실체를 추적해온 김건우 대전대 교수는 각계에서 활약한 청년 지식인들을 ‘한국 우익의 기원’으로 주목했다. 친일 전력이 없었던 이들은 대개 이북 출신의 기독교도로 반공주의와 우익 성향을 보였다. 그러나 “산업화 시대에 정부 정책을 주도한 사람들이나 민주화 진영에서 저항했던 사람들이나 모두 이념적으로는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가지들”이었다. 김교신, 함석헌, 김재준, 안병무 등 기독교계 학병 세대는 우익 편향 사회에서 ‘숨통을 터주는’ 역할을 했다. “자신들 입장과 같은 극우적 국가주의자가 아니면 모두 좌파로 내모는, 오늘날 우익을 사칭하는 사람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생명의 진화사서 탐색한 지능의 본질
지능의 탄생
이대열 지음 | 바다출판사
여기저기서 인공지능에 관한 담론이 쏟아지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인간의 지능과 뇌의 실체를 규명하는 것이 아닐까. 어렵지만 시급한 이 작업에 이대열 예일대 신경과학과 석좌교수가 도전했다. 결과는 단단하고도 매력적인 과학 교양서의 탄생이다. 책은 RNA부터 뉴런으로 이어지는 생명의 진화사를 훑으면서 지능이 생명체만의 전유물이며 자기복제를 통해 진화해왔다고 주장한다. 특히 인간이 사회적 지능을 발달시켜온 것에 주목하며 인공지능을 둘러싼 막연한 불안감을 해소한다. “지적 능력의 여러 측면에서 기계가 인간을 능가하는 시점이 오더라도 인공지능을 장착한 기계가 자기복제를 시작하지 않는 한 인공지능은 인간을 주인으로 하는 대리인의 자리를 지키게 될 것이다.”
■신이 되려는 인간의 ‘서늘한 미래’
호모데우스
유발 하라리 지음 | 김영사
‘신이 된 인간(Homo Deus)’이라는 제목이 섬뜩한가 아니면 달가운가. 전작 <사피엔스>에서 10만년에 걸친 인류의 역사를 흡입력 있게 되짚었던 유발 하라리가 이번에는 호모 사피엔스 이후로 눈을 돌렸다. 기아와 역병, 전쟁을 견디고 살아남은 인간에게 남은 세 가지 목표는 “불멸, 행복, 신성”뿐이다. 인간이 신과 같아진다는 것이지만, 궁극에는 호모 사피엔스의 종말로 귀결된다. 하라리는 생명과학이 지금처럼 발달하다가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근간으로 하는 인본주의가 궤멸할 것이라는 서늘한 예측을 내놓았다. 45개국에서 500만부 이상이 팔린 책의 작가라는 명성은 ‘허명’이 아니었다. 하라리의 묵시론적 전망에 동의하든 하지 않든, 이 책을 논의의 준거로 삼아야 한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새로운 세상 꿈 꾼 여성혁명 트로이카
세 여자
조선희 지음 | 한겨레출판
주세죽, 허정숙, 고명자. 이들의 이름이 낯설다고 해도 당신의 탓은 아니다. 이들은 20세기 초 경성, 상하이, 모스크바, 평양을 무대로 다른 세상을 꿈꾼 ‘조선공산당 여성 트로이카’였다. 그러나 동지이자 파트너였던 박헌영, 임원근, 김단야에 비해 이들이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에서 담당했던 역할은 조명받지 못했다. 뒤늦게나마 장편 역사소설이라는 형식으로 ‘세 여자’가 걸어온 신산한 삶이 드러났다. 다행스럽고 의미 있는 시도다. 여성이라는 굴레를 안고서도 제국주의와 계급 모순이라는 시대적 상황과 싸워 온 열혈 여성들의 이야기가 흥미진진하다. 실존인물을 다루는 만큼 작가는 철저한 자료조사를 거쳤고, 문학적 상상력이 역사를 배반하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이방인이 복원한 한국 여성 노동자들
여공문학
루스 배러클러프 지음, 김원·노지승 옮김 ㅣ 후마니타스
낮에는 거친 손으로 미싱을 돌리고 밤에는 소설을 읽으며 글을 쓰는 여공들이 있었다. 1989년 여름 기독교단체의 초청으로 한국에 온 한 호주 여학생은 이런 십대 여공들에게 매료됐고, 훗날 ‘여공 문학’을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당시 박사 논문을 뼈대로 쓰인 책이 20여년 만에 국내에서 번역됐다. 강경애, 석정남, 장남수, 신경숙 등의 작품을 분석해 여공들의 삶과 문학, 욕망을 다시 살려냈다. 여성 노동문학에 나타난 섹슈얼리티와 폭력, 재현, 근대성이라는 문제를 비중 있게 탐색했다. 한낱 ‘수기’로 폄하되어온 여성 노동자들의 글이 한국 문학사에서 엄연한 문학으로 자리 잡게 된 배경에는 낯선 이방인의 열정과 노력이 있었던 셈이다.
■재미있는 세상은 디지털 바깥에 있다
아날로그의 반격
데이비드 색스 지음, 박상현·이승연 옮김 ㅣ 어크로스
당대의 현상을 이해할 수 있는 틀을 제공하는 것은 책의 고유한 역할이자 특권이다. 디지털 음원 시대에도 LP를 찾는 사람들이 많고, 스마트폰 의존도가 높아졌음에도 수첩은 여전히 잘 팔린다. 왜일까. 캐나다 출신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디지털 경제의 틈새를 비집고 되살아난 아날로그의 비결을 캐물었다. 아날로그의 부활이 일어나는 현장들을 돌아보면서 그는 이렇게 결론내렸다. 아날로그의 ‘물질성’과 ‘희소성’이야말로 최대 매력이라고. 편집의 매력을 한껏 살린 잡지, 큐레이션으로 승부를 거는 오프라인 서점이 인기를 끌고 있는 요인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사양길에 접어든 지 오래인 인쇄매체 종사자들이 이 책을 유독 반긴 것도 무리는 아니다.
■반갑다, 약자와 연대하는 따뜻한 과학
아픔이 길이 되려면
김승섭 지음 ㅣ 동아시아
대중에게 생소했던 두 개의 이름을 각인시킨 책이다. 사회역학이라는 학문과 김승섭이라는 학자. 질병의 ‘원인의 원인’을 탐구하는 사회역학자인 김승섭 고려대 교수는 지난 4년간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세월호 생존 학생, 소방공무원, 성소수자 등을 두루 만났다. 그리고 혐오와 차별, 고용 불안과 재난이 이들의 몸과 마음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음을 확인했다. 사회 구조와 동떨어져 존재하는 병이란 없다는 사실을 성실한 연구로 입증한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을 테다. 하지만 이 책의 진짜 가치는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전하는 방식이 유려하고도 사려 깊다는 데 있다. “쏟아지는 비를 멈추게 할 수 없을 때는 함께 비를 맞아야 한다”는 소신을 밝히는 젊은 지식인의 다음 책이 기다려진다.
■트럼프를 뽑은 백인들의 진짜 속내?
힐빌리의 노래
JB 밴스 지음·김보라 옮김 ㅣ 흐름출판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 뒤에는 ‘성난 백인들’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러스트벨트 지역에 사는 가난한 백인 노동자들이 뜨거운 지지를 보냈다. 민주당의 전통적 표밭에서 일어난 변화를 이해하려면 추상적 이론보다는 자기고백적 서사가 제격이다. 애팔래치아산맥의 백인 빈곤층 가정에서 태어난 한 명의 ‘힐빌리(hillbilly)’가 쓴 이 책이 각광받은 이유다. 1인칭 시점으로 전하는 백인 노동자 계급의 이야기는 이들의 내밀한 정서를 드러낸다. 마약중독과 가정폭력, 무너진 계층 이동의 사다리, ‘엉클 샘(연방정부)’과 복지에 대한 불신. 이웃 아이들과 달리 저자는 이 세계를 탈출, 예일대 로스쿨 출신의 기업가가 됐다. 인사이더의 솔직하고도 객관적인 고백은 진정한 이해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빅데이터의 위험한 미래에 던진 경고
대량살상 수학무기
캐시 오닐 지음·김정혜 옮김 ㅣ 흐름출판
빅데이터 만능시대의 그림자를 경고하는 여러 책들 중에서도 단연 돋보였다. 대량살상무기(WMD)에 빗대어 작명한 제목도 강렬했지만, 무엇보다 업계에 깊숙이 몸담았던 내부자의 신랄한 고발과 자기비판이 빛을 발했다. 하버드대를 나온 수학자였던 저자는 월가 헤지펀드 퀀트, 데이터과학자로 이름을 날리다가 지금은 빅데이터 알고리즘과 싸우는 전사가 됐다. 그토록 사랑했던 수학이 “취약계층의 피를 빨아먹는 거머리”로 전락해버린 것을 견딜 수 없었다. 효율성만을 앞세워 공정성을 내던진 수학 모형은 “신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알고리즘의 파괴력을 넘어설 길은 없을까. 저자는 “오직 인간만이 공정성을 투입할 수 있다”고 주문한다.
■이 땅의 찬란한 산문의 역시 집대성
한국 산문선(전9권)
안대회, 정민 등 지음 ㅣ 민음사
삼국시대부터 20세기 초까지의 명산문을 선별해 엮은 이 책을 고대했던 사람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민음사에 따르면 지난달 말 출간 이래 16만원에 달하는 세트가 1000세트, 낱권까지 포함하면 1만부 이상 팔렸다. 고전 열풍이라고 하기에는 시기상조일지 몰라도, 여섯 명의 한문학자들이 8년간 머리를 맞대고 한 작업에 걸맞은 화답으로 보인다. 원효부터 정인보까지 229인이 쓴 산문 613편을 번역해 9권에 나눠 실었는데, 1478년에 편찬된 <동문선> 이래 최초이자 최대 규모의 산문 선집이라 한다. 시국을 걱정하는 목소리부터 일상에서 건져낸 단상까지 다채로운 주제의 옛글을 망라했다. “장대한 글쓰기의 전통을 지닌 나라”의 유산을 직접 확인할 값진 기회다.
<김유진 기자 yj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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