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 복지까지 생각한 '착한 패딩' 아시나요?
[경향신문] ㆍ미처 생각 못한 패딩의 ‘속 사정’
예년보다 일찍 찾아온 한파에 영하의 날씨가 이어진다. 따스하고 가벼운 오리털 충전재를 빵빵하게 채워넣고, 얼굴을 포근하게 감싸는 라쿤털을 모자에 부착한 롱패딩이 상점과 거리에 넘쳐난다. 추위는 가깝고, 패딩은 어디에나 있다.
롱패딩 열풍의 화룡정점을 찍은 것은 평창 롱패딩이었다. 10만원대의 ‘가성비’ 좋은 패딩을 구하기 위해 사람들은 백화점 밖에서 밤새 줄을 서서 기다렸다. 한정된 물량 3만장은 순식간에 팔려나갔다. 그런데 3만장의 패딩 안에 든 오리털에 대해서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이제 롱패딩 말고 ‘오리털’에 대해 말할 차례다.
■ 평창 롱패딩이 던지지 않은 질문
“평창 롱패딩이 나왔을 때 RDS(Responsible Down Standard·책임다운기준) 인증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확인이 잘 안되더라고요. 올림픽을 기념해 생산되는 패딩인데 ‘가성비가 좋다’는 내용 말고 어떤 생산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진 것인지에 대한 정보를 얻기 힘들었어요. 왜 이런 점이 이슈가 되지 못했는지 안타까웠습니다.” 직장인 권한라씨(36)가 말했다.
권씨의 말대로 평창 롱패딩이 RDS 기준에 준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오리털이나 거위털을 얻기 위해서 산 채로 가슴털을 뽑는 잔인한 채취 과정이 알려지면서 노스페이스 등 아웃도어 업체는 자발적으로 2014년 RDS 인증을 만들었다. RDS는 산 채로 털을 뽑는 라이브 플러킹(Live Plucking)을 하지 않는 등 윤리적인 방법으로 채취된 다운 제품에 부여하는 인증이다. 노스페이스, 컬럼비아, 밀레, H&M 등이 RDS 인증 다운을 사용한 제품을 내놓고 있다. 평창 롱패딩은 RDS 인증을 받지는 않았지만, 이를 생산하는 중국 현지 공장이 RDS 인증을 받은 공장이다. 평창 롱패딩의 라벨에는 “RDS 기준에 적합한 양질의 원료만을 엄선하여 사용하며, 동물보호를 위해 Live Plucking을 하지 않습니다”라고 쓰여 있다. 평창 롱패딩에 쓰인 다운을 생산한 주원 관계자는 “동물 학대 없이 사육되도록 환경을 갖췄고, 산 채로 털을 뽑지 않고 기계로 도살 후 약품처리로 털을 채취했다”고 밝혔다.
■ ‘윤리적 패딩’ 아직은 잔잔한 바람
모피에 비해 오리털 다운 제품의 ‘비윤리성’에 대한 문제제기는 상대적으로 덜했다. 그러나 ‘라이브 플러킹’ 과정에서 거칠게 다뤄지며 산 채로 가슴털을 뽑힌 오리가 피 맺힌 생살을 드러낸 모습을 고발한 영상 등이 동물보호단체에 의해 유포되면서 문제의식이 커졌다.
아웃도어 업계도 여론의 흐름에 반응하며 ‘윤리적 패딩’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노스페이스는 다운 제품의 80%가 RDS 인증을 받았고, 파타고니아는 2007년부터 자체적으로 생산 과정을 윤리적으로 관리하는 ‘트레이서블 다운(Traceable Down·생산 과정 추적다운)’ 시스템을 적용, 2014년부터 100% 트레이서블 다운을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소비자에게 ‘윤리적 패딩’은 아직 멀다. 지난 15일 서울 시내의 한 백화점을 찾았다. RDS 인증 제품을 생산하는 브랜드 매장을 찾아 “RDS 인증 제품이 있냐”고 물었다. 대부분 매장 직원들은 ‘금시초문’이라는 반응이었다. 한 매장의 직원은 “현장 직원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다른 매장 직원은 처음 듣는다며 스마트폰을 꺼내더니 검색해 해당 제품을 찾았다. 대부분 50만원대가 넘는 고가의 롱패딩 제품뿐이었다.
권씨는 지난 주말 ‘윤리적 패딩’을 찾기 위해 이틀 동안 백화점을 뒤졌다. 권씨는 “직원들이 대부분 구스 다운 제품만 알지 RDS란 말 자체를 몰랐다”며 “웰론 같은 인공충전재 제품을 찾았지만, 제품이 없거나 경량패딩이 대부분이었고 매장 직원들은 ‘싼 제품을 찾느냐’는 반응이었다”고 말했다. 결국 권씨는 인터넷으로 웰론이 든 패딩을 샀다. 하지만 웰론 패딩조차도 모자에 라쿤털이 달린 경우가 많았다.
미국 너구리를 칭하는 라쿤의 털은 겨울 코트나 패딩의 장식재로 많이 사용된다. 모자 끝에 달린 통통하고 기다란 갈색 털을 떠올리면 된다. 라쿤털을 얻는 과정도 잔인하긴 마찬가지다. 대부분 중국의 공장식 사육시설 속 철장에서 짧은 일생을 보내는 라쿤은 좋은 모피를 얻기 위해 산 채로 가죽이 벗겨지는 경우가 많다.
■ 그렇다면 패션 포기자가 되어라?
RDS 인증이 동물을 윤리적으로 사육하고 사후에 의복으로 이용하는 최소한의 안전장치가 될 수 있지만 ‘완벽한 대안’은 아니라는 의견도 나온다. 이형주 동물복지문제연구소 어웨어 대표는 “동물 착취에 반대하는 소비자들의 흐름을 기업들이 읽었다는 것은 고무적”이라면서도 “아웃도어 업체가 주축이 돼 만든 인증으로 현지 농장에 대한 정확한 검증이 이뤄지는지 의문이 든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오리털의 80%가 중국의 농장에서 생산되며, 중국에는 동물보호법이 없어 동물들이 최소한의 복지를 보장받을 수단이 없다”고 말했다. 동물보호단체 페타(PETA)는 지난해 5월 RDS 인증을 받은 중국 공장에서 라이브 플러킹이 이뤄지는 실태를 고발하는 영상을 공개하기도 했다. 영상에서 농장 책임자는 “산 채로 뽑은 거위털을 RDS 인증을 받고 판다”고 인터뷰했다.
동물 털이 아닌 인공 소재로 만든 제품을 찾는 소비자들이 늘고 있지만 시장은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국내 업체가 개발한 웰론 등 오리털을 모방한 인공충전재가 개발돼 있지만, ‘싸고 질이 낮다’는 인식 때문에 다양한 제품을 구하기가 어렵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동물 털을 입지 않기 위해 겨울에는 ‘패션 포기자’가 되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고양이를 기르기 시작하며 동물 털 제품을 입지 않게 된 황모씨(34)는 “웰론 패딩을 찾아봤지만 투박하고 예쁘지 않은 제품들이 대부분이어서 사지 않았다”며 “대신 코트 안에 여러 겹을 껴입어 보온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영신씨(41)는 “겨울만 되면 겉옷을 어떻게 입을지 고민하다 이제 패션에 대한 관심을 포기하고 헌 옷 가게에 나와 있는 패딩을 싼값에 구매해 입는다”며 “인공충전재를 쓰면서도 디자인도 함께 신경 쓰는 의류회사들이 있으면 좋겠는데 아직 우리나라에선 찾기 어렵다”고 말했다.
“어느 날 출근길 만원 지하철을 탔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엄청난 털이 달린 패딩을 똑같이 입고 있었어요. 그걸 보는 순간 ‘여기가 오리나 라쿤, 여우의 무덤이구나. 집단 폐사지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끔찍했습니다. 그 많은 털들이 어디서 오는지를 질문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권한라씨는 말했다.
<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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