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리포트] 글에도 감정은 담겨 있다

이우승 입력 2017. 12. 20. 20:39 수정 2017. 12. 20. 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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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에만 감정이 있는 것이 아니다.

직접 말하거나 전화로 하기보다는 메신저나 스마트폰의 카카오톡 또는 휴대전화 문자를 훨씬 많이 사용하는 요즘엔 더욱 '글 속의 감정'이 중요해진다.

우리는 다양한 방법으로 글 속에 담긴 상대의 감정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댓글 비판 중 언론이 곱씹어야 하는 대목이 적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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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경호원에 폭행당한 기자 비난 댓글 씁쓸

말에만 감정이 있는 것이 아니다. 글에도 감정이 담겨 있다. 직접 말하거나 전화로 하기보다는 메신저나 스마트폰의 카카오톡 또는 휴대전화 문자를 훨씬 많이 사용하는 요즘엔 더욱 ‘글 속의 감정’이 중요해진다.

우리는 다양한 방법으로 글 속에 담긴 상대의 감정을 확인할 수 있다. 가령, 부탁의 글을 카톡으로 보냈을 때 ‘얼마나 빨리 답장이 오는지’, ‘답장을 할 때 사용한 단어는 무엇인지’, ‘답변이 얼마나 짧은지 또는 긴지’, ‘이모티콘과 같은 인터넷 언어는 무엇을 사용했는지’ 등을 통해 상대의 감정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이우승 베이징 특파원
갑자기 웬 ‘글 속의 감정’ 타령이냐고? 인터넷 속 댓글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어서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지난주 중국 베이징에서 발생한 한국 사진기자 폭행사건 기사에 달린 댓글에 대해서다. 한 국가의 최고 지도자가 방문하고, 그 지도자를 수행해 온 기자가 폭행을 당한 일이 발생했다. 그것도 단순한 멱살잡이나 실랑이 속에서 의도치 않게 다친 경우가 아니라, 십여 명의 안전요원들이 복도로 끌고 가 격투기 하듯이 집단폭행을 가했다. 어떻게 보면 대통령 수행단이 폭행을 당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베이징 특파원으로 근무하다 보니, 사건 처리 과정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 관련 기사도 자세히 보고 있다. 물론 기사에 달린 댓글도 유심히 읽어봤다. 중국 정부가 행사 주최자인 코트라와 한국 쪽에 책임을 떠넘기며 사설 경호업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야 충분히 예상했던 수순이기도 하다. 중국은 자국의 국격이나 품위가 떨어지는 사건에 대해서는 스스로 인정하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한국 국민의 감정이다. “기자들이 잘못해서 충돌을 일으켰고, 오히려 어려운 한·중 관계 속에서 성사된 중요한 양국 간 정상회담을 방해했다”는 비판적인 댓글들이 대부분이었다. 청와대 게시판에는 ‘해외 수행기자단 폐지’와 ‘피해 기자와 매체에 대한 구상권 청구’ 등 수천건의 청원 글이 달렸다고 한다. 오죽했으면 중국 관영매체인 환구시보(環球時報)가 자신들의 주장을 옹호하기 위한 근거로 한국 네티즌들의 댓글을 인용했겠는가.

가장 많이 달리는 댓글을 소개하면, “국가를 망신 주는 기레기(기자+쓰레기)는 이 기회에 없애야” “경호 가이드라인을 무시하고 기자가 먼저 대들었다” “기자증이 대단한 프리패스냐” “(기자를 징계해야 한다는 청원 관련 비판 기사에 대해) 언론이 오히려 국민의 알권리를 호도한다” “반성하지 않는 기레기는 가장 썩은 집단” 등 부정적인 댓글을 열거하자면 끝이 없다.

문제는 댓글 속에 담긴 언론과 기자를 향한 맹목적인 불신과 증오의 감정이다. 정확한 사실관계에 기초하지 않고 풍문에 기대어, 그리고 일부 경험적인 사례에 비추어 무조건 수행 기자가 잘못했고, 언론은 믿지 못할 조직이라는 비판적인 댓글 속에는 언론을 향한 그들의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물론 댓글 비판 중 언론이 곱씹어야 하는 대목이 적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익명에 기대어 자극적인 단어로 해당 기자와 언론에 비판을 쏟아내는 행위가 옳은 것은 아니다. 극단주의로 치닫는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이라는 생각에 씁쓸함을 지울 수가 없다.

‘여백의 미’가 그림 속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화면 전체를 채우지 않고, 빈 공간을 남기는 여백은 예로부터 동양화의 정수로 통했다. 남겨진 공간을 통해 보는 이가 스스로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이는 넘치거나 부족한 것이 아닌 중용(中庸)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말’과 ‘글’ 속에도 ‘여백의 미’는 존재한다.

이우승 베이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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