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평등'은 왜 '양성평등'이 됐을까..'이데올로기의 최전선' 된 젠더-성소수자 문제

최미랑 기자 2017. 12. 20.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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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이숙진 여성가족부 차관이 20일 오후 정부서울청사에서 ‘제2차 양성평등기본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김영민 기자

‘꼬리가 개를 흔든다’는 말을 지금 정부의 성평등 정책을 두고도 쓸 수 있게 됐다. 2022년까지 앞으로 5년 동안 정부가 성차별을 해소하기 위해 어떤 일을 할지를 담은 ‘제2차 양성평등정책 기본계획’이 20일 발표됐다. 골자는 국가 전체의 성평등 수준을 높이기 위해 정부 모든 부처들이 목표를 정해 실행하도록 하고, 온라인 성범죄나 스토킹·데이트폭력·사이버성폭력처럼 여성을 겨냥한 폭력에 잘 대응하기 위해 국가행동계획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성평등’이냐 ‘양성평등’이냐 이날 공개된 2차 기본계획 내용 중에 ‘충격적’이거나 획기적인 것은 없다. 일과 가정생활을 양립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고, 500인 이상 기업과 공기업을 중심으로 고용에서의 성차별을 개선할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여성 고용 비율을 늘리기 위해 성평등 임금공시제를 추진하고, 공공부문부터 앞장서 여성 임원을 늘릴 계획이다.

돌봄노동에서 남성 참여를 더 많이 지원해 여성들의 ‘독박육아’라는 현실을 개선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지금은 사흘뿐인 남성의 유급 출산휴가를 열흘로 늘리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중소기업 직원들도 이용할 수 있도록 산업단지 등에 공공형 직장어린이집을 설치하는 방안도 담겼다. 1차 기본계획이 직장 내 성폭력 등 ‘우월적인 지위를 이용한 여성 상대 폭력’ 대처에 초점을 맞췄다면 이번 계획에는 사이버성폭력을 비롯한 신종 성범죄를 막을 대책과 피해자 구제책이 추가됐다. 이런 방침에 따라 정부 부처들은 제각기 목표를 정하고 시행계획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정작 정책의 내용이 아닌 용어를 놓고 싸움이 벌어졌다. 이 계획은 2015년 개정된 양성평등기본법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지만 문재인 정부는 ‘성평등’이라는 용어를 선호해왔다. 문 대통령도 후보 시절부터 ‘성평등’이라는 말을 써왔다. 문제가 불거진 것은 지난달 16일이었다. 여성가족부는 계획을 확정하기에 앞서 의견을 수렴하는 공청회를 열었다. 계획의 이름은 ‘양성평등정책 기본계획’ 그대로였지만 정책 설명에서는 ‘성평등’이라는 단어가 쓰였다.

‘성평등 NO, 양성평등 YES’를 외치는 이들이 난입하더니 토론회를 무산시켰다. ‘성평등 반대 시위대’는 성평등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은 곧 성소수자의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고, 결국 동성결혼 합법화로 이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국기독교총연합은 지난 13일 여가부를 비판하는 공식 성명을 내고 “양성평등은 남성과 여성 간의 평등이지만, 성평등은 동성애를 포함해 다양한 성 정체성 간의 평등을 의미한다”고 비난했다. 그러면서 “2차 기본계획의 중요한 문구에 ‘성평등’이라는 용어가 하나라도 들어가는 것을 강력히 반대한다”고 했다.

14일과 18일에는 보수 개신교 단체가 중심이 된 ‘동성애·동성혼 개헌반대 국민연합’이 광화문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시위를 하며 “동성애 조장하는 사탄의 앞잡이 문재인 정부는 각성하라” “여가부는 해체하라”고 외쳤다. 여가부는 확정된 계획을 발표하기 전 미리 보도자료를 내 “2차 기본계획에서 성평등과 양성평등 용어를 둘 다 쓰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번엔 여성·인권단체들이 반발했다. 이전부터 정부 정책의 큰 틀을 ‘양성평등’이 아닌 ‘성평등’으로 전환할 때가 됐다고 주장해온 이들은 “정부가 성소수자를 차별하고 배제하라는 주장을 받아들일까 우려된다”고 했다. 뚜껑을 열어보니 기우가 아니었다. 2차 기본계획의 ‘비전과 목표’에서 성평등이 빠졌고 여성·남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고쳐졌다. 지난달 공개된 계획안에 “함께하는 성평등, 지속가능한 민주사회”로 명시됐던 ‘비전’은 확정 계획에선 “여성과 남성이 함께 만드는 평등하고 지속가능한 민주사회”로 바뀌었다. 4개 목표 중 “성평등 시민의식의 성숙”으로 쓰였던 것도 확정 계획에서는 “성숙한 남녀평등 의식 함양”으로 바뀌었다.

■젠더, ‘이데올로기의 최전선’ 동성애에 반대하는 이들은 조직적으로 결집해 행동에 나서고 있다. 이들은 올 하반기 국회 개헌특위가 전국을 돌며 개최한 헌법 개정 대국민토론회에서도 ‘동성애 반대’ ‘성평등 반대’를 외치며 토론을 방해했다. 서울시교육청의 행사장에도 어김없이 나타났다. 정치권도 논쟁을 시작했다. 지난달 말 국회 개헌특위 전체회의에서는 몇몇 의원들이 헌법 개정안의 ‘성평등’을 ‘양성평등’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색깔론과 지역주의를 내세우던 보수 정치인들은 이제 ‘동성애 반대’를 내세워 표를 모으려 한다.

무엇이 ‘정치적으로 올바른(politically correct)’ 표현인가를 둘러싼 논쟁은 오래됐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새 젠더와 성소수자 문제는 보수·진보 진영이 맞붙는 이데올로기 싸움의 최전선이 됐다. 2차 기본계획을 둘러싼 ‘용어 전쟁’은 그 하나의 사례일 뿐이다.

이는 한국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두드러지는 현상이다. 미국에선 지난해 대선을 도화선으로 이주민 반대, 성소수자 반대, 여성혐오 발언들이 줄을 이었으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같은 인물을 통해 노골적으로 표현됐다. 유럽의 극우파들도 이전에는 입 밖에 내지 못했던 소수자 혐오를 드러내놓고 외친다. 이슬람권에선 근본주의 정치인들이 대놓고 소수자 탄압과 여성차별을 옹호한다. 극단주의 무장조직 이슬람국가(IS)는 동성애자들을 ‘배교자’ 못잖게 죄악시하며 공개처형까지 했다.

인권과 다양성 문제가 시민사회의 어젠다가 된 것은 1960년대부터였다. 미국 민권운동의 시대, 유럽 68혁명의 시대에 페미니스트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인권과 평등, 다양성에 대한 요구가 폭발적으로 터져나왔다. 전후 세계 경제가 고속성장하던 시기의 흐름이었다.

성장은 끝났고 경제의 세계화 속에 침체와 일자리 부족은 지구상 어느 나라나 겪는 일이 됐다. 지금 한국과 세계에서 벌어지는 ‘젠더 공격’에서 공통되게 나타나는 것은 우파 정치인들과 배타적인 종교세력의 결합이다. 경제적 박탈감에 좌절한 이들이 약자들을 타깃으로 삼은 공격에 합류해 이런 정치세력을 떠받친다. 한국에서도 자유주의 정권들이 추구한 인권과 다양성 옹호가 주로 젊은 남성층의 밥그릇 싸움의 소재가 되고, 이를 무기로 삼은 자유한국당과 보수 개신교 연합의 반격을 받는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세계화 이후 불평등을 키우는 경제구조가 낳은 싸움의 칼끝에서 사회적 약자들이 희생양이 되고 있는 것이다.

■설 곳 잃는 약자들 이런 싸움에서 약자를 겨냥한 혐오발언과 공격은 더욱 강화된다. 여성·인권·성소수자 단체들은 ‘성평등’ 용어를 둘러싼 이번 일이 앞으로 이런 상황에 정부가 어떻게 대처할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한국여성단체연합에 소속된 28개 단체 회원들이 20일 오전 서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양성평등’이 아니라 성소수자들까지 포괄하는 ‘성평등’ 정책을 추진할 것을 정부에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2차 기본계획 발표에 앞서 한국여성단체연합과 성소수자 차별반대 무지개행동 등은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어떤 이유로도 차별과 혐오를 정당화할 수 없다”며 “여가부는 모든 국민이 자유롭게 행복을 추구할 수 있도록 성평등 정책 전담부서로서 정책의 근본 원칙과 내용을 명확히 해 흔들림 없이 성평등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고 밝혔다. 또 “문 대통령이 후보 시절 얘기한 ‘페미니스트 대통령 선언’을 이행하고자 한다면 ‘양성평등과 성평등을 혼용하면 된다’고 넘어갈 것이 아니라, 공론장을 망치는 혐오선동 단체에 명확한 입장을 보이라”고 촉구했다.

2차 기본계획 내용을 설명하면서 이숙진 여가부 차관은 ‘성평등’이 ‘양성평등’으로 후퇴한 것 아니냐는 지적에 “양성평등기본법에 근거해 법률에 따라 정리한 것이며, 정책의 범위와 제도를 고려해 두 용어를 혼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차관은 “(앞서 공개한 계획안과 확정된 계획 사이에) 특별한 변화는 없었고 내용도 달라지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헌법의 이념이 성소수자 인권을 둘러싼 싸움장이 된 현실에서 앞으로 어떻게 구현될지는 지켜볼 일이다. 여가부는 ‘성평등’과 ‘양성평등’ 중 어느 한쪽을 택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이렇게 밝혔다.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고 누구든지 성별 등에 의해 차별을 받지 않는다는 헌법 10조와 11조에 따라, 인권과 평등의 가치는 어떠한 경우에라도 지켜져야 합니다. 헌법의 가치를 존중하는 성숙한 시민의식이 필요하며, 어떠한 국민도 차별과 혐오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여성가족부는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성별에 따른 차별 없이 동등하게 인권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하여 헌법이 명시하는 인권과 평등의 가치를 정책적으로 실현해 나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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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미랑 기자 ra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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