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북스토리] 재건축 지역 길고양이들은 어디로 가야할까

한국일보 2017. 12. 19.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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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례없이 기승을 부리는 한파로 마음이 조마조마하다. 가을에 태어난 새끼 고양이들은 첫 겨울을 나기가 정말 힘든데 벌써부터 들려오는 새끼 고양이들의 동사 소식에 머리가 멍하다. ‘그래도 살아봤으니 됐어’라고 말하기에도 너무 짧은 삶. 우리 동네 고양이들은 다 중성화 수술이 되어 있어서 새끼 고양이가 태어나지는 않으니 그 걱정은 없지만 이번 추위는 어른 고양이가 견디기에도 매섭다.

유례없는 한파에 이번 겨울도 길고양이가 힘든 것은 마찬가지다. 게티이미지뱅크

재건축 현장, 그곳에 길고양이가 있다

게다가 올해는 악재가 하나 더 있다. 지난해부터 이어진 아랫동네의 공사가 여전히 진행 중이고, 앞집이 재건축을 위해 집을 부수기 시작했다. 낯선 사람들이 바쁘게 오가고, 굉음이 이어지고, 큰 트럭들이 먼지를 내뿜으며 내달리자 아이들은 우왕좌왕하고 숨기 바쁘다. 밥을 줘도 눈치를 보면서 정신 없이 먹는다.

작은 동네에서 벌어지는 공사가 이러니 대단지 아파트 공사 현장의 고양이들은 이 겨울을 어찌 견딜까. 토목 공화국인 이 나라에서는 언제 어느 곳에서나 건물이 부서지고 사람들이 떠난다. 과천에 사는 친구네도 아파트 재건축이 결정이 났다고 한 걱정이다. 오래된 아파트이긴 하지만 친구와 노모가 살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는데 주민 대부분은 재건축에 찬성을 했다.

대우건설이 지난 11월 과천주공1단지 재건축 공사 현장에 길고양이를 위한 통로를 설치했다. 길고양이 커뮤니티 '고양이발자국' 블로그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며 연로하신 친구의 어머님과 함께 길고양이 걱정이 들었다. 사람들이 떠나면 고양이는 어떡하나. 그런데 며칠 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과천 재건축 현장에 길고양이를 위한 이동 통로와 급식소가 설치되었다는 글이 올라왔다. 현장에 펜스가 다 둘러쳐지면 고양이들은 갑자기 도망갈 곳 없이 갇히게 되어 당황하게 된다. 자신들을 위해 마련한 것이니 고양이들이 인간의 마음을 헤아려 천천히 잘 이동해 주기를 바란다. 재건축 현장에 길고양이 출입구라니. 그래도 세상이 이만큼 나아졌구나.

길고양이 이주를 촉구를 하기 위해 서울 강동구 둔촌주공아파트에 설치된 현수막이다. '둔촌냥이' 페이스북

재건축과 재개발이 일상이 된 이 나라의 캣맘들은 여러 방법으로 길고양이들을 이주시킨다. 밥 주던 길고양이들을 몽땅 포획한 후 함께 이사해서 새로운 곳에 방사시키기도 하고, 재건축을 하지 않는 옆 단지로 차근차근 이동시키기도 한다. 얼마 전에는 재건축을 앞둔 둔촌 주공 아파트의 길고양이 이주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분들을 만났다. 1979년 겨울, 첫 입주를 시작한 둔촌 주공 아파트는 5,940세대, 축구장 면적 88배의 어마어마한 면적의 대단지라서 그 안에 사는 길고양이 수도 굉장하다. 녹지도 많고 환경이 좋아서 사람들이 살기 좋았던 것처럼 길고양이도 살기 좋았던 곳이다.

그러다 보니 나이든 고양이들도 많다. 재건축이 끝나고 새로운 단지가 조성되어도 기간이 꽤 걸릴 테니 이 노묘들은 고향 같은 이곳으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친구 어머님도 같은 말씀을 하셨다. 자기 나이가 많으니 공사가 끝나고 새 아파트 입주가 시작돼도 자신은 못 돌아올 거라고. 어머님의 말씀에 마음이 아렸는데 사람이나 고양이나 처지가 비슷했다.

둔촌주공아파트의 철거된 단지(왼쪽)와 중성화된 둔촌동 길고양이의 모습(오른쪽). '둔촌냥이' 페이스북

다행히 둔촌주공아파트의 캣맘들은 몇 년 전부터 부지런히 중성화수술(TNR)을 실시해서 중성화 비율이 80%에 달한다. 이런 방법으로 고양이 숫자를 유지하면서 남은 아이들의 정보를 모으고 있다. 이미 입주민의 3분의 2가 떠난 휑한 단지를 돌면서 남은 고양이 하나하나의 정보를 모아 기록하는 것이다. 앞으로는 아이들의 밥자리를 이동시켜야 하는 큰일이 남았다.

둔촌동 길고양이를 돕는 사람들

둔촌 주공 아파트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 모여 만든 책 <안녕, 둔촌주공아파트> 시리즈에는 이곳을 고향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추억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둔촌 주공 아파트의 더러운 흙과 낡은 놀이터도 그립다는 사람들, 한 여름이면 나무 위에서 떨어진 송충이가 바닥에 득시글거렸다는 글에서 이곳의 자연 환경이 얼마나 좋았는지 알 수 있었다.

만약 이 책에 길고양이 입주민들의 글도 받았다면 어떤 내용일까? 주공 아파트 단지의 나이가 약 마흔 살. 40년이면 고양이들은 수십 세대를 이어서 살았을 테니 첫 입주 고양이의 30~40대손이 할머니에 대한 추억부터 이야기할지 모른다. 흙과 녹지가 많아 눈치 보지 않고 똥 싸고 맘껏 나무를 갉고, 햇살 좋은 날이면 잘 데워진 땅에 올라와 게으름을 부렸다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긴 시간 동안 배곯지 않게 밥을 대령했던 많은 캣맘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할 수도 있다.

지난 11월 24일, 둔촌동 활동가들과 성내동 등 타 지역 주민들이 길고양이들의 겨울나기 쉼터를 만들었다(왼쪽). 둔촌동 길고양이의 이주를 돕는 스토리펀딩 ‘이사가는 둔촌냥이’에서 수익 후원을 위한 담요를 판매하고 있다(오른쪽). ‘둔촌냥이’ 페이스북, 스토리펀딩 ‘이사가는 둔촌냥이’ 홈페이지

둔촌주공아파트의 캣맘들은 돌보던 길고양이들 때문에 아직 떠나지 못하기도 하고, 몸은 떠났지만 마음은 떠나지 못해 고양이들의 이주를 돕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최근에는 스토리 펀딩(▶페이지 바로가기(https://storyfunding.daum.net/project/17821))을 시작했다. 사람이 이사하려면 이사 비용이 드는 것처럼 길고양이도 이사 비용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구조하고, 아픈 아이들을 치료하고, 임시보호하고, 단지 밖으로 무사히 밥자리를 이동시키는 긴 여정에 드는 이사 비용이다.

부디 어떤 고양이도 다치지 말고, 고양이 이주를 돕는 사람들도 마음 다치지 말고 고양이 이사가 잘 진행되면 좋겠다. 그리고 둔촌 주공 아파트가 남긴 이 기록은 앞으로 전국 어느 곳에서건 이어질 재건축, 재개발 현장에서 길고양이를 이주시킬 때 귀한 사료가 될 것 같다.

참고: <안녕, 둔촌주공아파트>, 이인규

김보경 책공장더불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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