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식의 寫眞萬事]투견판 한국 구경꾼 중국

김춘식 2017. 12. 18.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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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칼럼을 통해 같은 민족 간에 벌어지는 내전이 이민족 간에 벌어지는 국제전보다 훨씬 더 잔인하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이민족 간에 벌어지는 전쟁은 욕심을 냈던 지역을 차지하거나 통치권을 장악하면 대충 종료되는 속성이 있지만 같은 민족 간에 벌어지는 전쟁인 내전에서는 생각이 다른 진영의 씨를 아예 말려버리려는 시도가 노골적으로 실행되고 이 과정에서 양 진영 모두 회복이 어려운 치명상을 입는다고 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방중 과정에서 발생한 기자폭행 사건을 놓고 인터넷 공간에서 벌어진 댓글 공방은 칼만 들지 않았을 뿐 우리 사회가 이미 내전 수준의 단계로 접어들었음을 다시 확인시켜 주었다. 같은 시냇물을 마시지만 소는 우유를 만들고 뱀은 독을 만든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이라 하지만 생각이 다른 진영이나, 내가 지지하는 권력에 협조하지 않는 인간은 아예 씨를 말려버리겠다는 기세가 등등하다. 같은 민족이라는 사실이 무색할 지경이다. 댓글들은 의견이란 형태로 포장됐을 뿐 사실은 뱀의 혀처럼 악질적이다. 아니, 뱀은 살기위해서 물지 생각이 다르다고 물지 않으므로, 인간은 어느 면에서 뱀보다 더 악랄하다.

매일경제신문의 이모 기자가 14일 오전 베이징 국가회의중심 B홀에서 열린 문재인 대통령 '한중 경제무역 파트너십 개막식'에서 스타트업관으로 이동하다가 중국측 경호원에게 일방적으로 폭행 당하고 있다. 사진 위쪽부터 이 기자가 중국 경호원들로부터 일방적으로 폭행당하는 모습. 붉은 원 안의 이 중국인은 얻어맞아 쓰러진 이 기자의 안면을 구두발로 걷어차 눈뼈 부분을 함몰시켰다.[CBS노컷뉴스 캡쳐]
청와대 취재는 다른 취재와는 달리 대통령에게 접근할 수 있는 기자가 미리 정해져 있다. 취재하고 싶다고 해서 아무나, 어느 때나 갈 수 있는 게 아니다. 대통령이 등장하는 행사장에 어떤 기자가 가 있다는 사실은, 그 기자는 사전에 취재가 허락된 자라는 의미이다. 해당 기자는 사전에 경호실이 발부한 비표나, 근접을 허가받은 자임을 식별할 수 있는 인식표(리본이나 완장 등)를 소지하고 있다. 대한민국 청와대의 기자도, 미국 백악관의 기자도 그런 절차를 밟아 취재를 한다. 사전에 약속된 기자가 아니라면 현장에 갈 이유도, 갈 수도 없다.

따라서 사전에 약속된 이모, 고모 기자가 대통령이 있는 행사장에 들어가겠다고 한 것은 전혀 무리한 요구가 아니다. 비표와 인식표를 보여주며, 들어가기로 돼있는 자리에 들어가겠다는 기자를 막무가내로 “안돼!”라고 제지하는 행위 자체가 무식한 행동으로 반자유적이고 반민주적이며 반외교적인 폭력이다. 중국인들이 “안돼!”하면 그것으로 끝인가? 청와대 출입 기자는 폭력배가 아니다. 모두 청와대 경호실의 엄격한 신원 조회 절차를 거친 각 언론 매체의 중견 기자들이다. 중국 측 인사는 나오지도 않는 우리만의 행사에서, 경호실과 사전 약속된 기자를, 그것도 국빈방문 중인 타국 국가원수의 공식 수행원을, 아무 이유 없이 제지하고 이에 항의하자 떼로 덤벼들어 무자비하게 폭행한 행위는 그 어떤 구실을 갖다 붙여도 변명의 여지가 없다. 문재인 대통령이 아니라 트럼프 대통령이고, 한국의 기자가 아니라 미국의 기자였다면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시진핑 주석이 한국을 방문했고 중국 기자가 청와대 경호원의 제지에 항의했다면(물론, 비표를 소지한 중국 기자를 청와대 경호관이 제지하지도 않겠지만) 그 중국 기자도 이렇게 무자비하게 폭행당했을까.

중국인 경호원의 폭행으로 쓰러진 한국일보 고모 기자. [연합뉴스]
중국 공안이 지휘 관리하는 경호원의 폭행도 유감스러운 것이지만 현 정권 지지세력의 댓글 수준은 유감 여부를 지나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인간임을 절망하게 만든다. 노무현 정권 당시 청와대 홍보수석이던 조기숙 이화여대 교수는 15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경호원이 기자를 가장한 테러리스트인지 기자인지 어떻게 구분을 하겠어요. 폭력을 써서라도 일단 막고 보는 게 경호원의 정당방위 아닐까요?”라고 말해 기자 폭행의 당사자인 중국 측 입장을 중국보다 더 중국스럽게(!) 대변했다. 노무현 대통령 홍보수석을 지내 누구보다 청와대 취재 시스템에 정통한 조기숙의 발언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이 발언은 환구시보를 통해 인용되면서 한국사회가 기자폭행을 당연시하고 있으며, 규칙을 지키지 않은 무례한 기자를 혼내주어서 오히려 환호하고 있다는 잘못된 신호를 주었다. 조기숙은 나중에 페이스북에 “제가 기사보다는 SNS로 소식을 접하다보니 기자가 집단폭행을 당했다는 사실을 파악하지 못하고 발언해 물의를 일으켜 사과드립니다”라고 마지 못해 자신의 발언을 거둬들이려 했지만 이미 쏟아진 물이었다. 조기숙의 댓글 말고도 수많은 댓글들이 “맞을 짓을 했으니 맞았다”는 내용으로 중국인들에게 부당하게 얻어맞은 동족의 상처에 소금을 뿌려댔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가 중국 베이징의 한 현지 음식점에서 노영민 주중대사 내외와 함께 아침 식사를 하고 있다. 김상선 기자
심지어 15일 청와대 게시판에는 ‘문재인 대통령 방중 물의를 일으킨 기자에게 구상권을 청구’하자는 청원글이 올라왔다. “기자가 폭행당한 것 가지고 피해자 코스프레하는데, …, 사드해결하고 중국과 화해모드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정상회담이 물 건너 갈 수도 있었던 상황에 대해서 국가가 손해배상이나 구상권 청구했으면 좋겠다.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임…”이라는 놀라운 내용의 이 청원엔 17일 오후 11시 현재 무려 2767명이 동의하고 있다. 기자폭행을 둘러싼 전후사정이 무엇인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단지 자신들이 지지하는 문 대통령의 방중성과가 폭행 사건에 가려 빛이 바랠까봐 떼로 몰려다니며 분탕질을 치고 있다.
폭행당해 중상을 입은 기자들에게 대통령의 외교를 방해한 혐의로 구상권을 청구하자는 청와대 게시판의 청원.
정치도, 외교도 다 사람이 살자고 하는 일이다. 무슨 이념이나, 어떤 신념도 사람이 빠지면 다 허당이다. 어떤 외교 성과도, 어떤 정치적 결실도, 사람이 우선하지 않는다면 동의할 수 없다. 국빈방문 중인 대한민국 대통령의 공식수행원이자 청와대 출입기자가 대통령이 있는 방 밖에서 중국인에게 부당하게 폭행당해 중상을 입었다면 한 목소리로 항의해도 성이 차지 않을 판에, 우리끼리 투견판의 개처럼 물어뜯고 있고 이 사건의 진짜 책임자인 중국은 마치 아무 상관없는 구경꾼처럼 상황을 즐기고 있다. 치욕스럽다.

중국은 이번 사건에 대해 절대로 사과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끼리 내 탓이니 네 탓이니 싸우는 판에 뭐 할 일이 없다고 중국이 나서 “내 탓이요” 라고 자복하겠는가. 중국 외교부는 사건 직후 “위로할 수는 있지만 사과할 수는 없다”는 입장을 내놨다. 진정성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는 어투다. 그런식의 위로는 중국 인민들에겐 통할지 몰라도 우리가 보기엔 하나마나한 소리다. 사건의 진상은 중국 외교부가 내놓은 입장 부근에서 단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중국처럼.

그러건 말건, 변치 않는 사실이 있다. 이 사건 당시 경호를 담당했던 베이징 보안 업체는 중국 국영기업인 ‘국가회의중심’의 관리를 받고 있고 이 모든 행사의 총괄은 중국 공안이 담당한다는 것이다. 상식이 통하는 사회라면 도저히 나 몰라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것이다. 또 하나 변치 않는 사실이 있다. 누가 뭐래도 중국은 아직 멀었고, 명확하고 단순한 사건을 놓고도 분열하는 한국 사회 역시 아직 멀었다는 사실이다. 부상에다가 모욕까지 견뎌야 하는 두 기자에게 깊은 위로를 보낸다.당신들은 아무 잘못이 없다.

김춘식 중앙일보 포토데스크 부국장 kim.choonsi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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