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사소함 재발견 .. '문학의 퓨전화' 두드러져

조용호 2017. 12. 17. 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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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세계일보 신춘문예 예심평 / '촛불' 지나간 자리 .. 거대한 담론 보다 / 고시원 삶·이별 등 개인 일상에 주목 / 다채로운 소재와 서사 펼쳐졌지만 / 언어적 자의식 부족한 점은 아쉬워
2018 세계일보 신춘문예 예심이 끝났다. 응모 편수는 지난해에 비해 소폭 증가했다. 14일 마감한 결과 단편소설 812편, 시는 1169명, 문학평론은 32편이 접수됐다. 예심은 문학평론가 박철화, 소설가 정길연 진연주, 김영남 안현미 시인이 맡았다. 단편소설은 14편, 시는 21명의 작품을 예심을 거치지 않는 문학평론 응모작과 함께 본심으로 넘겼다. 올 응모작 경향을 예심위원들의 목소리로 살핀다.

■단편소설/ 박철화(문학평론가)

예년 수준의 적지 않은 작품들을 읽었다. 촛불시위와 탄핵이 있었어서인지 정치와 사회에 대한 비판적 이야기가 자취를 감췄다. 대신 일상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가 그 빈자리를 메웠다. 아쉬운 점은 비문학적인 일에 너무 많은 기운을 뺐다고 해야 할까? 사소함이 두드러졌다. 물론 고시원과 원룸, 연인의 이별이나 이혼 같은 일상의 사소함이야말로 인간과 세계가 드러나는 무대다. 그러면 익숙한 사소함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언어마저 사소해서는 안 된다.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 같은 작품이 그 예다. 우리들의 사소함은 새로운 게 아니다. 그 사소함에 의미를 부여한 언어만이 새로울 수 있다. 그러니 소설을 이야기에서 출발하지 말고, 새로운 문장에서 출발하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선 앞선 작가들의 언어의 산맥을 올라야 한다. 영혼의 등산을 통해 다져진 언어의 근육을 통해서만 새로운 문장, 새로운 소설이 나올 수 있다.

2018 세계일보 신춘문예 예심위원들이 응모작을 읽고 있다. 왼쪽부터 안현미 박철화 김영남 정길연 진연주씨.
이제원 기자
■단편소설/ 정길연(소설가)

크로스오버는 서로 다른 장르의 음악을 혼합한 연주 형식이다. 현재는 대중문화 전반에 걸쳐 퓨전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문학도 예외가 아닌 듯하다. 800여 편이 넘는 응모작들이 제각각의 이야기를 담고는 있지만 전반적인 추세는 문학에 대한 태도 변화다. 영화나 드라마, 애니메이션이나 가상세계를 구현한 게임 등, 시청각적 요소와 문학의 언어를 접목하려는 시도가 낯설지 않다. 다른 장르와의 결합이 표현 방식의 다양성을 가져온 반면, 깊이와 중량은 충분하지 못했다. 예상과는 달리 지난 일 년간의 격동을 다룬 작품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거대 담론이나 광장의 운동성보다는 해체된 공동체 안에서 타인과 불화하는 개인에게 집중하는 경향을 보였다. 소설에 긴 시간을 기꺼이 바친 이들의 열정을 높이 산다.

■단편소설/ 진연주(소설가)

안도와 희망이 내려앉은 탓인지 사회적 상상력보다는 개인의 일상과 병리에 주목한 작품들이 많았다. ‘경향 없음의 경향’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다채로운 소재와 서사가 펼쳐졌으나, 언어적 자의식과 소설 구조에 대한 고민이 느껴지는 작품은 드물었다. 겉멋과 미학을 혼동하는 작품들도 눈에 띄었다. 이런 작품들은 유일하게 어떤 ‘경향’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국의 이름이나 문화, 배경을 가져왔거나 철학적 수사를 차용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선택에서 아무런 당위도 찾을 수 없었다는 점. 그럼에도 태작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응모작들 대부분이 일정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고 문장도 안정적이었다. 자신만의 문체와 상상력으로 기존의 소설 서사를 뒤틀려는 시도를 치열하게 보여준 작품에 마음이 갔다.

■시/ 김영남(시인)

여러 계층의 다양한 시들을 접하고 나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대체 이 많은 사람들에게 시를 쓰게 하는 것이 무얼까. 시를 쓰고자 하는 사람들은 왜 줄어들지 않고 있을까. 풍요 속의 빈곤과 고독 때문이 아닐까. 고독에 파묻혀 있고, 고독을 극복하려 몸부림치고 있고, 고독을 즐기고 있는 시를 눈여겨봄이 어떨까 싶었다. 시의 소재와 내용이 일상의 것에서부터 지구·핵·우주에까지 이르고 젊은 감각의 시들이 많아진 게 게 종전과 달았다. 이 중 소재를 내면으로 끌어들여 언어와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시를 우선 골랐다.

■시/ 안현미(시인)

17세 학생부터 아흔을 바라보시는 할아버지까지, 국토의 최남단 제주부터 서울까지, 올해 응모한 작품들을 읽으며 새삼 느낀 점은 세대도 지역도 다 다르지만 사람들이 시를 쓰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열심히’ 쓰고 있다는 것이다. 그 속에는 가족과 사랑을 노래하는 전통적인 소재들이 있는가 하면 광장과 포항 지진 등 현재적 이슈나 내비게이션 인공지능처럼 현대적인 소재까지, 누구도 비껴가지 못하는 삶의 불가해함 속에서도 열심히 쓰고, 열심히 살고 있었다. 그 ‘열심히’ 속에 시가 있다고 믿는다. 그 믿음을 보여준 작품들을 본선으로 올렸다. 예년보다 투고작이 더 많았음에도 마치 장엄하고 거대한 한 편의 감동적인 서사시를 읽는 듯 한층 즐겁고 기쁜 심사였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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