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악범에게도 변호사의 조력을 받을 권리가 필요할까

류인하 기자 입력 2017. 12. 16.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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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헌법에 명시된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는 어디까지 보장돼야 하나
이영학이 지난 10월 서울 중랑구 망우동 자택에서 진행된 현장검증에서 시신을 담은 검정색 캐리어가방을 차량에 싣는 것을 재연하고 있다. / 김기남 기자

“아빠가 친구를 집으로 데려와 수면제가 든 드링크를 먹이라고 할 때 왜 먹여야 하냐고 안 물어봤어요?” “친구가 혼자 안방에 들어가 있는데 문을 열어볼 생각은 안 들었어요?” “죽은 친구 옷차림이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아빠가 ‘친구 발을 여기에 넣어라’는 식으로 지시할 때 왜 거부하지 않고 그대로 따랐어요?”

‘어금니 아빠’의 잔인한 범행에 경악

12일 서울북부지법 702호 대법정. 재판장인 이성호 부장판사가 ‘어금니 아빠’ 이영학의 딸 ㄱ양(14)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다. 재판장은 아버지의 지시에 아무 저항 없이 따르고, 태연하게 친구들과 노래방에 놀러가는 등 ㄱ양이 저지른 일련의 행동들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증인으로 법정에 선 이영학은 자신의 범행을 인정하면서 “집에서 키우던 개 6마리가 있었는데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화가 나서 다 망치로 때려죽인 적이 있다. 그걸 OO이가 알고 있다”고 했다. 딸이 범행에 순순히 가담한 이유가 아빠에 대한 공포심으로 인한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방청석에서는 낮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앞서 재판에서 ㄱ양의 정신감정을 신청했던 국선변호인은 이날 이영학이 ㄱ양에게 심한 폭언을 하거나 때리는 등 폭력적인 행동들을 지속적으로 해왔으며, 이로 인해 ㄱ양이 아빠의 지시에 저항할 수 없는 정신상태였다는 내용의 변호인 의견서를 재판부에 제출했다.

거대백악종(Gigantiform Cementoma)이라는 국내에 3명밖에 없는 희귀질병을 앓고 있는 이들 부녀의 사연이 언론을 통해 처음 알려진 것은 2006년 3월 무렵이다. 이영학은 종양 제거수술 과정에서 치아가 모두 뽑히고 어금니 하나만 남아 ‘어금니 아빠’라는 별명을 얻었다. 각종 방송과 언론이 이들의 아픈 사연을 앞다투어 보도했다. 많은 시민들이 부녀에게 후원금을 전달했다. 11년이 지난 지난 10월 이씨는 딸을 이용해 딸의 친구를 집으로 유인, 음란행위를 한 뒤 살해하고 시신을 강원도 영월 야산에 유기한 혐의로 체포됐다. 수사과정에서 그가 방송과 언론, 종교단체를 통해 얻은 기부금으로 호화생활을 했을 뿐만 아니라 숨진 아내 최씨를 성매매에 이용한 사실 등이 드러났다.

시민들은 분노했다. 아픈 사연을 팔아 거액의 후원금을 받아챙긴 것도 모자라 딸의 친구를 끌어들여 성폭행하고 살해한 뒤 시신을 야산에 묻은 ‘엽기적 행각’에 경악했다. 이영학의 변호사 선임에도 혼선이 빚어졌다. 이씨는 재판부가 직권으로 선정한 국선변호인 대신 사선변호사를 선임했지만 변호사는 선임계를 낸 지 불과 나흘 만에 사임계를 제출했다. 변호사업계 관계자는 “이씨가 모든 범행을 자백한다고 했으면서 뒤로 사선변호사를 선임했다는 보도가 나오자 여론이 더 안 좋아졌다”며 “여러 전후사정이 있겠지만 변호사 스스로도 큰 부담이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2010년 6월 서울 영등포의 한 초등학교에서 8세 여학생을 납치·성폭행한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김수철의 국선변호인 역시 사회적 비난과 여론의 관심에 부담을 느껴 재판 직전 사임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흉악범들의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는 어디까지 보장돼야 하는 것일까. 변호사라면 흉악범이라도 반드시 변호를 해줘야 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헌법 제12조 4항은 ‘누구든지 체포 또는 구속을 당한 때에는 즉시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영학이든 김수철이든 수사과정에서 부당한 점이나 위법사항이 있었으면 변호사는 이를 지적하고, 피고인이 검사와 대등한 위치에서 유·무죄 여부를 다툴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의미다.

헌법 조문과 현실은 다르다. 유·무죄를 다툴 여지가 있거나 정상참작이 있을 만한 사건이 아닌 이상 변호하기가 꺼려진다는 것이 변호사업계의 중론이다. 흉악범도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지만 돈과 평판이 결부된 업계에서는 한낱 윤리강령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변호사도 인간인데 돈을 떠나 생각해도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뻔히 드러난 흉악범을 누가 변호하고 싶겠느냐”며 “들이는 노력에 비해 소위 ‘돈 되는 사건’도 아니고 명성에도 좋을 게 없다”고 말했다. 또 다른 변호사는 “일반 형사사건도 양형을 몇 년 이하로 낮춰 받게 해달라, 불기소처분을 받도록 힘써달라 등 너무 무리한 부탁을 하는 경우에는 사건 수임을 거절한다”며 “하물며 토막살인이니 하는 엽기적인 범죄는 대부분 기소 전에 여론재판이 끝나 변호사가 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형량을 좀 낮춰달라, 선처해달라 수준인데 누가 맡고 싶겠나”라고 말했다. 수도권의 한 변호사는 “사선변호인이 언론에 보도된 흉악범을 변론한다는 말이 돌면 ‘뭔가 꿍꿍이가 있겠거니’ 한다”며 “노이즈마케팅도 홍보라면 홍보겠지만 유명세를 탈 목적이 아닌 이상 누가 그런 사건을 맡을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때문에 법원은 국선변호인제도를 적극 활용해 흉악범이 구속영장 실질심사 단계에서부터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를 보장 받도록 하고 있지만 사정은 녹록지 않다. 국선전담변호사들은 늘 업무과중에 시달리고, 각 재판부에 배정된 5~6명 국선변호인들도 흉악범 사건은 ‘개인적 사정’ 등의 이유로 수임을 꺼리기 때문이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판사는 “예전에 엽기적인 사건이 들어온 적이 있는데 국선변호인들에게 전화를 돌리니 다들 사건 수임을 안 하려고 해서 난감했던 기억이 있다”고 말했다. 국선전담변호사는 재판부에 소속돼 한 달에 25~30건 정도의 사건을 강제배당 받지만 국선변호인은 개인 수임사건을 진행하면서 재판부로부터 국선변호 의뢰가 올 때마다 사건을 맡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문제는 재판부가 국선변호 사건을 지정해도 변호사가 반드시 그 사건을 맡을 의무는 없다는 데 있다. 형사소송규칙 제20조는 국선변호인이 질병 또는 장기여행으로 국선변호 직무를 수행하기 곤란하거나, 피고인 또는 피의자로부터 폭행·협박 또는 모욕을 당해 신뢰관계를 지속할 수 없을 때, 피고인 또는 피의자로부터 부정한 행위를 할 것을 종용 받았을 때뿐만 아니라 국선변호인으로서의 직무를 수행하는 것이 어렵다고 인정할 만한 상당한 사유가 있을 때 각 법원 또는 지방법원 판사의 허가를 얻어 사임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사실상 강제성이 없는 셈이다.

수도권의 한 부장판사는 “흉악범 사건 국선변호인을 선정할 때는 아무래도 나이나 환경 등을 고려하게 된다”며 “여러 사정을 들어 사건 수임 자체를 거부하는 변호사도 있고, 거부는 하지 않는데 재판에 소극적인 변호사도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형사사건은 그래도 직권주의가 가미돼 있어 재판부가 뒤에서 따로 국선변호인에게 ‘정신감정을 신청해봐라’ 등의 요구를 할 때가 있다”며 “그래도 제대로 변론을 안할 때는 재판부가 석명권 등을 행사하는 방식으로 진행한다”고 덧붙였다.

실제 국선변호인 선임 사건에서 재판부가 사실상 변호사 역할을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국선변호인의 준비가 부실할 경우 재판부가 나서서 질문을 하거나 정신감정 위촉 등을 국선변호인에게 직접 지시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피해자 가족 입장에서는 판결을 내려야 할 법관이 피고인의 편을 드는 듯한 오해를 사기도 한다. 몇 년 전 엽총살인사건으로 아버지를 잃은 안모씨(34)는 “재판장이 너무 피고인에게 이것 저것 질문을 많이 하고, 국선변호인에게도 ‘이것도 신청해봐라’ ‘저건 준비 안해 왔느냐’는 식으로 나서서 도와주는 것 같아 불쾌했었다”고 말했다. 이어 “변호사는 가만히 있는데 판사가 너무 이것저것 나서서 피고인을 변호하는 것 같아 속상했다”며 “1심 형량과 같은 형이 선고되기는 했지만 왜 판사가 변호사 역할까지 하는지 궁금했다”고 덧붙였다.

서울고법의 한 부장판사는 “이미 선임을 했는데 며칠 뒤에 ‘도저히 못하겠다’고 해버리거나 변론 준비를 너무 부실하게 해오면 재판부 입장에서도 난감하다”며 “너무 강단이 있거나 연세가 있으신 국선변호인은 연락을 나중에 하거나 최대한 국선전담변호사에게 먼저 요청을 드린다”고 말했다.

판사 출신인 최기영 변호사(법무법인 에이프로)는 “국선변호인이 흉악범을 변호한다는 게 그 사람의 죄가 무죄라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최 변호사는 “환경이 그 사람을 흉악범으로 만들었을 수도 있고, 타고난 유전자가 그렇다면 (사이코패스 등) 지은 죄와는 별개로 판단해야 할 영역이 있을 수 있다”며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는 환경이나 요인을 밝히는 것도 변론의 한 과정으로 생각한다면 피고인의 방어권 보장 문제를 달리 생각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변호사는 “(흉악범 사건이) 나에게 평생 꼬리표가 될 수 있는데 무죄로 뒤집힐 만한 사건이면 몰라도 뻔히 유죄인 사건은 적어도 사선이든 국선이든 변호사의 익명성이 보장되도록 하는 조치가 있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또 “강력사건 국선변호인에 대해서는 국선변호료를 높이는 방식 등으로 동기 부여를 해주는 게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현재 일반 국선변호인은 사건당 기본 30만원을 받는다. 구속영장 실질심사 사건은 15만원, 1심 형사합의 사건은 40만원으로 책정돼 있다. 사건의 난이도가 높으면 법원이 직권으로 최대 200%까지 수임료를 더 줄 수 있다. 무죄 판결 시 50만~60만원의 성공보수를 추가로 받는다. 변호사 업계에서는 국선변호인 업무를 두고 “복사비도 안 나오는 봉사활동”이라는 말도 나온다. 현재 서울중앙지법에만 408명의 국선변호인이 등록돼 있다.

대법원이 밝힌 지난해 전체 국선변호인 선정건수는 12만1527건이다. 지난해 상고심에까지 접수된 전체 형사사건 164만4804건의 7.3%가 국선변호 사건이다. 형사소송법은 피고인이 사형·무기 또는 단기 3년 이상의 징역·금고에 해당하는 범죄를 저질렀거나 구속, 미성년자, 70세 이상, 심신장애, 농아자일 경우 법원이 직권으로 변호인을 선정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실제 국선변호 사건의 대부분은 빈곤을 이유로 선정되는 경우가 많다. 대법원이 제공한 ‘국선변호인 선정 피고인 현황’에 따르면 지난해 빈곤 등 기타사유로 국선을 신청한 피고인은 전체의 88%에 달한다. 국선전담변호사 제도는 2004년 처음 만들어졌다. 첫해에 10명으로 시작했으며 2016년 말 기준 222명이 활동 중이다. 각 재판부별로 1명씩 배정되며 위촉 첫해 월급은 600만원가량이고 경력에 따라 최대 800만원까지 받는다. 법관 3명과 변호사, 대학교수 등 6명으로 구성된 국선변호운영위원회가 매년 신청을 받아 선정한다.

<류인하 기자 ach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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