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 라이프] 삶이 전투 같았던 탈영병 아싼..'코리안 복서'로 어퍼컷 날린다

서필웅 2017. 12. 16.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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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룬 출신 '난민 복서' 이흑산

전국에 눈이 내리고 칼바람과 함께 강추위가 밀어닥친 지난 11일 아침 강원도 춘천 아트복싱체육관. 호리호리한 체구의 흑인 남성이 들어섰다. 기자가 “날씨가 추운데 괜찮으냐”고 묻자 “너무 춥다. 하지만 괜찮다”고 웃으며 묵묵히 훈련을 준비한다. 줄넘기를 하며 몸을 푼 뒤 섀도복싱과 샌드백 치기 훈련이 이어지자 어느새 체육관에는 땀냄새가 퍼진다. 그는 겨울이 없는 나라인 카메룬 출신의 복서 이흑산(34·본명 압둘라이 아싼)이다.

일부 세계챔피언을 제외하고는 거의 관심을 받지 못하는 국내 복싱의 현실 속에서 이흑산은 올해 가장 많은 주목을 받았다. 복싱 때문만은 아니다. 그가 난민이기 때문이다. 이흑산은 2015년 8월 경북 문경에서 열린 세계군인체육대회에 참가했다 탈영을 감행했고 우여곡절 끝에 올해 난민이 됐다. 그는 왜 모국에서 1만2000㎞나 떨어진 한국에서 난민의 삶을 선택했을까. 그에게 복싱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흑산을 만나 아픈 과거와 불안한 현실, 미래의 꿈 이야기가 뒤섞인 그의 인생사를 들어봤다. 

‘난민복서’ 이흑산이 지난 11일 춘천 아트복싱체육관에서 훈련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복싱이 구한 삶

카메룬 수도 야운데에서 태어 난 이흑산은 부모 없이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어린 시절 가난이 늘 그를 따라다녔지만 몸만은 튼튼했다. 혈기왕성한 청소년기에 거리에서 수많은 운동을 섭렵했고 그중 운명처럼 권투에 끌렸다. “단순히 복싱을 하고 싶다는 열정이 컸기에 복싱선수가 됐어요. 다른 사람들이 축구를 하는 것과 같은 마음이었죠.”

그러던 중 스무살 때 직업군인 겸 권투선수를 구한다는 공고를 보고 군대에 지원했다. 그러나 군대 생활은 생각하던 것과는 달랐다. 군인으로서 제대로 된 군사훈련도 없었고 월급 또한 받지 못했다. 군인 대상 복싱대회가 열릴 때 군대를 대표해 경기에 나가는 것이 그에게 부여된 임무의 대부분이었다. 가끔 복싱경기에 나서 대전료를 받았지만 그마저도 절반은 군에서 가져갔다. 결국, 시장에 나가 몰래 막노동과 장사를 하며 생계를 해결했다. 

이런 척박한 삶 속에서 우연히 부여된 탈출의 기회를 그는 놓치지 않았다. 문경세계군인체육대회에 출전한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한국에 구원을 요청했다. 구타가 일상인 데다 월급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는 카메룬 군대 환경에서 가족과 자신의 삶을 지키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매우 위험했죠. 잡혀서 돌아가면 죽음의 위협이 있었고 감옥에 갇힐 수도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당시 제겐 그 선택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생계를 유지할 수 없는 환경과 노예의 삶 속에서 제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기에 저는 탈출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한국정부는 이흑산이 내민 손을 선뜻 잡아주지 않았다. 탈출 이후 낸 난민신청은 기각됐다. ‘본국 송환 시 박해받을 것이라는 공포의 근거가 충분치 않다’는 것이 기각 사유였다.

이때 평생의 업이던 복싱이 이흑산을 구했다. 난민신청 결과를 기다리던 그는 천안의 한 체육관에서 복싱을 다시 시작했다. 어린 시절 운명처럼 선택했던 복싱을 쉽게 포기할 수 없었던 까닭이다. “당연히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복싱 외에는 다른 선택도 없었죠”라고 이흑산은 당시를 회상했다. 전 한국 미들급 챔피언이던 춘천 아트복싱체육관의 이경훈 관장 밑에 들어가 정식으로 프로에 데뷔하고 전적도 쌓았다. 올해 4월 미들급 유망주인 양현민을 이겼고 5월에는 전 한국 미들급 챔피언 이규원과 복싱M 슈퍼웰터급 타이틀을 벌여 한국챔피언 자리에 올랐다. 그러자 대중들이 이흑산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복서 이흑산’이 아닌 ‘난민복서 이흑산’으로서 받는 주목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그에게는 구원이다. 이흑산의 사연이 여러 매체를 통해 알려졌고 이 영향으로 지난 7월 난민 지위를 인정받았다.

이 결정으로 이흑산의 삶은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았다. 그는 “난민 인정 전에는 그 어떤 미래도 머릿속에 그릴 수 없었어요. 지금은 마음이 훨씬 편해요”라며 현재의 심리 상태를 털어놓았다. 한국에서의 삶이 막 1라운드를 끝낸 느낌이다. 복서로서도 한 발짝 더 전진했다. 지난달 25일 서울 강북구 신일고 체육관에서 열린 웰터급 한일전 경기에서 일본의 바바 가즈히로에게 한국 정착 이후 첫 번째 국제전 승리를 거뒀다. ‘이흑산’이라는 이름이 한글로 크게 적힌 트렁크를 입고 링에 올라 3라운드에 왼손 스트레이트를 바바의 얼굴에 꽂아 KO로 경기를 끝냈다. 이흑산은 “유난히 더 응원받는 느낌이었습니다. 경기 후 한일전의 의미를 알고 나니 더 기분이 좋았어요”라며 당시 경기에 대한 소감을 밝혔다.

◆직면한 생계의 위협, 하지만 꿈은 버리지 않는다.

다만, 새롭게 시작된 삶의 2라운드 역시 평탄하지 않을 것임은 잘 안다. 생명의 위협에서 벗어나고 자유도 찾았지만 생계의 위협이라는 또 다른 벽이 이흑산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3~4개월에 한번 서는 경기의 대전료는 생활에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지난달 바바와의 경기 뒤 대전료로 받은 돈도 40여만원에 불과했다. 대전료만으로 한국에서 생활을 영위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여기에 카메룬에 남은 할머니와 여동생, 가봉에 계신 어머니를 위한 생활비도 벌어야 한다. 어쩔 수 없이 지금은 돈을 벌기 위해 일을 찾고 있는 중이다. “미래는 멀리 있어요. 일단 일반적인 생활을 찾는 게 먼저죠”라고 이흑산은 자신이 현재 처한 상황을 설명했다. 그는 “복싱을 하면서 일을 동시에 하기는 힘듭니다. 복싱만으로 버는 돈도 적기 때문에 결국 선택에 직면할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털어놨다.

물론 복서로서의 꿈을 포기한 것은 결코 아니다. 이흑산은 카메룬에 있을 때부터 ‘가능성이 있다’는 칭찬을 여러 번 받았다. 키 180㎝, 리치(양팔을 벌린 길이) 187㎝의 훌륭한 신체조건에 강한 체력까지 갖췄기 때문이다. 적정 체급인 웰터급의 일반적 신장이 170㎝ 초반, 리치가 175㎝ 중반인 점을 감안하면 축복받은 신체라고 할 수 있다. 타고난 근육질에 군살도 없어서 체중조절 부담도 적다. 이런 뛰어난 신체조건으로 카메룬에서도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며 자신감도 쌓았다. “테크닉 면에서는 뛰어나지 않지만 강한 주먹으로 상대를 KO시킬 수 있습니다”라고 스스로를 평가한다. 복서로서 적지않은 나이지만 더 성장할 수 있다고도 믿고 있다. “한국에서 체계적인 훈련을 받으면서 세밀한 테크닉 면에서 많이 발전했다고 느껴요. 꾸준히 훈련을 하면 한 단계씩 성장해 나갈 수 있다고도 믿지요. 지금은 제 미래를 멀리 보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결국 지금은 자신을 복싱에 전념하게 해줄 누군가의 손길을 다시 한번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그는 “가능하다면 스폰서를 찾아서 복싱을 하게 되면 더 좋을 것 같아요. 얼마나 오랫동안 복싱을 할지 모르겠지만 생계 걱정 없이 복싱을 하면서 안정적으로 선수생활을 하고 싶어요”라고 진짜 바람을 털어놓았다. 복싱선수로 성공한다면 무엇을 하고 싶으냐고 묻자 “일단은 돈을 많이 벌고 싶습니다”라고 답하면서도 이후의 삶을 구체적으로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고 밝혔다.

“주변에서 복서로서 축복받은 몸을 가지고 있으니 노력만 하면 된다고 많이 이야기를 해줍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저의 많은 시간과 삶이 희생돼야 하지요. 지금 당장은 먹고사는 것이 최우선이라 어려움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 모든 현실의 불안을 안고 이흑산은 연습에 나서고 링에 오른다. 다만 언제나 그랬듯이 모든 것이 순조롭게 잘 흘러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삶의 1라운드에서 기어코 승리했기에, 새로 시작된 2라운드도 반드시 이겨낼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은 어떤 방법으로 복싱을 계속할 수 있을지 의문이 많습니다. 나이도 많기 때문에 걱정도 됩니다. 하지만 저는 복싱을 계속하고 싶어요. 그렇게 해서 언젠가는 세계무대로 나갈 겁니다.”

이런 굳은 결심을 갖고 한국챔피언 이흑산은 또다시 주먹을 휘두른다. 주먹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겨울 추위를 녹이는 듯하다.

춘천=서필웅 기자 seoseo@segye.com
사진=남정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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