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길의 스포츠에세이] 영웅이냐, 역적이냐..감독의 운명을 바꾼 한일전

입력 2017. 12. 15. 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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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한일전은 전쟁이다. 결과에 따라 감독들의 운명도 달라졌다. 1997년 9월 28일 도쿄국립경기장에서 열린 1998프랑스월드컵 예선전에서 2-1로 이기고 축구역사에 회자되는 ‘도쿄대첩’을 완성한 뒤 기뻐하는 차범근 감독의 모습(위쪽)과 2달 뒤 서울올림픽주경기장에서 일본에 0-2로 패한 차범근 감독(아래쪽)의 표정은 완전히 정반대다. 스포츠동아DB
한국과 일본이 맞붙는 한일전, 이름만 들어도 머리칼이 쭈뼛 선다. 라이벌전만으로는 부족하다. ‘숙명’이라는 수식어가 붙어야 제격이다. 숙명의 라이벌전은 국내 스포츠 최고의 흥행카드다.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상대다. 누군가는 가위바위보나 제기차기, 딱지치기도 지면 안 된다고 한다. 종목 불문이다. 선수들의 전의는 언제나 폭발할 정도로 뜨겁다.

축구라는 종목은 특히 더하다. 축구 한일전은 전쟁이다. 해방 이후 민족의 설움을 달래준 종목 중 하나가 바로 축구다. 우리는 해방 이후 우위를 굳건히 지켰다. 1972년 한일 정기전이 생겼다. 서로를 짓밟아야하는 입장이면서도 동반 성장의 필요성 때문에 만들어졌다. 매년 친선전을 가졌다. 물론 정기전에서도 우리가 앞섰다.

이 특별한 경기에는 으레 천당과 지옥이 등장한다. 이기면 영웅이고, 지면 역적이다. 보는 입장이야 쫄깃한 승부를 즐긴다지만 뛰는 선수나 감독은 죽을 맛이다. 어떻게든 역적은 면해야한다. 그래서 죽을힘을 다한다. 언제나 흥미진진한 이유다. 한일전 결과 때문에 혼쭐이 났던 감독들의 사연은 애잔하다. 감독들의 살 떨렸던 세월은 지금도 생생하다.

스위스 월드컵 예선전 당시 한일전 모습. 사진제공|대한축구협회
1979년에는 특이하게도 두 차례나 한일 정기전이 열렸다. 1978년에 못한 경기를 한꺼번에 치른 것이다. 3월4일(도쿄)과 6월16일(동대문)이다. 일본에서 열린 경기에서 한국은 1-2로 졌다. 슈팅수 24개를 기록하는 등 일방적인 경기를 하고도 일본의 역습에 당했다. 상대를 얕잡아본 탓이다.

1974년 이후 5년만의 정기전 패배에 여론은 들끓었다. 얼마나 혼이 났으면 대한축구협회는 기술분과위원회를 거치지 않고 상임이사회를 통해 함흥철 감독-김정남 코치를 전격 해임했다. 이들은 1978년 아시안게임을 포함해 3관왕을 달성하며 역대 최강의 전력을 구축한 코칭스태프였다. 지도력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일본에 졌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잘렸다.

1982년 뉴델리아시안게임에서도 경질의 아픈 역사는 되풀이 됐다. 최은택 감독이 이끈 한국은 아시안게임 2연패를 자신했다. 전력도 좋았다. 하지만 조별 예선에서 이란에 0-1로 진데 이어 일본에도 1-2로 역전패 당하며 예선 탈락했다. 1979년 3월 패배 이후 일본전 5연승 행진이 멈췄다. 최 감독은 지휘봉을 빼앗겼다.

1993년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미국월드컵 최종예선에서 한국은 이라크의 도움으로 극적으로 본선 티켓을 거머쥐었다. 반면 일본은 탈락했다. 하지만 김호 감독은 귀국길에 퇴진 압력에 시달려야했다. 이유는 일본에 0-1로 졌기 때문이다.

미국 월드컵 최종예선 한일전 모습.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1997년 11월 홈에서 열린 프랑스월드컵 예선전에서 일본에 0-2로 패한 한국은 1998년 3월1일 다이너스티컵(1990년부터 1998년까지 동아시아 4개국이 출전한 친선대회)에서도 1-2로 졌다. 한번도 아니고 연거푸 패하자 여론이 가만있지 않았다. 불과 6개월 전인 1997년 9월, 원정으로 치러진 프랑스월드컵 예선전에서 2-1 극적인 승리를 거두고 ‘도쿄 대첩’을 완성했고, 월드컵 본선행 확정으로 영웅 대접을 받던 차범근 감독도 순식간에 역적으로 몰렸다. 경질론도 거셌다. 월드컵 본선 티켓보다 한일전, 그것도 3.1절의 한일전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2011년 8월 일본 삿포로에서 열린 친선전에서는 조광래 감독이 굴욕을 당했다. 0-3 패배를 당한 조 감독을 향한 퇴진 압력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현재 태극전사를 이끌고 있는 신태용 감독도 역전패로 홍역을 앓았다. 신 감독이 이끈 청소년대표팀은 2016년 1월31일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아시아축구연맹(AFC) U-23 챔피언십 결승에서 2-0으로 앞서고도 후반 내리 3골을 내줘 일본에 2-3으로 졌다. 방심한 탓이다. 리우올림픽 출전 티켓을 따냈지만 신 감독에 대한 호의적인 평가는 한순간에 등을 돌렸다.

지난 2016년 아시아 U-23 챔피언십 결승 한일전 장면.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2017 동아시아축구연맹(EAFF) E-1 챔피언십(동아시안컵) 남자부 최종 경기가 16일 한일전으로 열린다. 1승1무의 한국과 2승의 일본이 우승을 다툰다. 양 팀은 나란히 러시아월드컵 본선에 간다. 이번 대회는 본선을 위한 하나의 준비과정이다. 하지만 한일전은 자존심이 걸린 문제다. 감독들도 이를 잘 안다. 결전의 의지를 다지는 이유다. 일본 바히드 할릴호지치 감독은 “단단히 준비할 것이고, 승리하고 싶다”고 했고, 신 감독도 “2회 연속 우승한 팀이 없었는데, 이번에 우리가 2회 연속 우승을 이뤄낼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번 대결은 78번째 한일전이다. 현재까지 한국이 상대전적 40승23무14패로 앞서 있다. 하지만 최근의 흐름은 일본이 압도적이다. 한국은 최근 5경기 무승(3무2패)이다. 2010년 5월 열린 친선전이 마지막 승리다. 요즘이야 한 경기 졌다고 감독이 경질되는 시대는 지났지만 그래도 패배의 충격을 클 수밖에 없다. 신 감독은 사활을 걸어야한다.

최현길 전문기자 choihg2@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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