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정한 과학으로 마음을 움직이다

어수웅 기자 2017. 12. 15.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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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 보건과학대학 김승섭 교수

아픔이 길이 되려면

김승섭 지음|동아시아|320쪽|1만8000원

10평이 채 안 되는 연구실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벽에 붙은 '다짐'이었다. '매일 두 시간 읽기'.

"정작 교수가 되고 나니 공부를 안 하더라고요. 겁이 났어요. 이러다가 끝도 없이 밀릴지 모르겠다. 읽지 않으면 안 되겠다."

고려대 김승섭(38) 교수는 그런 사람이다. 아직 그의 이름이 낯설지 모르겠다. '아픔이 길이 되려면'은 심지어 그의 첫 책. 그런데도 '2017 올해의 저자' 전문가 추천에서 가장 많은 지지를 받았다. 총 75명 중 22명의 추천. 그 숫자를 전하자 앳된 청년 같은 교수님이 얼굴을 붉힌다. "사실 너무 아픈 이야기들투성이인데, 많이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진심으로 격려받은 느낌이에요."

명함에는 보건과학대학 보건정책관리학부 부교수라 적혀 있다. 얼핏 추상적이고 관료적으로 압박하는 명사들의 집합. 그런데 어떻게 시인과 소설가와 인문·사회과학 출판사 대표들, 많은 추천위원들 다수의 지지를 받았을까. 과학자의 언어와 에세이스트 언어의 공존이 김승섭 문장의 힘이다. 출판평론가 표정훈씨는 이렇게 그를 요약했다. "과학적 근거, 논리적 설득력, 사회적 메시지, 여기에 사람에 대한 깊은 공감까지 갖춘 보기 드문 글."

장련성 객원기자

그는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에서도 드문 '사회 역학' 전공자다. 고용 불안·혐오·차별·재난 등이 어떻게 우리 몸을 병들게 하는가를 실증적으로 밝히는 학문. 98학번으로 연세대 의대를 졸업했고, 하버드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2013년 고려대에 임용됐다.

"제 공부는 정책 입안자나 공무원에게 전달되는 게 중요한데, 아무리 논문을 써도 그분들이 잘 읽지를 않으시더라고요(웃음). 그래서 좀 더 쉽고 간명한 글쓰기를 시도하게 됐어요."

'말하지 못한 학교 폭력, 기억하는 남성의 몸' '제도가 존재를 부정할 때, 몸은 아프다-동성결혼 불인정과 성소수자 건강의 관계' '한국을 떠나면 당신도 소수자입니다-부끄러움을 모르는 우리 사회 인종차별' 등 각 장별 제목이 김 교수 글의 지향과 스타일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를 추천한 작가 제현주씨는 “엄정한 과학을 경유해 마음의 움직임으로 나아가게 한다. 그런 글은 드문 만큼 귀해서 글 쓰는 과학자 김승섭의 등장이 반갑다”고 했다.

안암동 연구실 한편에는 올해 열 살인 큰딸이 만들어 선물했다는 찰흙 인형이 있다. 제목은 ‘걱정을 들어주는 새’. 아빠가 세상의 어떤 걱정이든 함께 듣고 함께 아파하는 사람이라는 걸 아는 걸까. 아니면 그런 아빠의 걱정만은 자신이 들어주겠다는 걸까. 그는 올해 열 살, 여덟 살, 다섯 살 난 세 딸의 아버지. ‘천하무적’이겠다고 덕담을 건네자, 환하게 웃는다. “딸이 많을수록 오래 산다는 건 보건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입니다. 딸은 아들보다 부모에게 자주 연락하고, 덕분에 노년기의 외로움 극복에 큰 도움이 되죠.”

그에게는 세 딸이 있고, 사회적 상처로 아파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과학자가 있다. 우린 이렇게 삶을 견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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