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의 세계 - 김상욱의 물리공부] (15) 우리와 그들의 대화 가능할까

입력 2017. 12. 14. 21:52 수정 2017. 12. 14. 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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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세상을 보는 두 가지 관점
ㆍ시간의 한쪽만 볼 수 있는 인간, 모든 시간 꿰뚫어 보는 외계인

시공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는 두 존재가 만난다면… 영화 에서 외계생명체 헵타포드가 긴 촉수를 뻗어 공중에 자신들의 언어 헵타포드어를 쓰고 있는 장면. 이는 인간과 헵타포드가 다른 방식으로 우주를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인간은 시간의 한순간만 볼 수 있지만 헵타포드는 과거와 미래를 한꺼번에 본다. 영화 속 주인공은 헵타포드어를 배워 사건을 순차적으로가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를 뒤섞어 경험함으로써 외계생명체의 언어와 사고체계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물리학에서도 세상을 보는 두 가지 관점이 있는데, 아주 짧은 시간에 일어나는 속도의 변화를 기술하는 뉴턴의 운동법칙과 ‘어떤 물리량’을 최소로 만드는 경로에 따라 움직이는 해밀턴의 운동법칙이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 뉴턴과 해밀턴

어느 날 하늘에 거대한 외계비행선이 나타났다. 사람들은 비행선의 외계인들을 ‘헵타포드’라고 불렀다. 헵타포드와 대화하려는 시도는 난항을 거듭한다. 그들의 언어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헵타포드의 언어는 우리와 단순히 문법상의 차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시공간을 보는 기본 틀이 달랐다. 테드 창의 소설 <네 인생의 이야기>를 관통하는 주제다. 올해 초 개봉했던 영화 <컨택트>의 원작이기도 하다. 소설 속의 한 문장이다. “이것은 헵타포드가 최초의 획을 긋기도 전에 문장 전체가 어떤 식으로 구성될지 미리 알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인간과 헵타포드는 다른 방식으로 우주를 이해한다. 인간은 시간의 한 순간만을 볼 수 있지만 헵타포드는 과거와 미래를 한꺼번에 본다. 인간에게 과거는 기억 속에만 존재하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이지만, 헵타포드에게는 과거뿐만 아니라 미래마저 생각 속에 이미 한꺼번에 존재한다. 그들은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정해진 사건을 현실화하기 위해 언어를 쓴다. 말도 안 되는 듯 들리겠지만, 헵타포드의 인식 틀에 대한 이런 설정은 물리학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다. 사실 헵타포드를 만든 작가 테드 창은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했다.

뉴턴의 운동법칙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일어나는 속도의 변화를 기술한다. 0보다는 크지만 0이나 다름없는 짧은 시간, 그러니까 무한히 0에 가까워지지만 0이 되지는 않는, 그런 짧은 시간 간격 말이다. 이런 짧은 시간 동안의 변화율을 미분이라 부른다. 변화를 일으키는 원인은 ‘힘’이다. 힘이 원인으로 작용하여 가속이라는 결과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처럼 짧은 시간 간격으로 촘촘히 이어지는 인과율의 연쇄는 뉴턴역학을 이해하는 핵심적인 사고의 틀이다. 우주는 이렇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톱니바퀴처럼 정해진 미래를 향해 굴러간다.

19세기 중반 윌리엄 해밀턴은 운동법칙을 기술하는 새로운 원리를 제시한다. 물체는 ‘어떤 물리량’을 최소로 만드는 경로를 따라 움직인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알기 위해 자유낙하 하는 물체를 생각해보자. 뉴턴의 관점에 따르면 내가 물체를 놓는 순간, 물체는 중력에 의해 가속되어 수직으로 낙하하기 시작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낙하속도는 점점 빨라진다. 하지만 해밀턴의 관점에서는 이렇다. 물체는 여러 경로와 과정을 거쳐 땅바닥에 도달할 수 있다. 원형의 경로나 하트 모양의 경로를 따라 낙하하거나, 직선으로 떨어지더라도 처음에 빨랐다가 나중에 느리게 갈 수도 있고, 그냥 일정한 속도로 떨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가능한 모든 경로와 과정들에 대해 작용량(action)이라 부르는 물리량을 계산해보면, 뉴턴역학이 예상하는 경로와 과정에서 그 값이 언제나 가장 작다. 그래서 그렇게 낙하하는 거다. 세상에! 이게 우연일까?

이 글만 읽어서는 뭔가 마술 같은 일이 일어난 것 같지만, 수학을 들여다보면 당연한 결과다. 마치 2를 3번 더한 것이 2 곱하기 3과 같은 것처럼 말이다. 결국 뉴턴역학과 해밀턴역학은 물체의 운동에 대해 동일한 결과를 준다. 하지만 철학적으로 미묘한 차이가 있다. 해밀턴역학에서는 작용량을 최소로 만들려는 ‘경향’이 물체의 운동을 결정한다. 그래서 이것을 ‘최소작용의 원리’라고 부른다. 이 원리가 작동하려면 가능한 모든 미래의 경로를 미리 내다보며 작용량을 계산해야 한다. 헵타포드는 이런 틀로 세상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어떤 이들은 최소작용의 ‘경향’을 ‘의도’로 바꾸고 싶은 유혹을 느낄 것이다. 실제 해밀턴의 아이디어는 피에르 루이스 모페르튀이에서 나온 것인데, 모페르튀이는 최소작용의 원리를 신학과 결부시켰다. 이 세상은 누군가의 의도에 의해 굴러간다는 거다. 누군가는 바로 ‘신(神)’이다.

■ 컴퓨터와 인공지능

컴퓨터와 인공지능은 비슷해 보이지만 근본원리는 다르다. 사실 그 다름은 뉴턴역학과 해밀턴역학의 차이와 비슷하다. 컴퓨터는 기본적으로 앨런 튜링의 아이디어에서 나왔다. 0과 1의 비트로 표현된 데이터를 하나씩 읽어서 정해진 규칙에 따라 순차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기계를 튜링기계라 한다. 이 순차적 작업리스트가 알고리즘이고, 이것을 만드는 과정이 코딩이다. 튜링기계는 수학이 하는 모든 작업을 할 수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대부분의 컴퓨터는 정확히 이런 방식으로 작동한다. 컴퓨터가 사랑을 하지 못하는 이유다. 사랑은 수학이 아니니까.

튜링기계인 컴퓨터는 뉴턴의 기계적 인과율에 따라 작동된다. 한 순간 하나의 비트를 읽어서 명령어에 따라 시간 순서로 철컥철컥 일을 처리한다. 튜링보다 앞서 비슷한 아이디어를 생각한 사람은 찰스 배비지였다. 배비지는 톱니바퀴로 된 컴퓨터를 만들려고 했던 사람이다. 안타깝게도 당시의 기술로는 그런 정교한 기계장치를 만들 수 없었지만 말이다. 결국 컴퓨터는 뉴턴역학의 방식으로 생각하는 기계다. 여기에 의도 따위는 없다. 그냥 알고리즘에 따라 미분방정식으로 기술된 자연법칙처럼 다음 순간을 향해 발을 내디딜 뿐이다. 미래는 모두 다 결정되어 있다.

인공지능은 신경망을 기반으로 한다. 신경망은 인간의 뇌가 작동하는 원리를 모방한 것이다. 뇌는 뉴런이라는 신경세포들로 구성된다. 뉴런은 신호를 전기적으로 전달하는데, 보통 수천개의 다른 뉴런들과 연결되어 있다. 이들 사이의 연결부위는 그냥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연결의 세기가 변할 수 있다. 우리가 기억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 연결부위가 갖는 세기들의 집합에 불과하다. 연결 세기를 조정하여 기억을 만드는 과정을 학습이라 한다. 뇌의 이런 특성은 인공 신경망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으며, 이 때문에 신경망도 학습을 할 수 있다. 학습이란 정해진 입력에 대해 원하는 출력이 나오도록 연결 세기를 조정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눈치챈 독자도 있겠지만 이거야말로 최소작용 원리의 사고방식이 아닌가.

알파고의 목적은 바둑에서 이기는 거다. 수학적으로 말해서, 나와 상대가 가진 집 차이를 최대로 만드는 경향으로 움직이는 기계다. 이를 위해 알파고는 모든 가능한 미래를 미리 가보며 집의 차이를 계산한다. 그 차이가 최대가 되는 경로가 나오도록 연결망의 결합 세기를 조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걸 알파고의 의도라고 불러야 할까? 알파고를 만든 인간의 의도가 알파고에 의해 발현되고 있는 걸까? 그렇다면 인간의 의도는 또 다른 존재의 의도에서 온 것인가?

■ 우연과 필연

생물학자 자크 모노는 그의 저서 <우연과 필연>에서 생명이 갖는 기묘한 특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생명체의 구조나 그것이 활동하는 모습을 보면, 어떤 의도를 추구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거다. 날아다니는 벌을 보라. 이들은 꿀을 구할 목적으로 꽃을 찾고, 동료들에게 위치를 알려주기도 한다. 자연법칙은 이러한 의도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자연에 의도가 있다는 생각은 근대과학의 기본 태도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자크 모노의 말이다. “과학은 객관적이어야 한다. 현상을 설명하는 데 어떤 목적인(目的因)이나 의도를 끌어들여서는 참된 인식에 도달하지 못한다. 따라서 이런 것들은 체계적으로 거부해야 한다.”

우주에 의도가 있다고 하면 모든 과학적 난제가 일거에 해결된다. 우주는 왜 생겨났나? 신의 의도 때문이다. 인간은 왜 존재하나? 신이 원해서다. 고온 초전도 현상은 왜 존재하나? 신이 그런 현상이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실제 많은 문명이 이런 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문제에 답을 해왔다. 우리도 뭔가 이해 안 되는 일이 벌어지면 하늘의 뜻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서양의 근대과학이 특별한 것은 바로 신의 의도를 제거하고 세상을 이해하려 시도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생명이 보여주는 생존의 욕구, 더 많은 자손을 남기려는 의도는 과연 무엇인가? 이에 대해서 현재 우리가 가진 과학적인 답은 ‘진화론’이다. 진화에는 의도가 없다. 주사위 던지듯이 무작위로 모든 가능성이 펼쳐진다. 검은 나방도 나오고 흰색 나방도 나온다. 세상이 밝을 때는 흰색 나방만 살아남는다. 검은색은 포식자인 새의 눈에 잘 띄기 때문이다. 세상이 어두워지면 검은색 나방이 살아남는다. 이런 식으로 조금씩 환경에 적응하려고 애쓰는 과정에서 인간과 같이 고도로 복잡한 생명체마저 나올 수 있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들도 적응하여 살아남기 위해 선택된 행동일 뿐이다. 그것에 대해 의도라고 부르는 것은 마치 알파고가 이길 의도로 바둑을 두었다는 것과 비슷한 말이다. 진화론의 시각에서 생명은 우연의 산물이다. 우리가 필연이라고 부르는 것은 일어난 사건에 대해 그렇게 해석을 하는 것뿐이다.

생명체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물질은 원자로 되어 있다. 원자는 양자역학으로 설명된다. 양자역학은 뉴턴역학과 사뭇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설명한다. 양자역학에서는 더 이상 뉴턴역학과 같이 결정된 미래란 존재하지 않는다. 인과율이 깨지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것이 인과율의 지배를 받는 것도 아니다. 뉴턴역학에서는 물체의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있으나 원자의 위치를 정확히 아는 것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양자역학이 불가지론(不可知論)은 아니다. 특정 위치에서 원자가 발견될 확률은 알 수 있다. 고작 확률만 가지고 뭘 할 수 있냐고 생각하실 분들은 스마트폰을 보시기 바란다. 스마트폰은 양자역학적 원리에 기반을 두고 작동된다.

원자를 기술하는 양자역학이 확률만을 알려준다는 것은 생명과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양자역학적 결과는 우연이 지배한다. 주사위를 던지면 어느 숫자가 나올지 알 수 없다. 1이 나왔다면 1이 나온 이유 따위는 없다. 그냥 우연이다. 하지만 우리는 1이 나온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진다. 1이 나온 것은 신의 의도가 아닐까? 그렇게 주장한다고 해도 반박하기는 쉽지 않다. 사실, 있는 것은 보여줄 수 있어도 없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크 모노의 생각은 이렇다. 생명현상도 물리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물리법칙은 원자 수준에서 확률만을 알려준다. 생명도 이 확률법칙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간다. 수많은 가능성 가운데 왜 특정 사건이 일어난 것인지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주사위를 던져 왜 하필 ‘1’이 나왔냐고 묻는 거랑 비슷하다. ‘1’은 가능한 사건의 하나일 뿐이다. 이처럼 진화는 우연히 일어난다. 우연으로 선택된 수많은 사건의 연쇄에 의미를, 더 나아가 의도를 부여할 수도 있다. 이렇게 우연은 필연이 된다. 하지만 거기에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소설에서 헵타포드는 과거와 미래를 한꺼번에 본다. 마치 해밀턴역학의 물체가 모든 가능성을 한꺼번에 펼쳐놓고서 최선의 결과를 찾아가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헵타포드는 왜 사는 걸까? 미래를 다 아는 존재에게 현재를 산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소설에서 작가는 이렇게 설명한다. “어떤 대화가 되었든 헵타포드는 대화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미리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지식이 진실이 되기 위해서는 실제로 대화가 행해져야 했던 것이다.”

물리학에는 세상을 보는 두 가지 관점이 있다. 하나는 지금 이 순간의 원인이 그다음 순간의 결과를 만들어가는 식으로 우주가 굴러간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작용량을 최소로 만들려는 경향으로 우주가 굴러간다는 거다. 두 방법은 수학적으로 동일하다. 동일한 결과를 주는 두 개의 사고방식인 것이다. 후자에 대해 우주의 ‘의도’라고 부르고 싶은 것은 신의 존재를 믿는 인간의 본성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은 일어난 일을 인간이 해석하는 방법일 뿐이다. 두 경우 모두 세상은 수학으로 굴러간다. 수학에 의도 따위는 없다.

▶필자 김상욱
고등학생 때 양자물리학자가 되기로 결심한 뒤 카이스트 물리학과에서 학사·석사·박사 학위를 받았다. 포스텍, 카이스트, 서울대 BK 조교수를 거쳐 2004년부터 부산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철학하는 과학자로 과학의 대중화, 대중의 과학화를 위해 힘쓰고 있다. <영화는 좋은데 과학은 싫다고?> <과학수다 1, 2>(공저) <과학하고 앉아 있네 3, 4>(공저) <김상욱의 과학공부>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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