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임원으로 입사 1년반만에 공황장애에 급성 심정지까지..프랑스계 회사에서 무슨 일이?

최미랑 기자 2017. 12. 14.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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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프랑스계 국내 회사에서 일하던 직원이 입사 1년6개월만에 우울증과 공황장애 등을 앓고 낸 산재 신청을 근로복지공단이 받아들였다. 신청자는 이전에도 정신질환을 앓은 적이 있었지만,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질판위)는 이와 무관하게 과중한 업무와 상사의 괴롭힘 때문에 병이 났다고 판단했다.

14일 질판위의 판정서와 이모씨(55)가 낸 요양신청서 등을 종합하면, 이씨는 2015년 2월 에어리퀴드코리아(이하 에어리퀴드)에 입사했다. 직책은 ‘삼성전자 전략 담당 매니저’였다. 에어리퀴드는 프랑스 기업의 한국 자회사로, 반도체 제조에 쓰이는 산업용 가스를 주로 판매한다. 삼성전자가 이 회사의 주요 고객이었다.

이씨가 들어가기 직전 에어리퀴드는 삼성전자와 물량 선적을 두고 갈등을 빚었다. 이씨의 임무는 악화된 두 회사의 관계를 푸는 일이었다. 에어리퀴드는 과거 삼성전자와 반도체 분야에서 오래 근무한 경력을 보고 그를 채용했다. 담당 업무에는 ‘삼성전자 고위급 임원들과 교류 지속 및 발굴’, ‘삼성전자와 문제 발생 시 고위층을 통한 우선 해결방안 도출’ 등이 명시됐다.

입사할 당시 직위는 전무였지만 이씨는 팀원 없이 혼자 일했다. 회사를 대표하는 ‘을’의 입장으로 삼성전자를 수시로 드나들었다. 회사는 그에게 “삼성전자 최고위급 임원과 회의를 주선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삼성전자 임원들과 주말을 가리지 않고 식사 자리를 마련하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주말에도 회의와 문서작성 등에 매달린 탓에, 주당 노동시간은 60시간을 넘었다.

입사한 이듬해 2월, 담당 상사가 바뀌면서 진짜 악몽같은 나날이 시작됐다. 새로 온 싱가포르인 상사는 인격모욕적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당신은 중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사업 측면이나 기술 측면이나 자질이 충분하지 않다”며 이씨를 압박했다. 언어장벽도 문제였다. 미국계 회사에서 오래 근무해 영어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프랑스인이나 싱가포르인 상사의 억양을 알아듣기가 쉽지 않았다. 이씨는 매주 토요일마다 원어민 강사의 영어 수업을 들었다.

1년차 인사고과에서 그는 저성과등급인 ‘D’를 받았다. 팀원 한 명 없었는데 ‘팀 및 업무관리’ 분야에서도 D가 나왔다. 이씨는 자신에 대한 평가결과가 변조됐다고 생각했다. 매출 목표달성률은 93.8%였는데 34%로 기록됐고, 영업이익 달성율은 100%에서 12%로 낮춰 적혔다는 것이다.

지난해 8월 초 이씨는 결국 정신과를 찾았다. 광장공포증이 있는 공황장애와 스트레스에 대한 급성반응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며칠 못 가 이씨는 회의 중에 쓰러졌다. 급성 심정지가 온 것이었다. 동료들이 곧바로 심폐소생술을 해 목숨을 건졌다.

이 일로 2주간 입원했다 돌아오니 날벼락이 떨어졌다. 인사담당자는 “6개월 분 급여를 보상할 테니 퇴사하라”고 했다. 거부하자 “인사고과를 낮게 줄 것이고, 결국 저성과자로 해고될 것”이라고 했다. 이씨가 사표를 쓰지 않고 버티자 회사는 ‘특별과제 매니저’라는 새 직책을 내밀었다. 대외 업무 없이 혼자서 국내 시장조사 보고서를 만드는 일이었다. 이씨는 사실상 업무를 주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며 크게 반발했지만 지난해 12월 인사명령이 떨어졌다. 그는 2월부터 공황장애 등으로 병가를 내고 휴직 중이다.

근로복지공단은 이씨가 업무상 재해를 입었다고 판단했다. 지난 3월에 이씨가 낸 산재신청을 전부 승인한 것이다. 근로복지공단 서울강남지사는 지난 8일 “공황장애·급성스트레스장애·주요 우울장애(중증도)·기타 실신 및 허탈을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한다”고 밝혔다.

사측은 “상사의 말은 폭언이 아니라 업무 중에 나온 통상적인 대화이고, 퇴사를 권한 적은 있지만 압박한 적은 없다”고 주장했다. 그의 업무성과는 조작된 것이 아니라 첫 해부터 좋지 않았고, 담당업무를 바꾸는 것에도 이씨가 동의했다고 주장했다. 지난 7월 서울지방노동위원회가 이씨가 낸 부당인사명령 구제신청을 기각한 걸 근거로 들었다.

그러나 근로복지공단은 “입사 후 팀원 없이 혼자 일하면서 업무가 과중했고, 새로 부임한 외국인 상사의 과도한 성과 요구와 모욕적인 언사로 극심한 스트레스와 자살충동, 우울증 등의 심리상태였음이 확인된다”고 했다. 이씨는 2010년부터 강박·불안장애 등으로 치료를 받고 2015년 무렵 완치됐는데, 이런 병력은 그의 산재신청과 무관하다고 봤다. 이씨를 대리한 김승현 노무사는 “그동안 근로복지공단은 정신질환을 앓은 적이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정신질환을 업무상 재해로 거의 인정하지 않았는데, 앞으로 정신질환과 관련된 산재가 지금보다 폭넓게 승인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최미랑 기자 ra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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