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 옆집 여자의 소심한 복수

입력 2017. 12. 13. 19:56 수정 2017. 12. 13.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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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김홍민의 탐정놀이

[한겨레]

이웃집 여자를 처음 만난 건 이 아파트로 이사 오고 정확히 일주일이 지난 어느 일요일이었다. 밤새 연재 원고를 쓰느라 끙끙거리다가 겨우 마무리한 게 새벽 5시쯤이었나. 마음 편히 늦잠을 잘 요량이었다. 아침노을이 유난히 짙다고 생각하며 잠자리에 들었던 기억이 난다. 정신없이 곯아떨어졌다. 얼마나 잤을까. 초인종 소리에 퍼뜩 잠에서 깼다. 시계를 보니 아침 7시가 막 지나려는 참이었다. 일요일 식전 댓바람부터 집으로 찾아올 만한 사람이 없는데. 누군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저러다가 제풀에 지치면 미련 없이 돌아갈 정도로 사소한 용건을 가진 이겠거니 여기고 돌아누웠다.

한데 초인종 소리가 두어 번 이어지더니 이내 현관문이 울리기 시작했다. 쾅쾅쾅쾅. 마치 사채업자가 어처구니없는 대출 금리로 빚을 진 채무자에게 다짜고짜 돈을 받아내러 온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사나운 기세였다. 사소한 용건이 아닌 모양이네. 혹시 불이 났다거나 지진이 발생했으니 긴급히 대피하라고 알려주려는 걸까.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며 침대에서 내려와 현관문으로 향했다. 알 수 없는 불안함이 양쪽 어깨에 들러붙어 있었다.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무릎이 맥없이 비틀거렸다. 한 손으로 얼굴을 썩썩 문지르고 나서 문을 열었다.

이른 아침 찾아온 옆집 여자
벽간 소음으로 싸워

밖에는 처음 보는 여자가 서 있었다. 잠에 취해 어질어질한 눈으로 보기에도 몹시 화가 난 표정이었다. “누구… 세요?” “옆집인데요.” 차가운 바람이 안으로 들이닥쳤다. “저희 집 벽에서 자꾸 쿵쾅거리는 소리가 나서요. 조금 전까지요. 제가 잠을 잘 수가 없어요.” “쿵쾅거려요? 저는 모르겠는데.” 나는 침대에 누워 있었고 이 집에는 혼자 사니까. 세탁기나 청소기를 돌리지도 않았다. 갑자기 짜증이 나서 신경질이 묻어나는 투로 말했다. “저희 집이 아닌 것 같은데요.” 여자는 미안해하는 기색 없이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어디서 나는 소리죠?” “모르죠. 어쨌든 저희 집은 아닙니다.” 나는 일부러 쾅 하고 문을 닫았다.

이웃집 여자와 두 번째로 대화를 나눈 건 그로부터 한 달쯤 지나서였다. 그사이에도 한두 번 스치듯 지난 적은 있었지만 전혀 알은체를 하지 않았다. 서로의 첫인상이 나빴기 때문이리라. 공교롭게도 그날 역시 일요일이었다. 나는 아침부터 부지런을 떨며 대청소를 했다. 대청소라고는 해도 잔뜩 쌓인 책을 정리하고 책을 담았던 박스를 끈으로 묶어 버리거나 먼지를 털어내는 수준이다. 그 전에 잠시 설명해 두자면 이 아파트는 내 주거공간이자 출판사 사무실이기도 하다.

출판사 사무실답게 신간이 출간되거나 이런저런 행사를 치르고 나면 아파트는 금방 창고처럼 변한다. 그러다 보니 한 달에 하루는 날을 잡아서 책을 정리하고 폐지를 재활용 수거함에 내다놓는다. 이사 직후여서 정리하는 데만 꼬박 한나절이 걸렸다. 비닐포장조차 뜯지 않은 잡지들이 책장 구석구석에서 튀어나왔다. 교정지로 사용하고 처박아 둔 종이도 산처럼 쌓였다. 그러니까 무리하지 말고 세 번이나 네 번쯤 나눠서 재활용 수거함에 갖다 두었더라면 좋았으련만. 한 번에 옮기자고 생각한 게 화근이었다.

일단은 한 손으로 들 수 있을 정도의 폐지를 노끈으로 묶었다. 사람 키만한 높이의 뭉치가 네 덩어리 나왔다. 그중 세 개를 카트에 실었다. 왼손으로는 카트를 밀고 오른손으로 하나를 들면 되겠지 싶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에 내려서 중앙현관 출입문을 통과하는 동안에도 별문제는 없었다. 한데 현관을 나가자 카트에 실린 덩어리들이 기우뚱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비스듬한 경사로를 거의 다 내려올 즈음 와르르 하고 종이뭉치들이 쓰러지면서 헐거워진 노끈이 풀려버렸다. 때마침 불어닥친 겨울바람은 종이뭉치를 사방팔방 흩어놓았다. 마치 <오즈의 마법사>에 등장하는 토네이도처럼.

나는 망연자실한 채로 펄럭펄럭 날아다니는 종이들을 바라보았다. 주위가 온통 하얗게 물들었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 말을 걸었다. “욕심을 부리면 이렇게 되는 법이죠.” 나는 멍하니 입을 벌린 상태로 돌아보았다. 이웃집 여자였다.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다. 외출했다가 막 돌아온 듯 잘 차려입은 모습이었다. 화장을 해서 그런지 지난번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가까이에서 보니 상당한 미인이었다. “뭐 하세요, 얼른 줍지 않으시고.” “아!” 그제야 나는 허둥지둥 종이를 주웠다. 고맙게도 여자는 그냥 지나치지 않고 도와주었다.

“일전에는 실례가 많았어요.” 벽에서 들린 소리는 내가 아니라 다른 집이 원인이었다고 한다. 종이뭉치를 들고 재활용 수거함까지 걸으며 우리는 작은 오해를 풀었다. 서로의 신상에 관해서도 조금쯤 알게 됐다. 여자의 이름은 나연, 대학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한다. 결혼한 지는 1년 됐고 남편은 펀드매니저라 늘 바쁘다. 나도 내 사정을 대충 이야기했다. 출판사를 운영하고 아파트를 사무실로 쓰고 있으며 추리소설 책을 만든다는 정도로. “어머, 저 추리소설 좋아하는데. 요즘 온다 리쿠를 읽고 있어요.” 그렇게 우리는 오며 가며 인사하는 사이가 되었다. 가끔은 책을 빌리거나 빌려주기도 했다. 이런 우호적인 관계는 나연씨가 어떤 부탁을 하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재활용 수거함 앞에서 다시 만나
오해 풀고 친해져

아파트 놀이터에 설치된 벤치에 앉아 있는 나연씨와 마주친 건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밤이었다. 이렇게 추운 날 놀이터에 앉아 있다니 이상하다 여기며 지나치려는데 누가 날 불러 세웠다. 돌아보니 아는 얼굴이었다. “어디 가시나 봐요?” “네, 잠깐 편의점에. 근데 여기서 뭐 하세요?” “그냥요.” “얼른 들어가시죠, 추운데. 저는 라면이나 하나 사서 끓여먹으려고요.” 밤바람에 낙엽 몇 장이 우수수 흩날렸다. 그녀는 나를 쳐다보며 잠시 머뭇거리더니 코가 꽉 막힌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괜찮으시면 저랑 술 한 잔 하실래요?” 그 순간 내가 떠올린 건 요 며칠 사이에 옆집에서 자주 들린 고성이었다. 부부싸움을 하는 듯했다. 신고를 해야 할 정도로 소란스러웠던 건 아니지만 걱정스러운 기분이 들던 터였다.

우리가 향한 곳은 근처에 새로 생긴 선술집이었다. 여기라면 메뉴 중에 라면이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과연 있었다. 라면과 튀김 몇 조각, 그리고 소주를 한 병 주문했다. 술이 나올 때까지 그녀는 별말을 하지 않았다. 가만히 빈 술잔만 바라보고 있었다. 가게 안에는 손님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주인 혼자 주방에서 안주를 만드느라 분주했다. 멀리서 소방차인지 구급차인지 사이렌이 질주하는 소리가 들렸다. 시간은 자정을 넘어가고 있었다. 나연씨가 입을 연 건 소주 한 병이 바닥을 드러낼 즈음이었다. 술이 약한지 금방 불콰해졌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하나 내가 고민하는 사이에 나연씨는 주인에게 한 병 더 주문했다. 그러고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신의 결혼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그이를 처음 만난 건 제가 근무하는 병원에서였어요. 환자로 입원했는데 인상도 좋고 말도 재미있게 잘해서 금방 친해졌죠.” 남자의 퇴원을 계기로 두 사람은 연인이 되었고 2개월을 사귄 끝에 결혼했다. 짧은 연애만큼이나 예식도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결혼 후 남자의 태도는 눈에 띄게 달라졌다. 아내에게 무심했고 외박이 잦았다. 그 무렵 남자 쪽에서 결혼을 서두른 이유가 시아버지 때문임을 알게 되었다. 노환으로 병원에 입원한 것이다. “시아버지 병수발을 도맡다시피 했어요. 남편 집에도 시어머니와 시누이가 있었지만 병원에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어요. 저는 병원에서 근무하랴 시아버지 간호하랴 정신이 없는데 시어머니란 사람은 이런 음식을 해오라느니 저런 음식을 해오라느니 하며 시시때때로 전화를 하더군요.”

고민 끝에 남편에게 시아버지를 노인 전문 요양원에 보내면 어떻겠냐고 말해 보았다. 그랬더니 남들 눈이 있지 그런 짓을 어떻게 하느냐고 역정을 내더란다. 결국 시아버지는 병원에서 쓸쓸히 숨을 거두었다. “임종도 저 혼자 지켰어요. 그 집안사람들 참 대단하더라고요. 그런데 시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에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가족들 몰래 사 둔 땅이 있다고. 얼굴 한 번 비치지 않은 가족들 말고 며느리에게 그 땅을 물려주겠다고. “저는 시아버지가 물려준 땅을 위자료 삼아 이혼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제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남편 쪽에서 이혼을 요구하더군요. 여자가 생겼다면서.” 결혼 전부터 사귀던 여자인 것 같았다고 한다. “남편에게 저는 간병 도우미였던 셈이죠. 애초에 그럴 목적으로 결혼했고. 시아버지가 저한테 남긴 땅도 정식으로 작성한 유언장에 명시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시어머니에게 상속됐어요.”

선술집에서 마주한 그녀
기구한 결혼생활···부탁해와

어느 일요일 아침, 처음 만났을 때 나연씨가 그렇게 날카로웠던 것도 이해가 간다. 아파트를 포함하여 남편의 모든 재산은 시댁 명의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받을 수 있는 위자료는 얼마 되지 않는 모양이다. 그마저도 주지 않으려는 남편의 치사함에 진저리가 나서 지난 며칠 동안 크게 다투었다. 하지만 되돌아온 건 사과가 아니라 폭언의 연타였다. “어쨌거나 더 이상 같이 살 수는 없어요. 이혼하려고요. 저도 늦기 전에 제 인생 찾아야죠. 다만 이렇게 호락호락 물러나고 싶진 않아요.” 분하다고, 복수하고 싶다고, 그녀는 말했다. 남편의 약점을 알고 있다고. “그래서 말인데,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겠어요. 보수는 충분히 드릴게요.”

아아, 이 무슨 하드보일드 소설 같은 전개란 말이냐. 비용을 받고 의뢰를 받아달라는 미인이라니. 내가 무슨 필립 말로(탐정소설 주인공)도 아닌 마당에 남편을 죽이기라도 해 달란 소린가. “아니, 그런 게 아니에요. 그렇게 무리한 부탁을 할 리가 없잖아요.” 한바탕 떠들고 났더니 기분이 풀렸는지 그녀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냥 저와 남편이 집 밖에 나가 있는 동안 남편 금고에서 뭐 하나만 훔쳐다 주시면 돼요. 비밀번호는 제가 알려드릴게요.” 나는 곧장 물어보았다. “뭔데요, 그게?” “그건… 승낙하면 말씀드릴게요.” 내가 어떻게 했을 것 같은가. 고민 끝에, 하기로 했다. 궁금했으니까. 그리고 마침내 궁금증을 풀었다. 결과적으로 잘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글을 마주한 형제자매님들은 어떠신지. 조금쯤 궁금해지셨을 것 같은데. 그렇다면 이사카 고타로의 <목 부러뜨리는 남자를 위한 협주곡>과 스티븐 킹의 <악몽을 파는 가게>를 함께 읽어주시길.

<북스피어> 대표, 일러스트 이민혜

※이 콩트는 필자가 독자들이 ‘읽어보고 싶다’는 기분이 들도록 다양한 소설을 색다르게 소개하는 방식인 ‘궁금증 유발적 소설 각색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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