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데요시가 가장 두려워하고 신임한 책사 구로다 간베에..처세의 기본은

2017. 12. 13.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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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다 간베에는 두 번씩이나 천하를 자신의 주군에게 바쳤다. 첫 번째는 오다 노부나가가 혼노지에서 죽으면서 정국이 혼란에 빠지자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천하를 안긴 것이고, 두 번째는 히데요시의 죽음 이후 세키가히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도와 에도 막부시대 개막에 큰 공을 세운 것이다. 구로다 간베에는 두 번에 걸친 천하대란에서 자신이 모시는 주군이 천하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책략과 여건을 마련한 시대의 명참모였다.

▶히데요시의 복심이자 예리한 바늘

2014년 국영방송 NHK는 일요일 오후 8시, 대하 사극을 편성했다. 드라마 제목은 <군사 간베에>. 주인공 구로다 간베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등 군사 참모였다. 그는 히데요시에게 천하를 경영할 수 있는 기회와 전략을 제공한 인물이며 동시에 자신이 모시는 주군에 대한 충성심 또한 확실한 인물이었다. 일본인들이 그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처세’에 있어서도 영민했기 때문이다.

16세기 간베에는, 지금의 국제 정세, 즉 미국과 중국이라는 G2의 세계 구도 속에서 이익과 번영을 지켜내면서 발언권을 잃지 않으려는 일본의 입장과 비슷한 처지에 있었다. 히데요시에서 이에야스로 권력이 넘어가는 혼란기에도 가문을 지킨 간베에의 처세학이 21세기를 살고 있는 일본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다.

약 1년 정도 방영된 드라마는 일본인에게 구로다 간베에라는 인물을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그는 일본에서 가장 추앙 받는 전국시대 최고의 전략가이자, 군사이며, 처세술의 달인이다. 일본 학자들은 ‘구로다 간베에가 두 번씩이나 천하를 자신의 주군에게 바쳤다’라고 평가한다. 첫 번째는 일본 전국시대를 통일한 오다 노부나가가 혼노지에서 가신 아케치 미츠히데의 배신으로 죽은 뒤 정국이 혼란에 빠지자 발 빠르게 움직여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천하를 안긴 것이고, 두 번째는 히데요시의 죽음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과 히데요시 가신 그룹 좌장인 이시다 미쓰나리가 이끄는 서군의 싸움, 즉 세키가히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도와 에도 막부시대 개막에 큰 공을 세운 것이다. 이처럼 구로다 간베에는 두 번에 걸친 천하대란에서 자신이 모시는 주군이 천하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책략과 여건을 마련한 시대의 명참모였다.

물론 두 번째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자신이 평정한 규슈를 헌납한 간베에의 결정에 대해 역사가들은 “간베에가 천하를 노리다가 상황이 여의치 않자 마치 이에야스를 위해 준비한 것처럼 규슈를 넘겨준 것은 막부의 숙청을 피하기 위한 고도의 처세술이다”라고 평가하지만 간베에의 존재감이 당시 일본의 권력추를 움직일 정도로 묵직했던 것은 사실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이어 제2대 에도 막부 쇼군이 된 이에야스의 아들 도쿠가와 히데다다는 “간베에는 일본의 장량이다”라고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고, 천하를 경영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자신의 부하였던 간베에에 대해 “이 세상에서 나를 가장 두렵게 하는 자는 구로다 간베에”라고 밝혔다. 그리고 “내가 죽은 뒤 천하를 노릴 수 있는 인물이 두 명 있다. 하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이고 또 하나는 바로 구로다 간베에이다”라고 말하며 그를 신임하면서도 경계했다.

구로다 간베에는 군사전략가로서의 능력도 훌륭하지만 무엇보다 그를 돋보이게 하는 것은 바로 능란하고 유연한 처세이다. 세 명의 주군을 모신 구로다 간베에. 이를 두고 사람들은 그에게 ‘배신자’라는 오명의 딱지를 붙였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가 먼저 배신한 사례는 없다. 오히려 그를 부리는 주군이 먼저 그를 배척했기에 그 역시 이에 따라 처신했던 것이다.

그는 ‘누군가를 섬기는 참모’로서 그 역량과 그릇이 차고 넘쳤다. 그렇기에 그를 부리는 이들 역시 그가 부담스럽고 두렵기까지 했던 것이다. 전국시대, 자고 나면 성의 깃발이 바뀌는 세상에서 그가 자신의 몸을 보존하고, 일가를 이루어 자신의 후손들이 막부시대 중요한 영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의 처세가 있었기 때문이다.

구로다 간베에 처세의 키워드는 한마디로 ‘꼼꼼한 준비’ 그리고 ‘대담한 포기’이다. 그는 히데요시가 고민할 때마다 해결책을 제시했다. 히데요시는 “내가 며칠을 고민해도 결론이 나지 않는 일조차 간베에는 해결책을 제시한다. 그런데 그 해결책이 내가 생각한 결론과 비슷하거나 더 뛰어나다. 그렇기에 나는 그가 두렵다”라고 토로할 정도였다. 간베에는 이 해결책을 제시하기 위해 정보, 전술, 군사 등 수많은 분야에서 꼼꼼하고도 완벽한 준비를 하는 인물이었다.

또한 그는 대담하고도 빠른 포기에도 능란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이시다 미쓰나리의 대결에서 간베에는 “이 싸움은 최소 몇 개월이 걸릴 것이다. 그리고 결국 도쿠가와가 이기겠지만 그 역시 막대한 상처를 입을 것이다. 그때 내가 천하 경영을 위해 군대를 움직이겠다”는 전략을 세웠다. 하지만 전투는 단 한 번에 이에야스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자 간베에는 자신이 온 힘을 다해 건설한 자신의 영지와 백성 그리고 군대 전부를 이에야스에게 고스란히 바쳤다. 아쉬움, 미련, 주저함 등 그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쉽지 않은 그의 이 같은 결정 덕에 간베에와 그의 가문은 오히려 더 번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히데요시를 선택하다

구로다 간베에는 1547년 히메지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 구로다 시케타카가 히메지에 정착하면서 고데라 가문에 임관, 지방 영주의 가신이 되었다. 고데라 가문의 당주 고데라 마사모토는 구로다 시케타카의 아들인 구로다 모토타카를 사위로 삼고 히메지 성의 성주 대리로 임명하며 고데라 성씨를 하사했다. 바로 구로다 모토타카가 구로다 간베에의 아버지이다. 그래서 기록은 구로다 간베에가 고데라 간베에로 불리기도 했다고 적었다.

간베에는 어려서부터 영민했다. 궁술, 기마술을 익혔고 특히 육도삼략 등 병법서에 흥미를 느꼈다고 한다. 하지만 간베에가 14세에 어머니를 잃은 상실감에 한때 와카, 엔카에 빠져 그의 스승에게 꾸중을 많이 들었다고 한다. “양육강식의 전국시대에 연약한 문학에 심취한 무사의 아들로서는 살아갈 수 없다”는 엄한 가르침을 받고 간베에는 다시 병법서와 무술 연마에 힘을 쏟았다. 그 결과 불과 20세의 나이에 히메지 성의 성주 대리로 임명되었다. 전쟁터에 잔뼈가 굵은 고데라 가문의 백전노장들은 간베에를 “젖비린내 나는 어린아이”라고 불렀지만 얼마 후 벌어진 전투에서 간베에는 그야말로 눈부신 전과를 올렸다.

구로다 간베에를 얕본 이웃 영주 아카마츠가 3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히메지 성으로 쳐들어왔다. 구로다 간베에는 불과 300명의 군사밖에 없었다. 하지만 간베에는 탁월한 전술로 무려 10배나 많은 아카마츠 군을 물리쳤다. 이 전투 이후 구로다 간베에는 자신을 얕보던 중신들로부터 신임을 받은 것은 물론 그 명성을 전국에 떨쳤다.

간베에는 무장이면서 지략이 뛰어났다. 특히 정세 분석에 탁월했다. 당시 일본은 전국시대로 모든 영주들은 격전지에서 하루를 보냈다. 일본의 전국시대는 1467년 오닌의 난부터 시작해 1573년 무로마치 막부의 제15대 쇼군 아사카가 요시아키가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교토에서 추방될 때까지, 혹은 1582년 아케치 미츠히데의 배신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혼노지의 변을 당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오다 노부나가의 후계자가 된 시기까지 약 120년간을 말한다. 한마디로 이 난세에 살아날 수 있는 것은 오직 무력과 지략뿐이었다.

구로다 간베에는 총과 칼이 직접 부딪치는 무력에서도 뛰어났지만 탁월한 지략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그는 곧 전국시대가 종식되고 강력한 무장의 1인 통치 시대가 열릴 것으로 전망했다. 그 주인공이 바로 오다 노부나가였다. 질풍노도의 리더십과 허를 찌르는 전술로 오다 노부나가는 강력한 영주들을 쓰러뜨리며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중소 영주들은 선택의 고민에 빠졌다. 즉 전국구 세력 오다 노부나가의 편을 들어야 할지, 아니면 자신의 지역구 패자의 편을 들어야 할지, 선택해야 했다. 이 선택은 그야말로 생사를 가르는 결정이었다.

구로다 간베에의 주군 고데라 가문도 예외는 아니었다. 고데라 가문이 위치한 주코쿠 지역은 대대로 모리 가문이 지역구 최강자였다. 고데라 가문 중신들은 “옆에 있는 강력한 모리 가문의 편을 들어야 우리가 살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간베에는 반대였다. 그는 “모리 가문의 당주 데루모토와 오다 가문의 노부나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모든 기량에서 노부나가는 천하의 주인이 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고데라 마사모토는 젊은 참모 간베에의 의견을 선택, 오다 노부나가에게 투항하며 충성을 맹세했다. 이 선택으로 고데라 마사모토는 영지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만큼 구로다 간베에는 사람을 파악하는 눈이 남들보다 한 수 위였다.

오다 노부나가의 천하 통일은 시간 문제였다. 그럴수록 영주들의 저항은 거셌다. 1578년 하리마의 영주 벳쇼 나가하루가 반란을 일으켰다. 그의 세력이 생각보다 강력했다. 영주들은 또 눈치를 보기 시작했고 고데라 마사모토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고데라는 벳쇼의 편에 섰다. 오다 노부나가는 이를 토벌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그 파견군의 대장이 바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였다.

전투는 오래 가지 않았다. 히데요시의 막강한 군사력 앞에 벳쇼와 고데라 연합군은 패배했다. 간베에는 이 전투에서 무엇보다 고데라 가문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 노력했다. 히데요시는 이를 눈여겨 보았다. 그리고 간베에의 충성심, 능력을 높이 평가하면서 그를 오다 가문에 투항시켰다. 간베에는 자신의 충언을 듣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의심한 고데라 가문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는 히데요시에게 투항했다. 히데요시는 간베에에게 “반역자 고데라 성을 버리고 원래 이름을 되찾아라”고 충고 했다. 이때부터 간베에는 고데라를 버리고 원래 이름인 구로다 간베에로 쓰기 시작했다. 구로다 간베에의 첫 번째 이직인 셈이다.

히데요시는 당시 일본 영주들 가운데서도 매우 특이한 존재였다. 원숭이를 닮은 히데요시를 노부나가는 “어이, 원숭이”라고 부르기도 했지만 노부나가는 히데요시를 매우 아꼈다. 미천한 신분 출신으로 노부나가의 말을 돌보던 히데요시는 번뜩이는 재치와 타고난 근면성, 주군의 심기를 파악하는 능력과 충성심으로 노부나가의 핵심 가신이 된 것이다. 히데요시는 항상 노부나가의 신발을 가슴에 품고 있다가 내놓았다고 한다. 덕분에 한겨울에도 오다 노부나가는 항상 따뜻한 신발을 신을 수 있었고 이런 세심함이 히데요시의 강점이었다. 오다 노부나가는 히데요시에게 50만 석의 토지를 관장하는 영주로 임명했다. 천민 출신 말고삐 잡이가 그야말로 벼락출세를 한 것이다.

참고로 당시 일본 영주들의 세력은 농사를 짓는 토지, 즉 석 단위로 평가했다. 대개 일가를 이루고 성 씨를 갖고 있는 영주들은 최소 1만 석 이상의 봉지를 갖고 있었다. 1만 석은 약 250명의 무사들을 먹일 수 있는 곡물을 생산했다. 전성기의 오다 노부나가가 직할지 400만 석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는 약 10만 명의 군대를 동원할 수 있었다. 노부나가의 부하인 히데요시는 50만 석을 보유해 1만2500명의 직할 부대를 지휘했다. 그리고 히데요시 역시 자신의 봉지 중에서 직계 가신들에게 봉지를 나누어주었는데 아마도 구로다 간베에는 약 1만 석 정도, 250명의 무사를 거느렸을 것으로 보인다.

▶준비된 정보, 전략을 구사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구로다 간베에를 무척 아껴, 간베에의 능력과 충성심을 항상 오다 노부나가에게 귀띔했다고 한다. 간베에가 오다 노부나가의 눈에 들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세력을 확장하던 노부나가에게 또 다시 내부 반란이 일어난 것이다.

이번에는 노부나가의 측근인 아라오키 무라시게였다. 그는 아라오카 성에서 농성했다. 노부나가는 고민했다. 천하 통일을 눈앞에 두고 무라시게를 징벌하기 위해 군대를 돌리는 것 자체를 참을 수가 없었다. 그때 구로다 간베에가 나섰다. 그는 “제가 아라오키 무라시게와 친교가 있습니다. 아라오키를 만나 창을 거두게 하겠습니다”라고 청했다. 간베에는 홀로 아라오카 성을 찾았다. 그리고 아라오키에게 오다 노부나가의 천하 통일의 당위성을 설명하고 투항을 권했다. 하지만 아라오키는 간베에를 지하 토굴에 가두어버렸다.

토굴에서 간베에는 그야말로 비참한 감옥생활을 했다. 먹을 것은 부족했고, 햇빛의 따뜻함을 단 한 번도 느낄 수가 없었다. 항상 습하고 어두운 토굴에서 무려 1년여를 갇혀있던 간베에는 피부병 등 온갖 병에 시달렸다. 더구나 간베에를 더 힘들게 한 것은 오다 노부나가의 의심이었다. 노부나가는 히데요시에게 “간베에가 아라오카 성에 간 지 1년이 넘었다. 설득을 하러 간 것이 아니고 본래부터 아라오키 무라시게와 내통한 간첩이 아닌가. 용서할 수 없다. 간베에의 아들을 잡아다가 목을 베어라”라고 명했다.

히데요시는 물론, 당시 오다 노부나가에게 신임을 받고 있던 또 한 명의 천재 참모 다케나카 한베에가 거의 애걸하다시피 간베에의 결백을 설득해 간베에의 아들 구로다 나가마사는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이 일로 간베에는 한베에를 은인으로 생각했고 두 가문은 친교를 유지했다.

1년 만에 구출된 간베에는 그야말로 겨우 숨만 쉴 수 있었다. 피부병으로 온몸의 피부가 썩었고 머리털도 다 빠져 이후 간베에는 두건을 쓰고 다녔다. 그중에서도 치명적인 것은 다리였다. 그는 한쪽 다리를 거의 쓰지 못해 걷기도 힘들 정도였다. 그때부터 간베에는 전쟁터에서도 말이 아닌 가마를 타고 지휘를 했다. 그나마 아라오키 무라시게가 간베에의 목숨만을 살려준 것은 원래부터 잘 아는 사이였고 무엇보다 두 사람 다 같은 천주교 신자였기 때문이었다.

히데요시는 다리를 쓰지 못하는 간베에를 여전히 신임했다. 그런 히데요시에게 간베에는 충성을 다했고 그의 번뜩이는 재치와 깊은 내공의 군사 전략은 히데요시를 오다 가문의 제2인자의 위치로 부상하게 했다. 간베에는 히데요시에게 자신의 거성인 하라미를 내주었다. 그리고 자신은 시키토의 작은 산성으로 옮겼다. 무사가 자신의 본성을 내준다는 것은 그야말로 무한한 충성심의 표현인 것이다.

이후 간베에는 토토리 성을 공격할 때는 기아 작전을, 모리 가문을 공격할 때는 모리 가문이 자랑하는 최고의 무장 시미즈 무네하루를 상대로 수공 작전을 제안했다. 여기서 간베에의 독특한 처세술이 나온다. 그는 히데요시에게 작전을 제안하면서 이를 히데요시가 제안한 것처럼 선전술을 병행했다. 무사들은 히데요시의 지시로 적과 성을 함락했다고 믿었고 이는 히데요시의 명성을 높이는 중요한 요인이었다. 히데요시는 이런 간베에의 처신을 매우 마음에 들어 했다.

그리고 드디어 히데요시, 간베에의 운명을 바꾸는 사건이 발생한다. 1582년 6월2일, 오다 노부나가는 천하통일의 마지막 퍼즐을 맞추기 위해 교토의 혼노사에 머물렀다. 당시 오다 노부나가의 최근접 경호부대는 아케치 미츠히데의 1만 군사였다. 오다는 수백 명의 경호병만을 거느리고 있었다. 아케치 미츠히데는 6월1일 오다의 호출을 받고 불려가 호되게 혼났다. “어이, 대머리 미츠히데, 그 따위로 일을 하면 너는 내일 날이 밝는 대로 목이 떨어질 줄 알아라.” 군영으로 돌아온 아케치 미츠히데는 분했다. 평상시 자신을 ‘대머리’라고 부르는 것도 불만인데 ‘내일 자신의 목을 치겠다’는 오다의 말이 마음에 걸린 것이다. 그는 ‘오다 노부나가를 죽이겠다’는 하지 않아야 할 결심을 한다. 평소 오다 노부나가의 언행은 거칠었다. 그것이 그의 리더십이었고 전쟁터를 누비는 무사들은 그의 이런 강한 리더십을 존경했지만 소심했던 미츠히데를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

6월2일 미츠히데의 군대는 혼노사를 습격해 오다 노부나가를 살해했다. 당대 최고 영웅 노부나가의 어이없는 죽음이었다. 노부나가의 부재는 일본을 다시 혼란으로 빠뜨렸다. 미츠히데는 노부나가를 대신할 힘도, 능력도 없는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판단하는 순간 혼란에 빠질 정도였다.

그 날, 히데요시와 간베에는 서쪽의 모리 가문을 공격하고 있었다. 모리는 서쪽의 대영주, 그에게는 시마즈 무네하루하는 용장이 있었고 그의 방어력은 상당했다. 양쪽은 대치 상태에서 서로 지쳐가고 있었고 물밑에서는 휴전 협상이 진행 중이었다. 6월3일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의 죽음을 보고 받았다. 교토에서 약 200km 떨어진 곳에 있던 히데요시가 제일 먼저 혼노지의 변 소식을 들은 것이다. 이는 평소 정보를 중시 여긴 히데요시와 간베에가 촘촘하게 정보망과 연락망을 구축해놓은 덕분이었다.

천하의 히데요시도 혼란에 빠졌다. 교토까지는 10일을 가야 하는 거리였고, 눈앞에는 강력한 모리 군대가 있었다. 히데요시는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이때 간베에가 조용히 히데요시를 찾았다. 그리고 “주군, 이제 천하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왔습니다. 움직여야 합니다”라고 간언했다. 정신을 차린 히데요시는 간베에의 계책대로 움직였다. 간베에는 먼저 모리 군대와 강화 협상을 체결했다. 그런데 여기서 간베에는 역으로 강화 협상의 조건을 히데요시에게 유리하게 구성했다. 그중 핵심은 모리 군의 중추인 시마즈 무네하루를 할복시키라는 것. 그러면 성안의 모든 군사와 백성을 살려주겠다는 명분이었다. 모리 가문은 이를 받아들였다. 시마즈 무네하루 역시 “자신의 희생으로 모리 가문의 멸문을 막을 수 있다면 죽겠다”고 자결하고 말았다.

히데요시와 간베에는 군대를 돌려 6월6일 교토로 향했다. 밤낮 없이 행군해 불과 6일 만에 교토에 도착한 히데요시는 정신을 차리지 못한 아케치 미츠히데를 단숨에 제압했다. 그리고 자신이 오다 노부나가의 후계자임을 천명했다. 오다의 복수를 하고 더구나 오다 노부나가의 아들을 모시고 온 히데요시에게는 후계자가 될 명분이 충분했다. 간베에는 여기서도 치밀한 각본을 만들었다. 오다 노부나가의 아들을 모시고 올 것, 단 선봉에 세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는 오다 노부나가의 아들을 보호하면서 공을 세울 기회를 봉쇄해 훗날 지분을 요구할 수 있는 근거를 없앤 것이다. 정보전으로 혼노지의 변을 제일 먼저 들은 히데요시에 비해, 모리는 히데요시가 떠난 뒤 오다 노부나가의 죽음을 들었다. 그는 분했다. 자신이 속았다고 판단하고 군대를 몰아 히데요시를 공격하려 했지만 가신들의 만류와 이미 세가 히데요시에게 기운 것을 알고 철군했다. 여기에도 일화가 있다. 간베에는 모리와 강화 협상을 하면서 군의 깃발 20여 개를 빌렸다. 그리고 미츠히데를 공격할 때 히데요시의 깃발과 함께 모리 군의 깃발을 전방에 세워, 미츠히데의 기를 꺾은 것이다.

혼노지의 변은 일본의 주인을 바꾸었다. 그리고 이는 정보전의 중요성, 기동력과 속도전의 효율성을 다시 한 번 알려준 사건이었다. 일순 천하의 주인이 된 히데요시는 간베에의 뛰어난 머리,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냉철함에 탄복했다. 그 자신도 혼돈에 빠진 상황에서 모든 일을 준비하고, 완벽하게 실행하는 간베에의 능력을 새삼 느낀 것이다. 그러면서 히데요시는 간베에를 신임하면서도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생겼다. 이는 간베에의 향후 행보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모든 것을 버리자, 더 큰 것이 온다

천하의 주인이 된 히데요시는 1583년 간베에를 종5위에 봉했다. 간베에 역시 모리, 우키타 공격의 최선봉에서 뛰어난 공을 세웠다. 히데요시는 쇼군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천민 출신이기에 그는 쇼군이 될 수 없고 대신 관직인 간빠구(지금의 총리대신)가 되어 일본을 통치했다. 히데요시는 부하들에 대한 논공행상을 실시했다. 무사들은 구로다 간베에가 중용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결과는 반대였다.

히데요시는 규슈 지역의 평정군 대장으로 구로다 간베에를 임명하면서 그를 부젠국 나카쓰의 12만5000석짜리 작은 영주로 보내버렸다. 규슈 지역은 일본의 최남단으로 수십 명의 영주들이 치열하게 세력 싸움을 하는 곳이었다. 즉 히데요시는 간베에에게 유일한 분쟁지역을 토벌하라는 명분으로 그를 중앙에서 변방으로 쫓아 보낸 것이다. 히데요시는 간베에를 중용하면서도 경계했다. 간베에는 군말 없이 히데요시의 말에 복종했다. 반항할 수 있는 힘도, 의지도 없었다. 그는 조용히 자신의 힘을 기르는 것이 사는 방법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규슈에 내려가서도 지역 평정에 큰 힘을 쏟지 않았다. 오히려 1589년 아들인 구로다 나가마사에게 당주의 자리를 물려주고 은퇴를 선언했다. 그때 간베에의 나이는 한창인 44세였다. 간베에의 은퇴는 의외였지만 그것은 간베에의 치밀한 계산이었다. 그 역시 히데요시가 자신을 경계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해서 규슈를 완벽하게 평정할 수 있었지만 자신의 실력이 조금은 모자란다는 듯, 혹은 규슈의 새로운 실력자로 부상해 히데요시의 경계심을 자극해 직접적인 공격을 받게 될 것을 미연에 방지한 것이다. 즉 죽기 않기 위해 은퇴를 선언한 것이다.

하지만 간베에는 완전한 은퇴생활을 할 수 없었다. 히데요시는 중요한 고비마다 그를 다시 불렀고 해결사 역할을 맡겼다. 간베에는 군말 없이 히데요시의 명령을 수행했다. 1592년 일본의 모든 영주들에게 소집령이 내려졌다. 히데요시가 조선 침략을 결정한 것이다. 구로다 간베에는 애초부터 이 전쟁에 반대했다. 그는 “이 전쟁은 무모한 짓이다”라고 말했지만 히데요시의 야심을 꺾을 수는 없었다. 간베에는 군감과 전략 기획 참모로 조선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간베에는 히데요시의 측근 가신그룹과 사사건건 마찰을 빚었다. 당시 조선 침공군의 총사령관은 20대의 젊은 우키다 히데이에였다. 히데요시는 우키다의 경력을 관리하기 위해 그를 보냈지만 실제 군대의 모든 지휘는 간베에의 조언을 받도록 했다.

애초부터 이 전쟁에 반대했던 간베에는 병을 핑계로 일본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히데요시는 간베에를 편하게 놔두지 않았다. 1593년 그는 다시 조선으로 출전했다. 히데요시에게는 조선의 전황을 파악하고 종합적인 대책을 마련할 수 있는 군사가 필요했다. 간베에가 적역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간베에는 히데요시의 최측근이자 실세인 이시다 미쓰나리와 타협하지 않았다. 간베에는 대담하게도 “하루빨리 조선에서 전군 철수를 하는 것이 이 전쟁에서의 희생을 줄이는 방법이다”고 주장했다. 간베에는 태업과 비협조의 중간의 태도를 취하다가 다시 일본으로 돌아왔다. 히데요시는 이시다 미쓰나리의 보고를 받고 분노했다. 간베에의 아들 나가마사에게 벌을 내리려 했고 간베에를 직접 처벌하려 했다. 하지만 간베에는 한 발 먼저 움직였다. ‘조스이겐’이란 법명을 받고 출가를 해버린 것이다. 당시 일본에서 영주가 출가를 한다는 것은 모든 권리, 의무 등 이른바 현실 정치와 권력에서 떠나겠다는 선언이었다. 모든 것을 먼저 버려버리는 간베에의 전략과 그의 둘째 아들이 전쟁에서 죽었기에 히데요시도 간베에를 처벌할 수는 없었다. 당시 기록에는 간베에가 항상 유서를 품고 다녔다고 한다. 그만큼 당시 히데요시와의 갈등은 깊었다.

1597년 정유재란이 벌어지자 간베에는 다시 돌아왔다. 이번에는 철수 작전을 지휘하는 일과 아들 나가마사가 전투에 소극적이라는 히데요시 가신그룹의 보고에 히데요시가 “나가마사는 비겁자이다”라고 분노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직접 문제를 해결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하지만 1598년 결국 히데요시가 죽었다. 일본은 다시 혼란에 빠졌다. 물론 히데요시는 자신의 사후를 대비했다. 말년에 아들 히데요리를 얻자 히데요리를 후계자로 결정한 것. 히데요시는 ‘오대로5大老’를 섭정으로 히데요리를 돕고, 이시다 미쓰나리가 최측근에서 히데요리를 보호하라고 유언을 남겼다. 오대로는 당대 최고의 세력가인 도쿠가와 이에야스, 우키다 히데이에, 마에다 도시이에, 우에스기 가게스케, 모리 데루모토였다. 하지만 권력의 추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기울고 있었다.

이시다 미쓰나리는 특히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이 늙은 너구리 같은 야망가를 그냥 두고서는 히데요시 가문이 편할 날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군대를 모았다. 이에야스 역시 천하의 주인이 되려는 야망을 숨기지 않았다.

세기의 결전이 벌어졌다. 세키가하라에 이에야스의 동군과 미쓰나리의 서군이 집결했다. 일본의 전 영주들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구로다 간베에는 이에야스를 선택했다. 그는 아들 나가마사에게 1만5000명의 전 병력을 주고 이에야스를 도우라 명령했다. 그리고 자신은 영지에 남아 군대를 모았다. 간베에는 그동안 모아둔 엄청난 재산을 몽땅 풀었다. 1만 명의 농민, 용병을 모았다. 그들을 훈련시키면서 자신의 영지 주변을 모두 평정하기 시작했다. 규슈의 영주들은 모두 세키가라하로 떠났기에 간베에는 규슈 공략은 그야말로 무주공산을 얻는 셈이었다. 간베에는 순식간에 규슈의 모든 나라를 점령하면서 군세를 키웠다.

모두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선 누가 승리하더라도 큰 희생을 치러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몇 개월 동안 전투가 계속되리라 예상했다. 간베에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이에야스는 폭풍처럼 세를 몰라 미쓰나리를 단숨에 격파했다. 그 전투에서 간베에의 아들 나가마사는 동군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새로운 일본의 주인이 탄생했다. 간베에는 판단했다. 그는 순식간에 자신이 평생을 모은 재산으로 군대를 조직해 평정한 규슈를 이에야스에게 바쳤다. 그리고 이 말을 덧붙였다.

“이에야스 공을 위해, 규슈를 미리 평정했습니다. 이를 모두 도쿠가와 가문에 바치겠습니다.”

이에야스 역시 간베에의 야심을 짐작했지만 오히려 구로다 나가마사의 공을 치하하며 그에게 후쿠오카의 52만3000석의 봉지를 하사했다. 간베에의 처세술이 이번에도 통한 것이다. 그는 규슈를 주고, 52만 석의 대영주가 되면서 가문의 번영을 보장받은 것이다.

간베에는 이후 은퇴했다. 그리고 쿄토에서 60세인 1604년 숨을 거두었다. 전국시대에 태어나 혼란의 시기를 거쳤지만 편안하게 다다미방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 처세학 | 충성은 드러내고 야심은 감추어라

히데요시 사후 구로다 간베에는 야심을 드러냈다. “나도 천하의 주인이 되겠다”고. 그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와 이시다가 서로 싸울 때 본거지인 규슈를 평정하고 세력을 확장하려 했다. 간베에는 “이 전쟁은 결국 도쿠가와가 승리하겠지만 그 역시 심각한 내상을 당할 것이다. 그때 내가 움직인다. 교토로 가 천황을 모시고 오카사를 점령해 히데요리를 보호하면 명분에서 이에야스를 넘을 수 있다. 설사 이에야스를 이기지 못하더라도 도쿠가와, 히데요리와 함께 천하를 삼분해 제3의 세력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간베에의 야심에 대한 증거는 많았다. 세키가라하 전투에 앞서 이시다 미스나리가 협력 사신을 보냈을 때 간베에는 “규슈의 7개국을 나에게 준다면 생각해 보겠다”고 답장을 보냈기 때문이다. 또 이에야스가 천하의 주인이 된 뒤 아들인 나가마사가 “제가 전투에 큰 공을 세웠습니다. 도쿠가와 공께서 제 오른손을 잡고 치하해 주었습니다”라고 자랑스럽게 말하자 간베에는 “그렇구나. 그럼 네 왼손은 그 순간에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고 질책했다는 일화가 있다. 즉 ‘그 순간 너는 도쿠가와를 제거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간베에는 평생을 품어온 이런 야심을 한순간에 버렸다. 빠른 처세로 세를 읽은 뒤 무모한 도전을 멈춘 것이다. 그리고 아들인 나가마사에게 모든 것을 물려주고 자신은 야인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간베에는 어린 아이들과 어울려 동심으로 놀았다고 한다. 이는 자신을 감시하는 도쿠가와의 눈을 속이는 동시에 “나는 이제 야심이 없다”는 뜻을 내비쳐, 에도 막부의 숙청 대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쉽지 않은 결정이지만 간베에는 주저하지 않았다. 다케다 한베에와 함께 히데요시의 ‘양병위 즉 양대 책사’로 불리며 히데요시에게 천하를 안겨주었던 간베에. 히데요시는 생전에 가신들과 “나 이외에 천하를 노릴 수 있는 자가 누가 같은가?”라는 토론을 했다. 가신들은 “이에야스와 마에다 도시이에”라고 답하자 히데요시는 “틀렸다. 그들은 내 사후의 인물들이다. 내 생전에 그런 야심과 능력을 갖춘 이는 간베에이다”라고 답했다. 가신들은 “간베에는 10만 석짜리 작은 영주인데 너무 높게 평가하는 것 아닙니까?”라고 재차 질문하자 히데요시는 “그래서 내가 10만 석만 준 것이다. 그에게 100만 석을 주는 순간 그는 나의 적수가 된다”고 간베에를 두려워했다.

또 오사카에 지진에 발생해 영주들이 히데요시의 안위를 걱정하며 몰려들었다. 히데요시는 흐뭇하게 영주들을 치하했지만 간베에에게는 차갑게 대했다. “너는 내가 죽지 않아서 실망했겠구나”라고 할 정도였다.

간베에가 이 같은 1인자의 시기, 질투, 경계, 두려움을 이겨낸 비결은 진심 어린 충성과 통 큰 버림이었다. 간베에의 처세는 대단히 능란했지만 그는 간신은 아니었다. 그는 히데요시가 가장 어려운 순간에 곁을 지켰다. 간베에는 충성을 이렇게 정의했다. “주군이 판단을 못하거나 그릇된 결정을 내릴 때 오히려 두려워하지 말고 곁을 지켜야 한다. 주군이 절벽에서 뛰어내릴 때 같이 뛰는 것은 맹종이다. 진짜 충성은 뛰어내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히데요시와 이에야스가 두려워했던 인물 구로다 간베에. 그의 처세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표리부동이 아닌 오히려 뚝심 있는 자세이다. 그는 뛰어난 2인자를 경계하는 1인자에게 두려움과 신뢰를 동시에 안긴 매우 흥미로운 인물이다. 그 비결은 야심은 감추고, 능력은 발휘하고 그리고 결정적인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결정적인 순간에도 무모한 과욕으로 대세를 그르치기보다는 가장 큰 실리를 선택하는 현실감이다.

[글 박기종(커리어코칭 칼럼니스트) 사진 픽사베이]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608호 (17.12.19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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