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탈모 보여주고 합격"..판사가 된 배우, 배우가 된 판사

문현경 2017. 12. 1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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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결문만 쓴다고 판사냐"···판사가 된 배우, 배우가 된 판사
사법부 최초 웹드라마 '로맨스 특별법'의 두 배우 류진(45)씨와 한웅희(34) 대전지법 판사를 9일 서울 서초동 서울고법에서 만났다. 최승식 기자
첫 대법원 기획 웹드라마 '로맨스 특별법'의 2화. 이동훈 부장판사(류진 역)는 소년부 재판에서 만난 비행청소년을 집으로 데려온다. 함께 살던 후배(김민규 역)가 "이런 일까지 해야 되느냐"며 투덜대자 이렇게 말했다. "판사가 가만히 앉아서 판결문만 쓴다고 판사인 줄 알아?" 이 부장판사는 그 뒤 사법시험을 준비 중인 후배에게 "너도 나중에 (판사가) 돼 보면 안다"고 덧붙였다.
지난 9일 서울고법에서 만난 '판사가 된 배우' 류진(45)씨와 '배우가 된 판사' 한웅희(34·사법연수원 40기) 판사는 모두 '판결문만 쓴다고 판사인 줄 알아?'를 이 드라마의 최고 명대사로 꼽았다. 지난달 9일로 6회 분량을 모두 '네이버 TV'에 오픈한 '로맨스 특별법'은 특히 젊은 층의 호응을 얻으며 지금까지 조회수 70만 회를 넘겼다.
극중 이동훈 부장판사는 따뜻하고 인간미 넘치는 판사로 그려진다. ['로맨스 특별법' 캡쳐]
한 판사는 극중 류씨의 대사에 대해 "현직에서 늘 고민하던 부분"이라면서 "판결문이라는 문서에만 함몰되다 보면 말에는 있는 감정 같은 것들과는 멀어져 버릴 수 있다. 각 문장들이 당사자의 마음 어디까지 닿을 수 있을지 판결문을 쓸 때마다 고민이다"고 말했다.
류씨는 "나중에 훌륭한 실무관이 된 비행청소년과 판사가 된 후배를 모아 처음 식사하던 그 장면이 제일 짠하다. 이동훈 부장판사라는 캐릭터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고 말했다. 류씨는 "판사라고 하면 차갑고 딱딱하고 객관적인 면만 있을 거라는 고정관념을 갖고 있었다"며 이날 인터뷰에 함께 온 둘째 아들 이야기를 곁들였다. "법원 안에 같이 들어가려니까 '아빠, 나 게임 많이 하는데 벌 받는거 아니야?' 라며 무서워하더라고요."
한 판사는 드라마에서 판사나 조정위원이 아닌 원고로 출연했다. [ '로맨스 특별법' 캡쳐]
한 판사는 극중에서 미용사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낸 원고 역을 맡았다. 미용실에서 머리를 잘못해 탈모가 더 도드라지게 됐고 소개팅도 망치게 됐다며 어떻게 할 것이냐고 따지는 역할이다. "다른 배역도 도전했었는데 감독님이 그 역할에 제가 마음에 드셨는지 감독님이 '진짜로 탈모가 있냐'고 하시더라고요. 제 정수리까지 보여 드리고 합격하게 됐어요."

한 판사는 사법시험보다 대형 기획사 오디션을 먼저 봤던 '랩퍼 판사'다. 싱글 앨범을 4개나 냈고 올해에도 경찰관 랩퍼 윤학석씨의 앨범에 피쳐링을 하는 등 음악활동은 계속 해오고 있지만 연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법원 직원을 대상으로 드라마 배역 오디션을 본다고 공람이 올라왔어요. 첨부된 문서를 샅샅이 보니 판사도 대상자에 포함이더라고요. 얼른 신청했죠."

류씨는 한 판사의 연기에 대해 “말을 하는 직업이어서 그런지 다른 일반인들이 연기하는 것과 달리 떨지도 않고 자연스럽게 잘 하더라. 그게 연기에 있어서는 최대의 강점이다. 법원에서 스트레스 받은 걸 연기로 푸는 것은 아닌가 하는 느낌도 받았다"며 웃었다. 한 판사는 "늘 주재자로 가운데 자리에만 앉았는데 원고 자리에 앉아보니 느낌이 달랐다. 이번 연기를 계기로 당사자 말을 더욱 열심히 들어주고 아픔을 어루만지는 판사가 되겠다고 다짐했던 초심을 떠올렸다"고 말했다.

■ "기존 법정 드라마와는 달라…사법부 가깝게 느끼는 계기 되길"

웹드라마 '로맨스 특별법'의 두 남자가 인터뷰를 마친 뒤 포즈를 취하고 있다. 최승식 기자
Q.'로맨스 특별법'이 기존 법정물과 다른 점은

한웅희 판사: 역대 판사 캐릭터로 나온 배우 중에서 잘생긴 판사가 나온 게 아닐까 싶다. 또 판사들이 실제로 현실세계에서 재벌도 구속하는 일 등을 하다 보니 드라마나 영화에서 권력 지향적인 인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은데, 이 드라마에는 그런 색채가 없다. 주말에 무협지도 보고 야근하며 괴로워하는 소탈하고 인간적인 모습으로 그려진다.

류진 배우: 판사는 감정적으로 움직일 수 없고 그래서는 안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판사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이 많이 안 나왔던 것 같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판사도 풍부한 감정을 갖고 고민하고, 그러면서도 본인의 감정과 다르게 판결을 내릴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막장드라마 같은 박진감은 없지만 실제와 비슷하면서도 잔잔하게 만들어져 공감대를 형성하기 좋은 내용이었다.

류씨는 극중에서 재판을 이끄는 형사합의부의 부장판사 역할을 맡았다. ['로맨스특별법' 캡쳐]
Q. 드라마를 찍으며 가장 어려웠던 점은.

류 배우: 극중 판결선고를 읽는 장면이 있었는데 A4용지 한 장 반 분량이었다. 제가 22년 연기생활하면서 받아 본 대사 중에 제일 길었다. 작가가 아니라 판사님이 쓰신 것이다 보니 진짜 판결문을 써 준 거다. 촬영 때 대본을 중간중간 볼 수 있다고 하더라도 배우 입장에서는 일단 다 외워야 한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그 부분을 달달 외우느라 애를 먹었다. 결국 촬영 전에 절반 넘게 쳐 냈는데 그러고 나니 앞뒤가 안맞는 것 같고 오해의 소지도 있을 것 같더라. 판사는 정말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싶었다.

한 판사: 현직에 있으면서 연기를 한다는 것이 부담되는 측면은 있다. 판결이라는 게 한쪽은 억울할 수밖에 없는 것인데 혹시 저에게 억울한 판결을 받은 분이 드라마에서 저를 보고 "저 판사는 왜 저기서 저러고 있지?"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같이 일하는 동료나 선후배들은 좋아한다. 저희 부장님은 "한 판사 연기하는거 5분부터 나온다"며 다른 판사님들에게 전파하고 다니실 정도다.

극중 아이를 홀로 키우다 분유를 훔친 '장발장' 피고인에 대한 국민참여재판 장면.['로맨스 특별법' 캡쳐]
Q.극중 국민참여재판 장면이 나오는데 소감과 관전평은.

류 배우: 시선처리를 가장 고민했다. 피고인·검사·배심원이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양 옆에 다른 판사들도 있는데, 재판장으로서 누군가와 눈을 마주친다는 것 자체로 객관성을 잃게 되는 것 같은 생각이 들더라. 또 마음속으로는 피고인이 불쌍해 무죄를 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법정에서 그걸 티내면 안되니 표정과 말이 불일치하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다.

한 판사: 국민참여재판에서는 시선이 배심원 수만큼 더 늘어난다. 그래서 더 어려운 부분도 있는데 진짜 부장판사처럼 잘 하시더라. 지금은 민사 합의부에서 근무하고 있지만 이전에 국민참여재판을 여러 건 맡았다. 배심원들과 이야기를 하다보면 '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네' 하는 부분이 많다. 기존 재판은 판사 3명과 변호사·검사 등 '법 공부 한 사람 5명'이 사건을 바라보는 거지 않나. 국민참여재판이 더 활성화 되면 좋겠다.

웹드라마 '로맨스특별법' 마지막회 장면. 배우 류진(왼쪽에서 두번째) 오른쪽이 '호통 판사'로 불리는 천종호 부장판사다. 그 오른쪽으로 배우 김민규·에이핑크 초롱(박초롱)·빅스 혁(한상혁)이 서 있다. ['로맨스특별법' 캡쳐]
Q. 드라마를 통해 바라는 점은.

한 판사: 법정에 오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법원을 무섭고 무겁게 느낀다. 증인으로만 와도 떨면서 긴장하는 분들이 많다. 이 드라마를 통해 그런 분위기를 조금은 따뜻하게 만들고 거리감도 좁힐 수 있었으면 좋겠다. 드라마 조회수가 더 올라가 시즌2가 나왔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있다.

류 배우: 일반적인 관공서처럼 될 수는 없지만, 사법부가 어느정도의 선을 지키면서도 사람들에게 좀 더 다가갈 수 있으면 좋겠다. 예전엔 분쟁을 법의 힘을 빌지 않고 해결하려고들 했찌만 요즘은 재판을 통해야 오히려 분쟁의 소지가 없다는 걸 많이들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 법원이 최대한 공정하게 판결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는 걸 알릴 수 있으면 좋겠다.

문현경 기자 moon.h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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