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지함은 벌레(蟲)가 되고, 의문은 반지성에 묻히다

이라영 예술사회학 연구자 입력 2017. 12. 10.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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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리스트에서 여성혐오까지 ①] 무지의 권력과 타자 혐오

[이라영 예술사회학 연구자]

 
일베 현상의 중요한 시사점 중 하나는 지성을 조롱하는 태도가 자연스러운 목소리로 넷상에 발화했다는 것이다. 비단 일베뿐만이 아니다. 지식인의 권위는 인터넷 혁명과 맞물려 급전직하했다. 대중문화 비평이 더는 권력을 지니지 못한다. 뉴스의 정보 독점력도 사라졌다. 이른바 전문가로 지칭되는 이들의 뉴스 코멘트에 대중이 어떤 태도를 지니는가는 인터넷 포털 댓글로 확인 가능하다. 

그런데, 지성에의 거부감이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 발달에 따라 커졌다고만 보기는 어렵다. 이들 신문명이 일종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고 평할 수는 있겠으나, 지성인을 향한 대중의 혐오는 오랜 연원을 가졌다는 평이 나오기 때문이다. 매카시즘 광풍 이후 미국의 당대를 정리한 리처드 호프스태터의 역작 <미국의 반지성주의>(유강은 옮김, 교유서가 펴냄)는 미국 사회가 일찌감치 지성에의 불편함을 지니고 있었음을 사회 다방면의 분야를 향한 스케치로 그려냈다. 이는 과거의 현상이 아니다. 지난 미국 대선이 지식 계층의 예상과 다른 결과를 낳자, 미국 출판계는 올 한해 이 현상을 조명키 위한 책을 쏟아냈다. <힐빌리의 노래>(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흐름출판 펴냄), <자기 땅의 이방인들>(앨리 러셀 혹실드 지음, 유강은 옮김, 이매진 펴냄) 등은 힐러리와 민주당으로 정체성을 대변하던 이들을 향한 대중의 거부감, 이른바 'PC함'에 관한 미국 대중의 피로의 연원을 나름의 방식으로 찾으려 한 책이다. 

과감히 '반지성주의'라는 용어를 차용하자면, 오늘날 한국에서도 이는 하나의 강고한 흐름이 되었음을 쉽게 짐작 가능하다. 민주당과 진보정당을 갈라 보길 거부하는 사회 태도, 이른바 '747 성장' 공약으로 대표된 이명박 전 대통령의 시대 착오적 공약에 열광한 대중, 약자 혐오를 정당화하려는 분위기는 어제오늘의 결과물이 아니다. 

특히 여성주의가 사회적 논쟁 대상으로 떠오른 지금, 여성을 향한 혐오는 미국의 그것과 같은 맥락에서 바라 볼 가능성을 제시한다. 현상의 근원에의 이해를 거부하는 대중의 시각은 피해의식과 맞물려 강고한 흐름을 만들었다. 이는 여성집단의 대대적 반발로 더 커지면서 소셜 미디어를 막말의 전쟁터로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오랜 기간 문화 현상을 관찰했고, 여러 매체에 관련 글을 쓴 이라영 예술사회학 연구자로부터 받은 한국의 반지성주의에 관한 글을 나눠 싣는다. 필자는 글에서 한국의 반지성주의를 낳은 중요한 요인의 하나로 식민지 남성성을 꼽는다. 이를 바탕으로 약자의 상황을 애써 모르려 하는 태도가 집단 반지성주의로 현현했다고 그는 진단한다. 필자는 우리 문화의 반지성주의를 드러내는 현상으로 박근혜 정부 당시 행해진 블랙리스트 사태, 이명박 정부 시절 큰 반향을 낳은 나꼼수 현상, 그리고 최근 우리 사회를 달구는 반여성주의 현상에 관해 세밀한 의견을 글로 정리했다. 편집자. 

▲ 대중의 진지한 이를 향한 반감은 '씹선비'라는 상징어로 나타났다. ⓒ인터넷 자료 사진

들어가며 : 진지충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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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는 벌레들의 시대. 죄 없는 벌레들에게 미안하다. 온갖 '충'이 득실거린다. 이중에 '진지충'은 다른 충들과 조금 다른 위치에 있다. 많은 충이 그들의 위치와 역할, 정체성, 출신성분 등에 기반한 혐오대상이라면 진지충은 지역, 성별을 떠나 태도로 인해 혐오 받는다. 개그를 다큐로 받는다. '쓸데 없이' 진지한 사람에게 흔히 하는 말이다. 실패한 개그를 돌아보기보다는 왜 웃자고 한 소리에 죽자고 달려드느냐며 되려 화낸다. 유머를 생산하는 행위도 일종의 권력행위다. 유머에 대한 반응이 진지하다면, 이는 어느 정도 권력에 대한 도전이 된다. 지루한 '부장님 개그'에도 직원들이 웃음으로 반응을 보이는 이유다.

진짜 눈치가 없어서 맥락 파악을 못하는 사람이 왜 없겠느냐만, 오늘날 '벌레'가 되어버린 진지함은 이러한 범주에서 벗어난 지 오래다. 생각하고 의문을 제기하는 태도 자체가 조롱 받는다. 진지충을 조금 순화해 '진지병'이라 부르기도 한다. '선비질', 더 상스럽게 말하면 '씹선비'라고도 한다. 여기서 선비란 단지 구시대적 사고를 가진 사람을 이르기도 하지만, 정확히는 실용과는 거리가 먼 학식으로 젠체하며 고고한 척 하는 사람을 뜻한다. 진지충 비난 현상이 과도해지자, 소수자와 약자를 볼모로 한 창작이나 저항 방식을 비판하는 태도를 엄숙주의자, 도덕주의자, 나아가 위선자 등으로 낙인 찍는 상황으로 번져나간다. 진지함이 부정될 때 유머의 질도 하락하기 마련이다. 비판적 성찰 없이 타인의 수치심을 재료 삼은 유머(라는 이름의 차별 발언)에 익숙해진다. 진지함을 낙인 찍는 언어의 증가는 생각하는 사람을 향한 조롱과 경멸이 점점 만연해가고 있음을 방증한다.

'충'이라 불리는 혐오 대상이 범람하는 한국 사회가 비인간으로서 추방해야 할 타자를 확산하는 셈이다. 오늘의 인간도 내일이면 새로운 '충'이 되어 혐오 받을 수 있다. 이 사회의 '충'은 어쩌면 사회의 내부와 외부를 보여줄 수 있는 경계인일 지도 모른다. "충은 몸 안팎을 수시로 들락거리고, 소변 대변 역시 몸 안에 있지만 늘 바깥으로 나올 준비가 되어 있다. 요컨대 이 타자들은 안과 밖, 그 사이 혹은 경계에 존재한다. 한 사회의 건강성은 내부자가 아니라, 주변인 혹은 경계에 있는 존재들에 의해 표현된다."(<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고미숙 지음, 북드라망 펴냄) '진지충'이라는 언어는 이 사회 지성이 처한 경계인의 위치를 보여준다.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여 생각하는 일은 피곤하고, 독설, 조롱 혹은 감정에 극도로 호소하는 신파가 더 쉽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생각의 범위뿐 아니라 감정의 영역도 협소해진다. 감정에 호소하는 사회일수록 오히려 감정은 풍요롭지 못하다. 감정의 정답을 만들기 때문이다.

2
장-뤽 고다르의 SF영화 <알파빌>은 감정이 통제된 미래사회를 다룬다. 감정을 억압하는 알파빌이란 도시는 시를 읽거나 인간의 감정을 움직이는 책을 금한다. 이 도시에서는 하루에도 수 건의 사형이 집행되는데 죄목이 기가 막히다. 눈물을 보였기 때문이다. 알파빌에서 눈물이란 존재할 수 없다. 눈물은 감정과 생각에 따른 몸의 반응이기 때문이다.

알파빌 시민은 명령 받은 것을 수행해야 하는 의무만 있을 뿐 '왜'라는 질문도 해서는 안 된다. 이 도시에서는 계속해서 새로운 사전이 개편되어 나온다. 사전 속 단어는 날마다 줄어든다. 질문을 통제하는 사회에서 언어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 예술가란 존재할 수 없다. 예술가와 지식인은 대안을 찾거나 해답을 내놓는 역할을 하기보다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이다. 의구심을 갖는 사람. 이런 종류의 인간은 사회 통제에 거추장스러운 방해물이다. 질문은 요동치는 감정과 이에 관한 생각 속에서 정리되어 나온다. 주인공 레미(에디 콘스탄틴)는 폴 엘뤼아르의 작품 <고통의 수도 (La capitale de la douleur)>를 바탕으로 인간의 고통과 두려움, 사랑의 감정을 찾아간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모르는 나타샤(안나 카리나)는 사랑의 감정을 알지 못하며, '왜'라는 단어를 모르기에 이유를 캐묻는 것을 어색해한다. 그러나 그는 결국 엘뤼아르의 시집을 읽으며 '눈물'을 경험한다. 나아가 사랑에 빠진다. 고통과 수치심을 알려고 할 때 인간은 '나' 이외에 타자와 타자와의 관계를 알아가게 된다.

프랑수아 트뤼포는 <알파빌> 개봉 1년 후인 1966년에 레이 브래드버리(Ray Bradbury, 1920~2012)의 소설 <화씨 451 (Fahrenheit 451)>을 영화화했다. 1953년 작인 SF 고전 <화씨 451>은 책이 금지된 미래 사회를 보여준다. 원작보다 트뤼포의 각색이 더 폭넓게 화두를 던진다. 매스미디어에 중독된 사회를 비판하는 '책'을 영화화 하면서, 트뤼포는 불태우는 책에 화집이나 <카이에 뒤 시네마> 같은 영화비평 잡지도 포함시켜 전반적으로 창작과 비평을 억제하는 사회를 그린다. 알파빌이 감정을 억제하는 도시였다면, <화씨 451>의 미래 사회는 인간의 생각을 금지한다. 주인공 몬태그는 책을 불태우는 임무를 맡은 방화수다. '파이어맨(fireman)'이라 불리지만 불을 끄는 소방수가 아니라 불을 지르는 방화수다. 몬태그가 사는 사회에서 책은 쓸모 없을 뿐만 아니라, 인간과 사회를 오히려 위험하게 만드는 물건이다. 읽고 생각하는 활동이란 속도와 실용 중심의 사회에서 그 의미를 잃는다. 책을 읽으면 질문이 많아지고 의구심을 품기 때문이다. 대신 사람들은 벽면 TV를 보며 귀에 늘 무언가를 꽂고 즐긴다. 책을 태운다는 것은 곧 생각의 금지, 표현의 말살이다. 영화의 마지막은 원작과 조금 다르다. 책이 금지된 사회에서 모두 책을 통째로 외운 '북 피플'은 그들만의 마을을 만들었다. 스스로 사무엘 베게트의 <고도를 기다리며>가 되고,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이 되어 돌아다니는 책-인간이 되었다. 책을 금지한 사회에서 스스로 '책이 되기'란 몸에 생각을 새기는 적극적인 저항이다.

감정사회학자인 잭 바바렛에 따르면,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감정을 표현하는 어휘는 실제로 줄었다고 한다. 통념적으로 이성과 감성을 구분해도 하나의 시어가 이성이나 감성이라는 어느 한 쪽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듯이, 인간의 다양한 감정과 사유하는 능력은 별개가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있다. 앞서 두 영화에 소개된 감정을 억제하는 도시와 생각을 금지하는 도시는 공통적으로 책을 금지한다. 여기서 책은 언어를 규제하기 위한 하나의 상징이다. 인간이 갖는 감정과 스스로 생각하는 행위를 모두 통제하려면 언어규제는 기본이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이야기를 직조하며 생각을 정리하고 확장하면서 타인과 공유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픽션 속 극단적 사회처럼 책을 금지하기는커녕, 자유롭게 책을 즐길 수 있게끔 한다. 온 사방에 책이 널렸다. 종이책과 전자책뿐 아니라 듣는 책도 풍성하다. 그럼에도 통제를 통한 우민화 정책은 주기적으로 등장한다. 헤르베르트 마르쿠제의 '1차원적 인간' 개념은 '기만적 자유'에 관한 의문을 증폭시키기에 여전히 오늘날의 사회현상을 분석하는데 유용하다. 마르쿠제에 따르면 "1차원적 사유는 정치제조자와 정보 조달업자에 의해 체계적으로 조장된다."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여가와 놀이가 일상에 들어왔지만, 소비로 비판 욕구를 없애버리는 체제가 1차원적 인간을 양성한다. 느리게 흘러가는 '사유의 습관'이 점차 낯설어진다.

매카시즘이 지나간 뒤 1963년 출간된 리처드 호프스태터의 <미국의 반지성주의>는 기업 사회, 복음주의 종교, 실용주의 사상, 평등주의 정신 등을 들어 지성에 적의를 가진 사회를 분석했다. 미국에서 지식인을 비하하는 '고수머리 지식인'이나 '계란머리'라는 말이 있었듯이 한국에도 여전히 '먹물', '책상물림'처럼 지식인을 조롱하는 정서가 팽배하다. 비단 한국만의 특징은 아니다. 지식인 조롱과 비난은 언제나,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다. 1965년 장-폴 사르트르는 일본에서 '지식인'에 관한 강연을 했고 1972년 이 강연 내용을 정리해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지식인을 위한 변명(Plaidoyer Pour Les Intellectuels)>이라는 제목의 책을 냈다. 그는 "어느 나라에서고 지식인 비난이 동일하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라는 말로 시작한다. 오늘날 이 말이 더는 충격적이지 않다. '지식인'이라는 언어의 기원이 드레퓌스 사건임을 고려할 때, 지식인의 실체와는 별개로 '지식인'이라는 호명은 그 태생부터 대중과 권력 양쪽에서 조롱과 비난을 받는 운명이다. 이는 지식인의 책임이기도 하다. 대중을 계몽의 대상으로 여기거나, 지적으로 게으르고 당파성에 붙잡힌 지식인은 지식을 도구로 사회를 해롭게 한다.

지식인과 지성에 관한 거부는 이처럼 도덕적으로 부패하고 지적으로 게으른 지식인을 비판하는 차원에만 한정되진 않는다. 문화예술계 탄압을 위해 제도적으로 광범위하게 조직된 박근혜 정부의 '블랙리스트' 사건에서 일상 속 진지함을 향한 경멸까지, 생각과 표현의 삭제는 늘 벌어져왔으며 여전히 우리의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진지함은 속 좁음, 과감하지 못함, 이해력 부족, 유머 없음, 사회성 부족, 옹졸함, 찌질함, 과격한 도덕주의자의 성질로 받아들여진다. 심지어는 '정치적 올바름(PC)'이 인간의 본성을 억압하는 파시즘이라는 주장까지 나올 정도로 '불편한' 문제제기를 불편해 하는 정서가 만연하다.

'느낌적 느낌'이라는 조어가 유행하듯, 지금은 느낌의 시대다. '사이다' 언어가 각광받고 촉을 향한 신뢰가 성장했다. 진지함이 조롱 받을수록 생각하는 인간은 우스꽝스러워진다. 표현의 자유, 취향을 방패 삼아 '생각하지 않음'을 정당화하는 태도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자유와 지성은 적대적이거나 양립 불가능한 관계가 아니라 오히려 동반자 관계다. 자유를 빌미로 지성을 과감히 공략하는 방식을 우리는 '진지하게' 성찰할 필요가 있다. 진지한 이를 '충'으로 업신여기기 보다, 진지함의 회복으로 지성의 복원, 상상력의 확장을 추구해야 한다.

▲ 영화 <화씨 451>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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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성을 어떻게 정의 내려야 할까. 과연 한국 사회에 반지성주의가 실제로 존재하는가. 높은 교육열은 말할 것도 없으며, 인문학 열풍이라는 말이 잊을 만 하면 튀어 나오고 온갖 종류의 인문학 강의와 책이 팔리는 사회에서 지성은 오히려 넘쳐나고 있지 않을까. 반지성주의(Anti-intellectualism)란 단지 무지나 무식한 상태를 뜻하는 말이 아니다. 반지성적 면모를 보이는 사람 중에는 지식이 부족하기는커녕 오히려 지식이 풍성한 사람도 있다. 예를 들어 '어용지식인'이 되겠다고 선언한 인물은 지식이 없을까. 그렇지 않다. 오히려 지식을 탐독하는 적극적인 지식유통업자다. <화씨 451>에서 책을 불태우는데 앞장서는 방화서의 서장 비티는 결코 무식하지 않다. 명문을 술술 외운다. 19세기까지 인류가 과학과 성경을 바탕으로 흑인과 여성 일반을 열등한 존재로 만들었다면, 오늘날은 페미니스트와 성소수자에게 그 화살을 겨냥한다. 적어도 무늬는 논리적으로, 이론적으로, 과학적으로 갖추고 나름 '합리적인 혐오'를 정당화하려고 한다. 편향적 사상을 아이들에게 주입한다는 명목으로 페미니스트 교사를 공격하거나, 나무위키 사용자가 '젠더 이퀄리즘'이라는 날조된 문서를 만들어 기존 페미니즘을 왜곡하는 선동을 펼치는 태도가 이에 해당한다.

차별이나 혐오는 '지능의 문제'라고 농담처럼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어설프게 아는 사람이 가지는 확신의 힘은 대단하다. 하지만 사람이 적극적으로 차별에 가담하는 이유는 지능이 낮거나 무지해서가 아니다. 지적 능력과 타인의 고통에 관한 서사적 상상력은 별개다. 혐오와 차별에 앞장서는 이들은 자신의 믿음을 위해 열정적으로 지식을 활용한다. 자신을 바꾸는 성찰과 반성을 거부한다. 오늘날 하나의 교리인 '자존감을 높이라'는 구호는 이러한 태도를 더욱 부추긴다. 체제에 저항할 줄 모르는 나르시스트 인간됨을 권장한다. 성찰하는 의식을 가진 사람을 자존감이 부족한 사람으로 낙인 찍는 굴절된 상황이 펼쳐진다.

반지성주의는 '알기를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상태'다. 모르기 위해 애를 쓴다. 오늘날 남성이 역차별을 받는다거나, 귀족노조 때문에 기업이 힘들다거나, 종북이 나라를 망치고 있다거나, 동성애 때문에 에이즈가 창궐한다는 믿음이 바로 그렇다. 기득권 유지를 위해 자신이 알고 싶지 않은 문제를 적극적으로 모르려고 하며, 시대에 맞는 새로운 '마녀'를 계속 만들어내어 '인간' 사회에서 몰아낸다.

미국의 반지성주의에 귀족이라는 계층과 문명이라는 전통을 상징하는 유럽을 향한 반감과 동경을 포함한 정서가 깔려있었다면, 한국의 반지성주의는 서구를 향한 반감과 동경이 뒤섞인 감정을 포함한다. 이 감정을 구성하는 요소 중 식민지 남성성은 한국을 배회하는 반지성주의의 중요한 구성요건이다. 식민지 남성성이란, 식민지배국과의 관계에서 약자나 피해자가 된 남성이 자국 여성과 소수자를 억압하여 남성성을 복원하고 유지하려는 의식이다. 서구와 일본에 의해 '상처받은 피해자'가 된 이들은 서사를 장악하고, 기존 약자나 소수자의 새로운 움직임을 역차별이나 특권으로 받아들인다.

4
한국의 보수 우파가 '잃어버린 10년'이라 부르는 김대중과 노무현이 집권한 '진보' 시대는 이명박의 당선으로 일시적으로 막을 내렸다. 이명박 정부가 시작된 지 채 1년 반도 지나지 않은 2009년 5월 노무현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우리 사회의 정치 지형과 유권자의 감정, 지식인의 정치적 태도 등을 뒤흔든 강력한 사건이다. 뒤이어 박근혜의 보수 정치가 이어지면서 사회 각 분야에서 벌어진 퇴행은 말할 것도 없는데, 이에 관한 반작용으로 정치 팬덤화도 깊어졌다. 다행스럽게 박근혜는 탄핵으로 집권기간을 다 채우지 못했고, 9년만에 보수의 집권은 일시적으로 퇴장했다. 그러나 두 보수 정부 기간 종합편성채널이 만들어졌고, 언론탄압이 자행되어 공영방송의 위상이 무너졌으며, 교과서 국정화가 시도되고, 위안부 합의를 비롯한 각종 외교 문제와 남북 관계, 교육, 문화는 회복을 필요로 하는 상태로 망가져버렸다. 이 망가진 상태는 정상화와 상식에의 갈망을 낳았고, 모든 정상화는 결국 정권교체로만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이 강해졌다. 그러나, 정권교체 이후는 어떠한가. 문재인 정부가 등용하는 인물들은 현재 우리 사회의 어떤 징후를 드러낸다. 문재인은 유사역사학을 신봉한다는 의혹이 있는 도종환 시인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으로 뽑았다. 황우석과 연루된 박기영을 과학기술혁신본부장으로, 진화론을 부정하는 창조과학회에서 활동한 이력이 있는 박성진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으로 임명 시도했다.
 
한편 2000년대 후반부터 '인문학 시장'에서 힐링과 공감, 소통이라는 개념이 대중에게 손 내밀었다. 모르는 세계를 알려 하기보다 이미 아는 것을 인정받고 공감 받으려는 정서가 더 두터워지고 있다. 쉬운 언어가 좋은 언어와 동일시되며, 비판적 지성은 대중과 유리된 잘난 척이나 쓸모 없는 이상주의로 전락했다. 그렇게 사유의 종말을 재촉한다. 또한 대중매체를 통해 지식정보를 접하면서 대중은 정보 '소비자', 곧 '고객이 왕'이라는 태도로 지식을 대하기도 한다. 지식과 정보의 수용 방식은 읽기에서 듣기로, 언론 매체에서 소셜 미디어로 범위가 넓어졌다. 이러한 현상은 매체의 다양성이라는 긍정적 측면에도 불구하고, 정보 선택의 편향성을 키우고 행간을 오가며 생각하는 적극적인 태도로부터 대중을 멀어지게끔 하는 면도 있다. 정보의 꼴라주 속에서 가짜와 진짜는 분별이 어렵게 뒤섞여있다.

이름 있는 남성들이 모여 잡학을 과시하는 텔레비전 방송을 비롯해 팟캐스트, 소셜 미디어를 통한 지식정보 전달 체계는 수용자에게 감각적으로 다가간다. 정치와 지성의 예능화는 긍정적 의미의 대중화라기보다 유명인에 의지하는 데 그친다. 유명인이 곧 지식인인 시대다. 유명인의 매력 자원은 수용자의 열정적 지지를 끌어낸다. 글보다는 사람의 매력자원을 드러내기 쉬운 말에 익숙해지고 점점 '쉽고 재미있게'가 중요해진다. 이러한 형식의 변화는 수용자가 사안보다 사람을 중심으로 편을 나누게끔 한다. (내가 지지하는) 사람 중심으로 사안을 파악하려다 보니, 지지자는 때로 적극적으로 (내가 지지하는 사람에게 불리한) 사실을 모르려고 애쓰기도 한다. 이러한 지성의 게으름에는 언론의 영향도 크다. 신문과 방송, 라디오 등에서 모든 분야에 말을 얹는 지식인, 방송에서 노골적으로 사실을 부정하는 정치인, 음모론과 사실이 뒤섞인 자극적인 내용을 재미있게 양산하는 언론인이 대중에게 수시로 노출되고 있다. 지구온난화를 믿지 않는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처럼 홍준표는 4대강 사업으로 인한 수질 오염과 강의 지형 변화를 부정했다.

한국의 반지성주의를 논하기 위해 필자는 한국 사회의 수많은 현상 중에서도 블랙리스트, 나꼼수 현상, 메갈리아를 열쇳말로 한다. 이 현상들은 각각 한국의 보수 우파, 중도 우파, 진보 좌파 진영에서 공통적으로 흐르는 '알기를 거부하는' 어떤 상태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당파와 세대, 계층을 떠나 모두가 손을 잡고 알기를 거부하는 어떤 문제가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바다에서 헤엄치고 있다. 보수 우파가 물러나고 진보가 정권을 잡든, '먹물'이나 '꿘'이라는 이른바 '구좌파'를 놀리며 '잡놈'이라는 새로운 좌파가 자리잡든, 공통적으로 알기를 거부하는 문제가 있다.

이라영 예술사회학 연구자 (eday@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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