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따라민국

최보윤 기자 2017. 12. 8.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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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너도 샀니? 나도 샀다!".. 올겨울 롱패딩으로 더 강력해진 '유행 쏠림'
'인증'으로 '인정' 받는 시대.. "남들 다 있는데 나만 없어" 좌절감 더 키워
'관심 조절 장애' 걸린 한국
남에 대한 지나친 관심 '비교'라는 부작용 낳아
"너는 안 해봤니?"란 질문 관계를 해치는 毒으로
소속감이냐, 無개성이냐
유행 안 따르면 불안 커져 남들과 비슷한 것 찾지만
한편으론 개성 잃을까 우려 아슬아슬한 줄타기 반복
따라민국, 장점도 있다
비슷비슷한 제품 뛰어넘는 '대박' 제품 나오는 원동력
1000만 영화·완판 물건 등 침체된 시장에 활기 안겨

"뭔가 뜬다 싶으면 재빨리 클릭부터 해요. 반은 성취감이고 반은 불안감 때문 같아요. 남들 다 하는 거에 나만 못 끼면 시대에 뒤처지는 것 같고, 또 어렵게 구하면 신나기도 하고. '나는 해봤는데' 하며 의기양양해져요."(직장인 신혜정씨)

"롱패딩 입은 거 보고 펭귄 같다느니 김밥이라느니, 누구는 또 걸어 다니는 미쉐린 타이어라고 부르던데요. 자기네들은 못 구하니까 부러워서 그런 거 아닌가요? 왜 이렇게 남들이 뭐 하는 것에 관심이 많은 거예요?"(고등학생 김유현군)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유행은 곧 광풍이다. 입는 것, 먹는 것, 노는 곳 어떤 분야든 각자의 유행은 있을 수 있지만 요즘엔 '유행'이라는 꼬리표가 달리기도 전에 너도나도 따라 하는 모습이다. 특히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같은 '소셜 미디어 인증'이 곁들여지면서 'LTE급'을 넘어 '5G 광속 통신급'으로 떴다 지고 있다. '한정판' 이미지까지 더해지면 반응은 더 뜨겁다. '평창 롱패딩'은 이 모든 것이 버무려진 결과.

모방은 인간의 본능.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속담부터 최근 화제가 됐던 '레밍 효과'(무분별하게 동조하는 쏠림 현상) 등 '따라 하는' 현상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해외에선 친구가 가진 것을 부러워한다는 '프렌비(frienvy·friend+envy)'가 새로운 용어로 등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에선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다. 여기 한 번 우르르, 저기 한 번 우르르. 쏠리고 몰린다. 제품도, 음식점도, 여행지도 일단은 휩쓸고 지나가야 한다. 이러다 보니 최근 등장한 자조적인 표현. 바로 '따라민국'이다.

요즘 유행인 ‘나만 없어 OOO’문구를 써넣은 티셔츠. ‘나만 고양이 없어’ ‘나만 돈 없어’ 등의 문구가 인기다./인터넷 쇼핑사이트

재밌는 건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는 것. 유행이란 광풍은 '참견병'이라는 후폭풍을 낳는다. 최근 온라인상에서 크게 인기를 얻고 있는 이 문구를 한번 보자. '롱패딩 입는 사람: 정상, 안 입는 사람: 정상, 입는다고 뭐라 하는 사람: 비정상, 안 입는다고 뭐라 하는 사람: 비정상.'

'롱패딩' 대신 다른 화제성 이슈를 집어넣어도 수월하게 문장이 완성된다. '토를 달아야' 직성이 풀리는 일상. 소셜 미디어나 댓글 등을 통해 쉽게 내는 목소리가 오지랖이나 참견으로 변질되는 걸 꼬집는 것이다. 화제가 되면 될수록 옆 사람과 비교하는 일이 잦아지면서 지나친 관심을 경계하는 목소리도 높아졌다. 2017년 대한민국의 현주소다.

‘인정 욕구’ 부르는 ‘나만 없어’ 신드롬

“평소에 뭐 사달라고 조르지 않던 아이인데 이번엔 유독 심하더라고요. 자기만 없으니 왕따 되는 것 같다고….” 직장인 유현정(44)씨는 얼마 전 중학생 아들한테서 못 보던 모습을 봤다. 평소 화 한번 안 내고 뭐든지 잘 따르던 성격이었는데 각종 뉴스 때문인지 롱패딩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저희 때도 일종의 ‘교복’이 있었죠. 영화 건축학개론에서 ‘납뜩이’ 스타일이 인기였다가 김희선 머리띠도 따라 해보고 ‘떡볶이 코트’도 많이 입었고. 그래도 이렇게 전국적으로 광풍이 불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최근 한국에 새로운 증후군이 떠오르고 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 아픈’, 일종의 ‘나만 없어 ○○○’ 신드롬이다. ‘어머, 이건 사야해’라며 ‘지름신’을 자극하는 문구도 유행처럼 번졌다. 트렌드 분석 전문가 이정민 트렌드랩506 대표는 “과거 럭셔리 업계에서 통용되던 ‘줄 세우기’와 ‘좌절감’ 코드가 최근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 제품군으로 옮아간 모양새”라고 말했다. ‘제품이 없어서 못 구한다’ ‘대기표 받고 기다려야 한다’는 둥 소비자를 안달 나게 했던 방식은 여전히 유효한 셈. 하지만 소비가 양극화되면서 ‘남들이 인정하는 싸고 좋은 제품’을 소유하는 것에 대한 심리적 기대 가치가 급상승한 것이다. 이 제품군은 사치품보다는 생필품에 가깝기 때문에 놓치면 아깝고 나만 억울하다는 것이다.

일러스트= 안병현

가격에 대한 장벽이 낮아진 대신 ‘인맥’ ‘나만의 비법’ 등 다른 자랑할 거리가 생겨나기도 한다. 예를 들어 2~3년 전 크게 유행했던 ‘허니버터칩’은 접근성이 높았기 때문에 전 국민이 도전할 수 있게 됐다. 가격은 저렴하지만 수량에 한계가 있어 쉽게 구하기 어렵다는 점이 소비자를 자극했다. 인터넷으로 ‘광클(미친 듯이 클릭하는 것)’을 하는 건 기본. 새벽부터 줄을 서거나 전국 팔도 각지를 돌아다니는 방법 등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친구의 친구, 사돈에 팔촌 등 각종 인맥을 동원해 ‘득템’을 하고 ‘인증’하게 되면 남들로부터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남들 다 있는데 나만 없어’는 인터넷에서 해시태그(#)를 달고 복제품처럼 비슷한 말을 유행처럼 쏟아냈다. 지난해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남들 있는 고양이 나만 없어’가 대표적이다. ‘#나만없어병’ 같은 신조어도 만들어냈다. 각종 온라인엔 ‘나만 없어 ○○○’이라는 글이 놀이처럼 번졌다. 이정민 대표는 “최근 들어 ‘경험’을 공유하는 게 트렌드가 되면서 ‘너도 하는데 나는 왜 못 해’ ‘너만 갔니? 나도 갔다’같이 존재감을 과시하려는 현상이 늘고 있다”며 “과거에 비해선 유행이 덜 획일적이고 다양화되긴 했지만 공유와 확산 속도가 빨라지면서 아이템에 대한 집단적 쏠림은 훨씬 심해졌다”고 말했다.

소속감 욕구와 무(無)취향 사이의 딜레마

대학생 정유정(가명·22)씨는 시간 날 때마다 소셜 미디어에서 자신이 팔로하는 이들의 패션과 동선을 체크한다. 스타일리시해 보이는 이들의 계정을 찾아다니며 그들이 입은 옷을 사고, 그들이 가본 식당을 찾은 뒤 자신의 소셜 미디어에 올린다. 정씨는 “어느새 친구들 사이에서 정보통이 됐다”며 웃더니 “요즘엔 그게 제 삶의 족쇄처럼 느껴진다”고 말했다. “어휴, 이것도 노동이에요. 시간과 노력을 얼마나 들여야 하는데요. 제 인스타그램에 ‘좋아요’가 몇 개씩 늘어나는지 보는 게 일상이 됐었죠. 한때는 신기하고 즐거웠는데, 이젠 내가 진짜 무얼 좋아하는지도 모르겠고…. 남들을 다 신경 쓰다 보니 요즘은 좀 버겁기도 해요.”

패션업계에서 일하는 직장인 남유주(37)씨는 요즘 옷장에서 옷 고르는 게 여간 힘든 게 아니다. “흔히 말하는 ‘선수’들끼리 알아보는 물건을 고르는 재미가 톡톡했어요. 그래서 새벽 줄 서기도 마다하지 않은 것이죠. 하지만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하잖아요. 평소엔 너무 튀어 보일까 봐 조금 위축돼요.” 그는 또 “유행이라면 우선 관심이 가면서도 유행이 빠르게 번질수록 심리적 거부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라며 “예전에 비싼 롱패딩을 산 적이 있는데 유행 좇아가는 사람처럼 비칠까 봐 있어도 못 입겠다”며 하소연했다.

지난 11월 ‘평창 롱패딩’을 사기 위해 일부는 누워서, 일부는 뜬 눈으로 밤샘 줄을 이룬 사람들./조인원 기자

양이 있으면 음이 있듯 소속감과 거부감은 ‘따라 하기’ 열풍을 자극하는 양날의 칼이다. 남정욱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는 소셜 미디어를 두루 살피다가 ‘독특한’ 유사점을 봤다고 밝혔다. “젊은 친구들 페이지를 보다 보면 ‘벗어날 수 없다’는 고백을 한 것이 눈에 띕니다. 혼자 있으면 불안하고 두렵고, 소속감에서 소외될까 봐 ‘남들과 비슷한 것’을 찾게 되는데, 또 자신만의 개성이 사라지는 것 같아 답답해하기도 합니다. 그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것이죠.”

단지 입을 것, 먹을 것을 벗어나 각종 사회 이슈에도 적용된다. 어느 사안이 화제가 됐을 때 목소리를 내지 못할 경우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이를 여럿 접한다. “많은 사람이 인정하고 좋다고 하면 그게 설사 거짓이라도 사실로 받아들이는 게 동조 현상이잖아요. 개인주의가 발달할 충분한 시간을 갖지 못한 한국에선 집단에 속해 ‘집단 정체성’을 느끼면서 편안하다는 생각을 하는 겁니다. 내 의사나 취향과 달라도 친구들로부터 외면당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게 되는 거지요.”

남들 뭐 하나 궁금… 관심 조절 장애 시대

‘쏠림 현상’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한 마케팅 업계 관계자는 “잘 따라 하는 것도 능력”이라고 말했다. 물건의 홍수 속에서 소비자 취향을 맞추다 ‘잭폿(Jackpot)’도 탄생하게 된다. 소비자의 ‘힘’도 이러한 쏠림이 토대다. 옆 사람이 무얼 하는지 궁금하고, 앞사람이 해 본 것은 해봐야 하는 심리는 ‘대박’을 일구는 열쇠가 되기도 한다. 그 힘으로 1000만 영화도 탄생하고, ‘완판 행렬’로 침체한 시장에 활력도 주고, 사회가 변화하는 원동력을 제공하는 것이다.

서울대 심리학과 곽금주 교수는 “동네 사람들끼리 서로를 돌봐주고 관심 주는 건 과거 우리의 미풍양속으로 어려움을 함께 헤쳐나가는 힘이 되곤 했다”면서 “관심이 비교와 만나면서 사회문제로 비화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모든 판단 기준이 ‘나’여야 하는데 어느새 우리는 ‘옆집’ ‘앞집’이 중요한 기준이 되죠. 늘 남을 의식하면서 나의 존재를 자꾸 알리고 싶은 사회 분위기가 과열되고, ‘너는 안 해봤니?’가 너와 나의 편을 가르는 중요한 질문이 되면서 다른 편의 사람을 지적하는 현상이 두드러지는 겁니다.”

개개인의 판단보다는 집단 의사가 강하기 때문에 타인에 대한 관심 역시 ‘쏠림 현상’에 강한 불을 지핀다. 과열된 관심으로 타인을 파헤치다가 지나치면 ‘신상 털기’까지 서슴지 않게 된다. 곽 교수는 “최근 ‘분노 조절 장애’가 대표적 현대사회 고질병으로 꼽히고 있는데 ‘관심 조절 장애’ 역시 관계를 해치는 심리적 질병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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